I Became the Villain’s Lost Daughter RAW novel - chapter (96)
악당의 잃어버린 딸이 되었다 96화(96/218)
감았던 눈을 뜨자 조금 전과 다른, 익숙한 실내가 보였다.
라그라스 상단의 가장 위층에 위치한 방에는 나를 기다리던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에리타 님!”
오늘은 미리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던 터라 갑작스레 나타난 내 모습에도 두 사람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흠흠, 유르젠, 테인. 잘 지냈어?”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평소였다면 반가운 두 사람을 만났으니 잔뜩 신이 났겠지만, 오늘은 그러기가 영 애매했다.
조금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소파로 다가간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의 유르젠을 힐끗 바라보았다.
‘다행히 기분은 괜찮아 보이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슬그머니 테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커다란 테인이 내 옆에 있으면 어쩐지 안심이 될까 싶어서였다.
“……지금 눈치 보시는 겁니까?”
그때 평소와 달리 테인의 옆에 앉아 힐끔힐끔 눈치만 보는 내게 유르젠이 물었다.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지 몰랐던 탓에 내 몸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유르젠의 성격이 솔직하다 못해 직설적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어? 아, 아냐. 내가 무슨 눈치를 봐. 하하…….”
아주 격하게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나는 아하하 웃으면서 부정했다.
물론 누가 보아도 나 눈치 보고 있소, 느낄 정도로 어색한 티가 팍팍 나는 대답이었다.
그런 내 모습에 유르젠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안 어울리십니다. 그냥 평소대로 하세요.”
그러고는 여상한 어투로 그렇게 말하며 주전자를 들어 찻잔을 채웠다.
곧 나와 테인의 앞에 연한 연둣빛의 차가 놓였다.
나는 그게 유르젠 나름의 괜찮다는 표현임을 알았다.
“……유르젠 님이랑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런 우리의 모습에 얌전히 옆에 앉아 있던 테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와 유르젠을 번갈아 바라보는 테인의 모습에 유르젠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예민함이 묻은 얼굴로 차만 호록 마셨다.
저건 나보고 알아서 대답하라는 의미였다.
‘하여튼 그 성격 어디 안 가지.’
오랜만에 보는 불퉁한 모습에 처음 만났을 때의 유르젠이 떠올랐다.
그때는 세상에 이렇게 까칠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는데.
잠시 그때를 상기하던 나는 이내 밝은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무슨 일 없었어.”
“으음…….”
내 대답이 못 미더운 모양인지 테인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하긴. 테인이 순진하긴 해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내가 유르젠이랑 싸웠을까 봐 걱정했어?”
그런 테인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장난스레 웃으며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결 좋은 잿빛 머리카락이 내 손가락 사이를 사락사락 지나갔다.
“……네. 에리타 님이 속상하신 거 싫어요.”
내가 쓰다듬기 쉽도록 상체를 숙인 테인이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그가 말할 때마다 잿빛 머리칼 위에 솟은 삼각형의 늑대 귀가 쫑긋거렸다.
과다한 귀여움에 잠시 눈을 끔뻑이던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 참. 제가 속상한 건 괜찮습니까?”
갑자기 테인에게 버려진 유르젠은 기가 막힌 얼굴이었지만.
유르젠을 힐끗 본 테인은 잠시 망설이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에리타 님은 마음이 여리시니까요.”
그 대답에 나는 웃었고 유르젠은 헛웃음을 뱉었다.
격투장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왔던 테인은 유독 나와 유르젠이 싸우는 것을 싫어했다.
대답은 저렇게 했어도 유르젠이 있는 쪽으로 쫑긋거리는 귀는 테인이 우리 둘 모두를 걱정한다는 것을 나타냈다.
유르젠 역시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지.
하지만 테인이 대놓고 내 편을 든 건 확실했다
“유르젠, 삐졌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제가 앤 줄 아십니까.”
얄밉게 느껴지기도 할 법한 내 장난스러운 물음에 유르젠이 미간을 좁혔다.
“아니, 뭐, 유르젠 너도 의외로 애 같은 구석이 있긴 하잖아.”
“……쓸데없는 말씀 그만하시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몇 년이나 알고 지낸 탓에 내 말에 어딘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유르젠이 구겨진 얼굴로 말을 돌렸다.
내가 처음 유르젠을 만났던 때는 유르젠에게 흑역사나 다름없는 시절이었다.
그때는 유르젠의 인간 불신이 최고조를 찍었을 때였으니까.
까칠하기로는 제국에서 제일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나나 테인에게는 누그러진 모습을 보이지만 본래 유르젠의 성격 자체는 예민한 편이었다.
“알았어, 그만할게. 이제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더 놀리면 싸늘해질 유르젠을 알기에 나는 적당한 선에서 놀림을 마무리했다.
“음, 일단 두 사람 다 내가 보낸 편지는 받았지?”
“이 황자 전하와 대공가가 협력 관계였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었는데 말입니다.”
“그러게. 그건 나도 몰랐었으니까.”
그 뒤로 나는 간략히 칼리온과 만났던 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편지로 보낸 내용에 조금 더 살을 덧대고, 글로는 적지 않았던 칼리온이 흑마법에 당했다는 사실까지.
유르젠과 테인은 내 가족을 제외하면 내가 유일하게 백 퍼센트 믿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
칼리온은 내가 믿을 수 있는 이에게라면 그의 사정을 이야기해도 괜찮다고 했었고.
‘아직 테인이랑 수인들에 관한 건 얘기를 안 하긴 했지만…….’
수인들의 동의도 받았으니 다음에 만날 때 이 얘기도 같이 하면 되겠지.
“그런……. 에리타 님이 예상하신 대로 흑마법이 엮여 있다면 생각보다 일이 더 복잡해지겠군요.”
유르젠이 피곤하다는 듯이 눈가를 문질렀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여튼 그래서 다음에 황자 전하를 뵐 때는 유르젠이랑 테인도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에리타 님이 원하시는 대로 할게요.”
테인이 순하게 대답했다.
가끔 테인은 내가 하는 말이라면 다 들을 것처럼 맹목적으로 굴곤 했다.
“아무리 내가 원해도 테인 네가 싫으면 싫다고 해야지.”
“……주인님이 원하시는 것 중에 제가 싫은 건 없는걸요.”
테인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주며 고개를 젓자 테인은 옅게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격투장에서 나온 직후의 테인은 나를 칭할 때 주인님이라는 단어를 썼다.
수직 관계처럼 보이는 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이름으로 부르면 된다고 했지만, 테인이 그 개념을 이해하기까지는 몇 달이 걸렸다.
‘그리고 왠지는 몰라도 주인님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것 같기도 했었지.’
다행히 몇 달이 지나자 테인 스스로가 나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가끔 주인님이라는 단어를 꺼내기도 했다.
‘마냥 하지 말라고 하기에는 눈빛이 뭔가 애절해서…….’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무런 말 없이 가만가만 테인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내게 있어서 테인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알에서 나온 새끼 새는 처음 본 사람을 어미라 인식한다지.
아마 테인이 내게 가진 맹목적인 그 감정도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닐까 싶었다.
늑대 수인답지 않게 순한 태도가 사랑스럽지만, 빠르게 수긍하고 체념하는 성격이 어떻게 고착되었는지를 알기에 기껍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잘해 줘도 기억은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무력하게도 그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다음에 만날 때가 되면 언질 주십시오. 일정을 확인해 두어야 하니.”
그때, 유르젠이 분위기를 환기했다.
“아, 응! 알았어. 나중에 알려 줄게.”
“그리고 앰버 길드에서 이런 편지가 왔는데요.”
“응? 앰버 길드에서?”
앰버 길드라면 며칠 전에 봤던 케이든 앰브론이 수장으로 있는 곳이었다.
“예. 제 이름을 적어 상단주 직통으로 보낸 겁니다. 내용은 평범하지만 한번 보시긴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유르젠이 테이블 한구석에 올려져 있던 편지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갑자기 웬 편지람.”
하얀 편지지에는 유르젠 케이시라는 이름이 정갈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이미 한 번 뜯었던 터라 깔끔하게 커팅된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나는 천천히 그리 길지 않은 편지를 읽었다.
“……앞으로 좋은 관계로 발전했으면 좋겠군요. 시간이 되신다면 앰버 길드에도 한번 방문해 주시길. 서국에서 들여온 과일차를 준비해 두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유르젠의 말대로 편지는 평범하디평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의도 역시 딱 같은 편에 선 동맹으로서 앞으로 잘 지내 보자는 그런 뜻이랄까.
하지만 내 눈에 띈 건 마지막 문장이었다.
“음, 역시 앰버 길드가 대단하긴 하네.”
“제가 서국 과일차를 좋아한다는 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니까요.”
다시 편지를 건네받은 유르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르젠이 서국에서 생산되는 과일차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나와 테인을 제외하고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예전에 한창 상단이 커 갈 무렵에는 차에 독이 들어 있기도 했었지.’
라그라스 상단은 공격적으로 크기를 불려 제국 제일 상단 자리에 성큼 다가섰고, 그런 만큼 상단주인 유르젠은 유명 인사였다.
다른 말로는 적이 많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가볍게는 몰락 귀족이었던 유르젠의 성공을 배 아파하는 이들부터 진득하게는 다른 상단까지.
그랬기에 유르젠은 일부러 본인의 취향을 내보이지 않았다.
“들여올 때도 다른 거랑 똑같이 들여오지 않았어? 물량도 딱히 차이 없었던 거 같은데.”
“차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대단한 거죠. 괜히 대륙에서 제일 유명한 정보 길드겠습니까.”
“뭐, 그건 그래.”
나는 유르젠의 말에 수긍했다.
앰버 길드가 제국을 넘어 대륙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정보 길드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