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40)
140화. 진솔한 얘기
“오..”
탈의를 마치고 남탕에 입성한 나는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름 아닌 남탕의 내부시설 때문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동네 사우나와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했다.
왜 사우나의 이름을 ‘파라오 스파’라 지은 건지 알 거 같았다.
중간에 놓인 스핑크스 구조물을 포함해 벽지까지 전부 이집트풍으로 꾸며져 있었으니까.
‘수온이 다양한 탕도 많은 거 같고.’
사실 애 같은 구석이 있는 내게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높은 곳도 무서워하지만, 취약한 면이 하나 더 있었으니까.
‘뜨거운 거.’
특히나 뜨거운 물을 나는 견디지 못했다.
왜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뜨거운 열탕에 몸을 담그고 ‘아, 시원하다!’ 하는 유형.
체질이 다른 탓이겠지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유형이었다.
그래서 가끔 수온이 다양하지 않은 사우나를 가면 곤란한 일이 발생했다.
내가 들어갈 수 있는 탕이 하나도 없을 때가 있으니까.
‘다행히.’
여기서는 그럴 걱정은 없을 듯했다.
그런데 문제를 만드는 녀석이 있었다.
“행님! 이 탕이 저를 부르는데요?”
동건이가 앞장서서 어떤 탕으로 향했다.
뒤따라간 나는 쓰인 물 온도를 확인했다.
[43℃]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뜨거워지는 온도였다.
이제 보니 탕에서는 김까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사족을 붙일 필요는 없다. 여기는 아니었다.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동건이가 웃으며 발을 쑥 담갔다.
첨벙.
“끄아악!”
뭐지 얘? 너무 자신 있게 담가서 뜨거운 탕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비명을 지르는 걸 보니 나랑 같은 유형인 모양이다.
물론 발도 곧바로 빼 버린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범재가 비웃으며 말했다.
“엄살떨고 있네. 맨날 상남자거리더니 그것도 못 버티냐?
“드, 들어가 봐. 발이 익는 줄 알았다고!”
“오버는.”
범재가 코웃음을 치며 발을 담갔다.
이어지는 장면에 동건이와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쑤욱.
발을 담근 범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까지 탕에 담가 버렸으니까.
그리고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한마디를 꺼냈다.
“아, 시원하다~”
이 녀석. 뜨거움에 강한 유형이구나.
범재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형도 들어오세요.”
“아니, 나도 뜨거운 물은 못 들어가서.”
“하나도 안 뜨거운데요?”
이런 유형이 하는 안 뜨겁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거짓말.
“정 그러면 발이라도 살짝 담가 보세요.”
그거야 뭐. 살짝 온도체크만 하는 느낌이라면 어렵지 않지.
소심하게 엄지발가락을 살짝 집어넣었다.
프스스.
장난이 아니라 그런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
잠깐이지만 엄지발가락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말했다.
“다른 데로 가자, 범재야.”
“뭐, 형이 그렇다면야.”
범재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동건이를 약 올리며 탕에서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둥지를 찾아 이동했다.
***
이후 우리가 간 곳은 열탕이 아닌 온탕이었다.
역시 이 정도가 내게는 딱 적정온도였다.
“하아…”
따뜻한 물에 하루의 피로가 전부 풀리는 느낌이었다.
대단한 건 필요 없다. 이게 힐링이지.
옆에서 동건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햐, 따뜻하다! 크하하!!”
이 웃음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느낌인데.
한편 범재는 뭔가 뚱한 표정이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범재야?”
“아뇨. 아까 거기 들어갔다 나와서 그런지 여긴 차갑게 느껴져서요.”
“아.”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체감되는 온도 차이가 어마어마하니까.
나는 범재를 달래며 말했다.
“여기 좀만 있다가 이동하자. 더 따뜻한 데로.”
“넵.”
그렇게 우리는 잠시 동안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와중 동건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행님.”
“어.”
“슬슬 남자들 간의 진솔한 얘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나왔네. 들어오기 전부터 반복하던 진솔한 얘기.
그게 뭔지 궁금하니 들어나 보자.
“동건이 너는 할 얘기 있어?”
“아. 우선 진솔한 얘기 이전에, 형한테 들어올 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거든요.”
“나한테?”
“네, 행님이 허락해 주시면 하겠습니다.”
“허락할게.”
사실 허락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말하고 말고는 이 녀석의 자유니까.
내 말에 동건이는 어울리지 않게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올 때 행님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졌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행님은 사우나 안에서도 가장 행님이구나 해서요.”
“푸흡.”
갑자기 옆에서 범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크크, 그거 쌉인정.”
반응을 보니 나만 이해를 못 한 느낌이었다.
뭐지? 내가 동건이의 말에서 놓친 게 뭘까.
내가 형인 건 당연한데 굳이 사우나 안에서 형이라고 할 이유.
‘아!’
생각의 흐름 끝에 나는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자식. 무슨 말을 한 건가 했더니.
나는 손으로 가볍게 물을 끼얹어 응징했다.
“억!”
뭐, 남자끼리 사우나에 오면 한 번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깃거리긴 했다.
그런 거 치고는 유쾌하게 넘어간 셈이었다.
자연스레 화제는 전환됐다.
“행님은 저희한테 궁금한 거 없으십니까?”
“흠.. 진짜 진지하게?”
“당연하죠. 남자들끼리의 진솔한 대화인데. 저도 진지할 때는 진지합니다!”
남자들끼리의 진지한 얘기라고 해 봐야 떠오르는 건 두 가지였다.
내가 학창시절에 친구들과 하던 얘기를 떠올리면 되는 일이니까.
‘여자 얘기랑 꿈 얘기지.’
특히 이 두 녀석은 내가 눈치챈 애정전선이 존재했다.
허나 바로 여자 얘기를 꺼내기에는 빠른 감이 있었다.
그러니 후자의 얘기를 먼저 꺼내기로 했다.
“동건이 너는 꿈이 뭐야?”
“.. 꿈이요?”
“응.”
너무 진부한 물음이었나?
동건이는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그.. 교사예요. 애들 가르치는..”
“오, 진짜? 좋은 꿈이네.”
생각보다 되게 잘 어울리는 꿈이었다.
아마 동건이가 담임이 되어 맡는 반은 무척 활기차지 않을까.
그런데 영문 모를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 뭐, 못 되겠지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동건이 너 공부 되게 잘하지 않아?”
“크크, 장난이죠, 행님! 저는 교대 문 다 부수고 들어가죠!”
뭔가 평소와 달리 억지로 텐션을 올리는 느낌인데?
뭐, 착각이겠지.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다 좋은데 문은 부수지 말고. 아, 참. 나 아는 사람이 서울교대생이거든. 혹시 입시에 궁금한 거 생기면 말해. 내가 물어봐 줄게.”
“와, 서울교대면 최고 아닙니까? 역시 행님의 의리는 하늘 같네요. 감동입니다, 행님.”
“하하.. 고맙다.”
이렇게 동건이의 조금은 의외였던 꿈 얘기가 끝났다.
다음은 자연스레 범재의 차례였다.
“범재 너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찾고 있는 중이에요. 아빠 일 도와주는 것도 재밌어서 그쪽으로도 생각 중이고.”
“그렇구나. 하긴, 아직 어리니까.”
똑똑한 녀석이니 뭘 해도 잘할 거 같았다.
이렇게 짧은 꿈 얘기가 끝났다.
***
꿈 얘기를 끝냈으니 남은 건 여자 얘기였다.
남자들끼리이기도 하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로 했으니.
꺼내도 이상하지 않은 화제였다. 말하기에 앞서 나는 밑밥을 깔았다.
“동건이 너도 허락받았으니까 나도 물어볼게. 얘기해도 되지?”
“당연하죠, 행님. 뭐든지 말씀하세요.”
괜찮다는 말을 들은 이상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동건이 너, 주연이 좋아하지.”
“…?”
내 돌직구에 동건이의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옆에서 범재가 말을 덧붙였다.
“야, 솔직하게 말해도 돼. 여기서 나눈 대화는 입도 뻥긋 안 할 거니까.”
범재의 이 말은 불문율이었다.
사우나에서 나눈 대화를 외부에 발설하는 건 죄니까.
동건이는 또 어울리지 않게 쭈뼛거리다 입을 열었다.
“치, 친구로서는 좋아하지. 어억!”
철퍽.
싱거운 대답에 곧바로 물세례가 날아들었다.
가차없이 물을 끼얹은 범재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에라이, 너는 앞으로 남자라는 말 입에 붙이지도 마라. 그것도 떼고.”
그게 뭔지는 내 입으로 말하지 않겠다.
역시 친구라서 그런지 언행에 거침이 없었다.
동건이는 억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야, 그럼 너는! 너도 오예림 좋아하잖아! 다 티 나!”
이러면 물어볼 수고를 덜었네.
내가 꺼낼 말을 대신해 주는 동건이였다.
그런데 범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 좋아하는데?”
“뭐?”
“.. 근데 그렇게 티 나냐?”
범재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형이 봐도 느껴질 정도예요?”
사실대로 대답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걔도 알았을까요?”
“모르지. 그냥 헷갈리는 정도 아닐까?”
“아…”
쿨한 범재의 인정에 동건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상태였다.
솔직히 나도 조금 놀라긴 했다.
‘이렇게 바로 얘기할 줄이야.’
맨날 남자 남자 하는 동건이지만, 가끔 보면 정작 더 남자다운 건 범재였다.
예림이에게 마음을 들켰을까 걱정하고 있는 거 같긴 하지만.
이윽고 동건이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좋아했냐?”
“몰라. 그냥 언젠가부터. 넌 언제부터 좋아했는데?”
“.. 중딩 때부터.”
이제야 깔끔하게 인정하는 동건이였다.
역시 내가 애정전선을 잘못 본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말하는 걸 보니 동건이랑 주연이는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나 보네.
이건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오래 간직한 마음이구만.
한 번 입이 풀리니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다 범재가 나를 향해 말했다.
“혹시 팁 없어요, 주원이 형?”
“.. 팁?”
“네. 좋아하는 여자의 호감을 얻는 팁 같은 거요.”
절로 헛웃음이 나오게 하는 물음이었다. 이걸 나한테 물어보다니.
하기야 녀석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긴 했다.
“글쎄.”
나는 화제를 돌리려 대충 대답을 건넸다.
그런데 동건이의 말이 이어졌다.
“행님은 뭐 안 해도 호감을 사겠지, 범재야.”
“그건 그래.”
아니, 왜 또 수긍하고 있는데.
한 번도 이렇다 할 호감을 받아본 적 없는 나로서는 낯간지러운 대화였다.
그러던 와중 동건이가 내게 물었다.
“행님은 뭔가 하실 말씀 없습니까? 듣고 싶은데.”
“할 얘기?”
“네. 저희는 뭐.. 밝혔으니까. 행님 얘기도 듣고 싶습니다. 마음속에 숨겨놓은 비밀이라든지, 아니면 저희는 모르는 연두의 귀여운 모습이라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너무 많아서 얘기를 못 하겠는데?”
한 마디에 세상 부러운 둘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연두 얘기 나오니까 또 보고 싶어지네.
힐링이 되는 온탕의 물도 연두성분을 채워주지는 못하는구나.
나는 고개를 휙휙 젓고는 생각했다
‘.. 할 만한 얘기라.’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할 때 이미 이 두 녀석과는 단순히 아는 형 동생 관계를 넘어선 사이였다.
꽤 긴 시간을 함께 보냈고, 어떤 녀석들인지 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동건이와 범재와의 인연은 앞으로도 쭉 이어질 터였다.
자연히 이 녀석들과 연두와의 인연도 지속될 거고.
연두를 친동생처럼 아끼는 녀석들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딱히 숨기려는 의도도 없었지만.
‘친구들이랑 지혜 씨에게 얘기했듯이.’
주위 사람들, 믿을 수 있을 사람들에게 숨길 이유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신뢰를 줘야 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판단한 나는 입을 열었다.
“딱히 비밀은 아닌데, 너희한테 해줄 얘기가 있어. 연두에 대한 얘기인데……”
연두 얘기라는 말에 범재와 동건이가 귀를 쫑긋 세웠다.
녀석들이 생각한 이야기는 아닐 텐데. 그래도 얘기를 꺼낸 이상 무를 수는 없었다.
어떻게 얘기를 시작하는 게 좋으려나. 친구들한테 설명해줄 때는 뭐라 했더라.
바로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 딸 생겼다.’
이렇게 다짜고짜 본론을 던졌었지.
그때와 달리 지금은 사용할 수 없는 멘트였다.
따라서 조금 변화를 주기로 했다.
“나 연두 친아빠 아니야.”
“……?”
“……?”
그와 동시에 두 녀석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