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만찬
꿀같은 휴식시간이 끝났으니 다시 일할 시간이었다.
배추를 물에 전부 헹궜으니 이제 남은 작업은 하나였다.
헹궈낸 배추에 김칫소를 구석구석 무치는 작업.
‘속을 넣는다고 표현한다는 거 같았고.’
이미 김칫소는 대야에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배추의 양 못지않게 엄청나게 많은 양.
하기야 이 배추를 전부 묻히는 데에는 상당한 양념이 필요할 테니까.
‘이걸 준비하는 데에도 엄청 시간이 들었겠네.’
이만한 양의 김칫소를 만드는 것도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었을 터.
배추를 미리 절여뒀던 것도 그렇고.
갈수록 숟가락만 얹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득 나는 대야의 김칫소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할머니.”
“뭐.”
“여기에는 뭐뭐 들어갔어요?”
“뭐, 이거 저거 다 들어갔지. 무채, 파, 젓갈, 생강……”
의외로 이번 질문에는 별 말없이 대답하시는 외할머니.
재료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역시 간단히 만들어진 양념이 아니었네.
괜히 더 미안해진 나를 향해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주원씨?”
그건 다름아닌 선동이의 엄마 김지아였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네.”
그녀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안 그래도 고생 많이 하는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아닙니다, 고생은요. 뭐든 말씀해 주세요.”
“네, 그럼……”
숟가락만 얹는다는 기분에 뭐라도 더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먼저 부탁해온다면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김지아는 말을 이었다.
“혹시 대야에 있는 김칫소 좀 여기에 골고루 부어줄 수 있어요?”
직사각형 모양의 테이블 위에 부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래야 방금처럼 둘러앉아 작업할 수 있을 테니까.
‘확실히.’
이것만큼은 내가 이 중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할머니나 아주머니가 김칫소로 꽉 찬 대야를 한 번에 들기는 힘들어 보였으니까.
“물론이죠.”
“조심해야 해요. 주원씨가 들기에도 엄청 무거울 거예요.”
“아, 네.”
나는 망설임 없이 양손으로 대야를 잡았다.
“흡.”
잠깐. 뭐냐, 이거?
과장이 아니라 말도 안 되게 무거웠다.
너무 힘을 줘서 그런지 얼굴이 터질 거 같은 기분이었다.
대야를 든 양팔 역시 부들부들 떨렸다.
‘풀업바랑 푸시업으로 단련하지 않았으면.’
과거의 나였다면 대참사가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대야를 떨어트려서 김장을 망쳐버렸을지도.
“후우..”
나는 가까스로 태연함을 유지하며 테이블 위에 대야를 기울였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선동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흡. 아저씨 얼굴 엄청 빨개요.”
표정은 유지해도 낯빛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얄미운 선동이녀석의 말에 대꾸할 여유도 없었다.
걱정하는 연두의 눈빛을 느끼며 나는 김칫소를 쏟아부었다.
이후 나는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현기증이 나네.’
힘을 너무 몰아써서 그런지 머리가 띵할 정도였다.
연두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빠, 갠차나요..?”
“괜찮아. 걱정하지 마, 연두야.”
“네에..”
그때 연두의 왼쪽에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안 괜찮은 거 같은데, 크크.”
“…”
이번에도 선동이녀석이었다.
이 녀석, 되게 얄밉다. 옆에 있는 게 아니라 응징도 불가능하고.
여섯 살한테 응징할 생각을 하는 거 자체가 웃기긴 하지만.
그런 와중 아주머니들이 말했다.
“역시 우리랑 다르네. 우리는 조금씩 나눠서 한참을 부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역시 젊음이 좋긴 좋아?”
“아니지. 우리가 젊을 때 저거 들라면 들었어? 그냥 할머니 손주가 힘이 센 거지.”
또 낯간지러운 말이 귀에 들어왔다.
연두가 생긋 웃으며 아주머니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히히, 마자요! 연두 아빠는 힘 엄청 쎄요..!”
역시 내 칭찬에는 가만히 있지 않고는 못 배기는 연두였다.
***
김칫소를 묻히는 건 헹구는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배춧잎 하나하나 빠짐없이 양념을 묻혀줘야 했으니까.
어쨌든 본격적인 김칫소 묻히기 작업이 시작됐다.
‘이 작업을 할 때는 빼놓을 수 없는 게 있지 않나.’
김장을 해 본 적은 없어도 알고는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작업을 시작하는 동시에 김지아가 말했다.
“할머니.”
“뭐.”
“손주한테 한 조각 찢어서 안 먹여주세요?”
“흥, 애도 아니고 먹여주긴 뭘 먹여줘. 먹고 싶으면 알아서 입 안에 넣으면 되지.”
“에이, 할머니도 참. 그게 뭐예요, 정 없게.”
“시끄러! 니 아들내미한테나 먹여주던가 말던가.”
정말이지 할머니다운 대답이었다.
김지아도 나와 마찬가지로 익숙한지 그저 미소만 띨 뿐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김칫소를 묻힌 김치를 손에 들었다.
스윽.
찢는데 묘한 쾌감이 일었다.
그렇게 한 조각을 손에 든 나는 손을 뻗어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드셔 보세요, 할머니.”
꼭 먼저 찢어서 먹여주기를 기다리란 법은 없었다.
이렇게 먼저 준다고 ‘기브 앤 테이크’가 성립할지는 미지수지만.
할머니는 잠깐 흠칫하더니 고개를 휙 저으며 대답했다.
“됐어, 이 녀석아.”
“아, 빨리요. 손 떨어질 거 같아요..”
“됐다니까!”
“아, 진짜.. 아까 무거운 거 드느라 안 그래도 팔 아픈데…”
내 되지도 않는 연기가 통한 걸까.
할머니는 결국 마지못해 내 손에 들린 김치를 입에 넣으셨다.
임무를 완수한 나는 뿌듯한 표정으로 손을 원위치했다.
아그작. 아그작.
이렇게 처음 김치의 맛을 본 건 할머니였다.
모두의 시선이 할머니를 향했다.
이윽고 할머니가 표정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미운 녀석이 줘서 그런지 드럽게 맛없네.”
옆에서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말했다.
“예쁜 손주가 줘서 엄청 맛있다는 뜻이에요.”
“.. 정말요?”
“그럼요. 내가 할머니를 40년을 봤는데, 호호.”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국어시간에도 이런 맥락없는 반어법은 들은 적조차 없었으니까.
미운 녀석이 예쁜 손주이고, 드럽게 맛없다가 엄청 맛있다에 대응한다니.
‘더블 반어법, 뭐 그런 건가.’
새로운 표현법을 창조하는 할머니였다.
그나저나 역시 ‘기브 앤 테이크’는 없는 건가.
하기야 조금이나마 기대한 거 자체가 요즘 말로 할알못(할머니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긴 했다.
맛이 궁금했던 나는 양념을 묻힌 김치를 다시 손에 들었다.
직접 찢어서 먹어보려는 의도로.
“…… 먹어 보던가.”
그때 할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김치 조각이 눈앞에 있었다.
그걸 들고 있는 건 다름아닌 할머니 민홍임이었고.
예상을 못한 터라 순간적으로 나한테 주는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자연스레 입밖에 외마디 의문사가 튀어나갔다.
“네?”
“네는 무슨 네야! 드럽게 맛없는지 어떤지 먹어봐야 알 거 아냐!”
“아!”
주위 시선까지 느낀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되게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시선들.
그제야 나는 김치 조각을 입에 넣었다.
아그작.
“…?”
입에 넣고 한 입 씹는 순간 드는 의문이 있었다.
어떻게 이런 맛이 날 수 있는 거지?
사 먹는 마트나 편의점 김치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건 김치가 아니었어.’
젓갈의 풍미와 감칠맛이 짜릿하게 입 안을 맴돌았다.
아까 아주머니가 한 말이 정확했다.
할머니의 ‘드럽게 맛없다’는 ‘엄청나게 맛있다’라는 뜻이었다.
먹었으니 맛 평가를 할 필요가 있었다.
“.. 너무 맛있는데요?”
“호호, 그래요? 다행이네. 어디 보자..”
이렇게 즉석으로 김치 시식회가 열렸다.
시골의 정에 알맞게 서로 먹여주는 시식회였다.
“.. 아빠!”
“응, 연두야.”
“연두도 찢어써요! 아빠 주려고..”
“하하, 그래?”
그렇게 나는 연두표 김치도 입 안에 넣었다.
연두가 직접 양념을 묻힌 김치였다.
아그작.
다시 먹어도 아찔할 정도로 맛있었다.
황홀한 표정의 나를 세상 뿌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연두.
이러니까 꼭 아빠와 딸의 역할이 뒤바뀐 거 같다.
‘너무 아쉬운데..’
이렇게 맛있는 걸 연두한테 줄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연두는 맛있다는 감정을 느끼기에 앞서 매워서 어쩔 줄 몰라할 테니까.
“끄악!”
그리고 이미 한 명의 피해자가 발생한 상태였다.
“매워! 맵다고!!”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 매운데 왜 먹어?”
“매운데 맛있으니까요! 후아.. 하아..”
사실 김치가 그리 맵게 양념이 된 건 아니었다.
원래 어렸을 때는 매운 걸 잘 못 먹는 경우가 많으니까.
나도 초등학교때만 해도 김치도 잘 못 먹었지.
‘어느 순간부터 잘 먹게 됐고.’
여섯살인 이 녀석도 아직 매운 음식에 대한 내성이 부족한 듯했다.
그와 별개로 김치의 맛은 좀 아는 거 같지만.
연두는 그런 선동이를 묘한 눈빛으로 빤히 바라봤다.
그 눈빛을 본 나는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연두야?”
“연두도 김치 먹어보고 시퍼서요.. 근데…”
“근데?”
“무서어요…”
연두에게 매운 음식은 무서운 존재였다.
조금 생각한 끝에 나는 말했다.
“그럼 지금 말고 나중에 도전해 보자, 연두야.”
“나중에..?”
“응. 나중에 김치를 안 맵게 먹을 수 있을 때.”
연두는 눈이 동그래져서 되물었다.
“김치를 안 맵게 머글 수 이써요..?”
“응, 그럴 수 있어.”
통화 중에 외할머니와 나눈 대화가 있었다.
그 대화에 따르면 연두가 먹을 수 있는 김치도 존재했다.
연두에게는 그 김치를 먹여줄 생각이었다.
***
상당한 시간이 흐른 끝에 작업은 후반부에 다다랐다.
동이 날 거 같지 않던 배추도, 막대한 양의 김칫소도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김치로 용기를 몇 통을 채웠는지 모르겠다.
‘작업이 꽤 힘든데도.’
의외로 연두는 지친 기색이 거의 없었다.
못 먹는 음식인 데다가 지루한 반복작업인데도 말이다.
옆에 있는 선동이녀석도 마찬가지였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이 얄미운 말투는 지금까지 틈틈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연두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의문사를 내뱉었다.
“으응..?”
“봐. 여기 양념이 잘 안 묻어서 하얗잖아. 이러면 나중에 먹을 때 엄청 싱겁다고.”
“싱거워..?”
“…”
“아! 싱거워요..?”
“응.”
와. 정말 이 정도면 서당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딱히 반말을 하려 되물은 거 같지도 않은데.
‘싱겁다는 단어가 어려웠던 거겠지.’
아무튼 존댓말에 상당히 예민한 선동이녀석이었다.
내가 볼 때는 이 녀석도 딱히 예의바른 편이 아닌데 말이다.
당장 엄마에게만 해도 존댓말은 안 쓰고, 나한테도 까불거리니까.
‘언제 한 번 예절교육이 필요하겠어.’
절대 연두랑 다정해 보여서 하는 생각이 아니다.
아무튼 선동이녀석도 지친 기색 없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연두가 하는 것까지 계속 신경쓰면서.
그런 녀석을 보며 김지아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선동이 너, 연두때문에 그렇게 오겠다고 난리를 친 거구나?”
이제야 눈치챈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한편 선동이는 화들짝 놀라 대꾸했다.
“무슨 소리야! 아니야!”
“아니긴. 연두 옆에 딱 붙어서 가르쳐주는 것도 그렇고. 김장도 한 10분 하다가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 보면. 내가 아는 우리 아들 선동이가 아닌데?”
“아니라고!”
“요게 어딜 엄마한테 소리를 질러!”
꽁.
결국 예절교육은 김지아가 대신했다.
그런 후에 김지아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슬슬 거의 된 거 같은데, 준비는 제가 할까요?”
“그래, 지아가 해.”
“뭐 재료는 다 있으니 불만 올리면 되니까.”
김지아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네, 그럼 불만 올리고 바로 올게요.”
사전에 들은 바가 없었던 나는 그저 의문일 따름이었다.
대체 뭘 준비한다는 거고, 뭘 위해 불을 올린다는 건지.
김지아가 향한 곳은 아까부터 옆에 보이던 가마솥이었다.
‘.. 설마?’
무언가 떠오른 나는 입을 열었다.
“혹시 뭘 준비하러 가시는 건지..”
“아, 몰랐어요? 할머니가 얘기 안 해 주셨나?”
“김장한 날에는 무조건 같이 먹어야 하는 게 있잖아요.”
이제 반쯤 확신이 들었다.
그런 나를 향해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수육이죠.”
정확히 예상한 그대로의 음식이었다.
김장을 안 해 봤다고는 해도, 김장김치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은 알고 있었으니까.
아주머니는 배추에 김칫소를 묻히며 말했다.
“가마솥에 삶으면 엄청 맛있거든요. 기본 재료에 약초랑 나뭇가지도 넣고 끓이는 거라 기가 막혀요.”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침샘이 일었다.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됐으니까.
이 맛있는 김치에 가마솥에 삶은 수육이라니.
자연스레 손이 움직였다.
스윽. 스윽.
지금껏 열심히 안 한 건 아니었지만 노동의지가 더 급격히 올라갔다.
이걸 끝내면 기다리고 있는 게 수육이라고 생각하니.
이윽고 돌아온 김지아도 다시 작업에 동참했다.
“진짜 맛있겠다, 연두야. 그치.”
“네에.”
연두도 기대감에 잔뜩 부푼 표정이었다.
막바지라고는 하지만 시간은 꽤 소요됐다.
애당초에 쉽지 않은 작업이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른 끝에,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수고했어요.”
“주원씨도 고생 많았어요. 처음 해 보는 거였을 텐데.”
나는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아주머니들은 아이들에게도 얘기했다.
“우리 애기들도 고생 많았어.”
“연두는 어떻게 한 번을 안 쉬고 그렇게 열심히 해?”
“어쩜 마음씨까지 이렇게 착할까.”
아주머니들의 칭찬에 연두가 배시시 웃음지었다.
그러던 와중 김지아가 말했다.
“열심히 일했으니 만찬을 즐겨야죠. 우리도 애기들도. 지금 꺼내면 딱이겠는데요?”
조금 속보이긴 하지만 굉장히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수육 얘기가 나온 이후로 작업 도중 머릿속에는 쭉 수육 생각뿐이었으니까.
김치를 먹지 못한 연두에게도 빨리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었고.
휘리릭.
우리는 테이블 위 깔아 둔 양념이 잔뜩 묻은 비닐을 거뒀다.
그러자 테이블은 훌륭한 식탁으로 변모했다.
이후 향한 곳은 다름아닌 가마솥 앞이었다.
김지아가 가마솥 뚜껑을 잡으며 말했다.
“자, 열겠습니다.”
이후 모습을 드러내는 가마솥 안의 모습.
팔팔 끓는 육수와 갖가지 재료들, 그리고 메인인 수육 덩어리.
‘.. 이건.’
정말이지 미친 비주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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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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