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307)
307화. CD
“주원씨랑은 그림에 대한 얘기도 좀 나누고 싶은데..”
즉석으로 들어온 팬미팅 제안. 물론 내가 팬의 입장이었다.
다시 비유하자면 이건 마치 메시가 축구 꿈나무에게 축구에 관해 얘기를 나누자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야 영광이죠.”
동시에 걱정이 든 나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거동이 힘드시지는 않을까 해서 건넨 물음이었다.
혹여나 평소에 하지 않는 산책을 즉흥적으로 하시려는 거라면 만류할 필요가 있었다.
들려오는 대답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괜찮아요.”
그녀는 미소를 띠며 얘기했다.
“은숙이나 우영이가 오면 한 번씩 나가거든요. 산책하러.”
은숙은 우영이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이로써 종종 산책을 가신다는 걸 확인했으니 망설일 이유는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가시죠.”
말없이 우영이가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에 따라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는 천재경.
조금 위태해 보이긴 했지만 일어선 뒤에는 중심을 잡았다.
동작은 느리지만 스스로 거동은 가능하신 듯했다.
터벅. 터벅.
그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어갔다.
평소 연두의 짧은 보폭에 맞춰 걷는 게 습관이 돼서인지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그보다 조금 더 느린 속도이긴 했지만.
그래서인지 연두도 할머니의 속도를 고려해 천천히 한 발 한 발 옮기는 게 눈에 보인다.
‘이건 알려주지 않았는데.’
병원에 들어오기 전에 얘기한 몇 가지 주의사항.
산책을 할 거란 건 몰랐기에 이런 배려는 거기 속해있지 않았다.
즉,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생각해서 하고 있다는 거다.
“하하.”
내 딸이지만 정말 예뻤다.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마음씨가.
천재경의 눈에도 그게 보인 모양이다.
“연두야.”
“네, 할머니!”
“고맙구나. 할머니한테 맞춰서 천천히 걸어줘서.”
“…”
칭찬에는 괜히 쑥스러운 표정과 함께 얼굴을 붉힌다.
그런 연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건물을 나서기 전, 병원 측에 먼저 잠깐 산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끼익.
이후 문을 열고 나섰다.
확실히 작은 창문으로는 느껴지지 않던 선선한 공기가 느껴졌다.
봄이라 다행이었다.
햇살도 뜨겁지 않고 반대로 바람이 너무 쌀쌀하지도 않았으니까.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
앞서 보긴 했지만 산책로가 그리 넓지는 않았다.
아마 환자에게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아, 좋다…”
그렇게 말하며 천재경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답답함이 싹 가신다는 듯이.
나까지 덩달아 상쾌해지는 기분이다.
“후아…”
연두도 한껏 숨을 들이켠다.
그러는 사이 우영이는 툭 던지듯 얘기했다.
“힘들면 얘기해, 할머니.”
“그래.”
말투는 평소와 같지만 우영이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는 배려심이 묻어났다.
아까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던 낯빛도 그렇고.
얼마나 할머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지가 느껴지는 모습이다.
툭.
조금 걷다가 벤치 앞에서 멈췄다.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도중 천재경이 말했다.
“우영아.”
“왜. 힘들어?”
“아니, 그게 아니라……”
답답하다는 듯 할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연두가 심심해하잖니. 참, 내 손주지만 눈치가 없다니까.”
그 말에 먼저 반응한 건 다름아닌 연두였다.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럴 만도 했다.
‘전혀 안 심심해 보였으니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연두는 즐겁게 산책한 뒤 휴식을 취하고 있던 것뿐이니 말이다.
할머니도 그걸 모르지는 않으셨을 텐데, 말투도 그렇고 아무래도 의도가 숨겨진 장난으로 보였다.
막상 우영이는 더 황당한 표정으로 얘기한다.
“땅콩이 심심한 거랑 내 눈치랑 무슨 상관이야?”
“같은 또래잖니. 이럴 때는 오빠가 재밌게 해 줘야지. 안 그러면 너 연두한테 미움받는다?”
“아니, 잠깐만. 전제부터 틀렸잖아. 이 꼬맹이랑 내가 어떻게 같은 또래로 보여?”
이런. 금기어가 등장해 버렸네.
아니나 다를까 가만히 듣고 있던 연두가 참가했다.
“연두 꼬맹이 아니에요!”
평소와 달리 자그마한 한 마디가 더 이어진다.
“바보 우영이오빠..”
우영이의 눈이 띠용 확장됐다.
그런 채로 입을 연다.
“땅콩.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여, 연두 꼬맹이 아니라고 해써요..”
“그거 말고 그다음에.”
연두는 대답하지 않고 내 옆으로 쏙 숨어버린다.
이제 당하고만 있지 않는 연두였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우영이는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애초에 놀아주는 게 성립이 안 되지. 여섯살 땅콩이랑 곧 성인을 앞둔 나랑 어떻게 놀아. 뭐 가위바위보라도 해 줘야 하나?”
가끔 보면 정말 유치한 녀석이다.
할머니도 못 말린다는 듯 그런 손주를 바라본다.
그런 와중 연두가 내 옆에 숨은 채로 말했다.
“연두 가위바이보 안 해여, 우영이오빠랑..”
또 발끈한 우영이가 반응했다.
“나도 안 할 거거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유치하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왜인지 우영이의 얼굴에는 뭔가 서운함이 엿보인다.
여기까지는 나도 연두가 토라져서 그러는 건 줄 알았는데.
이어지는 말을 들으니 반전이 있었다.
“가위바이보 말고 하나 빼기 일.”
“.. 뭐?”
“하나 빼기 일 하고 시퍼요..”
생각지 못한 반전이었다.
토라진 게 아니라 단지 가위바위보 말고 다른 게 하고 싶은 것뿐이었다니.
그건 바로 하나 빼기 일이었다.
뒤이어 들려오는 우영이의 대답은 더 반전이었다.
“그게 뭔데.”
하나 빼기 일이 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옆에서 나는 간단히 룰을 알려줬다.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두가 불쑥 양손을 내밀고는 게임을 시작했다.
“시작! 하나 빼기 일!”
“뭐, 뭐야!”
연두가 낸 패는 가위와 보.
기습공격에 놀랐는지 우영이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뻗었다.
문제는 그 패가 폭소를 불러일으켰다는 거지만.
“푸흣.”
아직 룰을 이해하지 못한 걸까.
우영이가 뻗은 양손은 전부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과 함께 연두가 다시 외쳤다.
“하나 빼기 일!”
연두가 내민 건 보자기.
그에 따라 우영이는 또 얼떨결에 왼손을 내밀었다.
승패는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상 패를 낸 시점부터 정해져 있었던 셈이지.
“헤헤, 이겨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연두.
옆에서 나는 장난스레 웃으며 얘기했다.
“뭐야. 꼬맹이랑은 수준이 안 맞는다 어쩐다 하더니 실망이네, 우영이..”
가벼운 약올리기 스킬을 사용했다.
친구녀석들과의 무수한 공방을 통해 단련된 스킬 중 하나였다.
의외의 조력자도 있었다.
“호호, 연두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는데? 우영이오빠 바보.”
“…”
뒤늦게 우영이는 나를 보며 소리쳤다.
“아니, 형!”
“응?”
“두 개 똑같은 걸 내지 말라는 말은 없었잖아요! 설명을 잘해 줘야죠!”
나는 괜히 움츠러든 목소리로 대응했다.
“두 개 똑같은 걸 내라는 말도 안 했는데..”
이건 좀 고난도 약올리기 스킬이다.
우영이는 억울한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말했다.
“됐어요. 방금으로 완벽히 이해했으니까. 야, 땅콩. 다시 해!”
“네! 일 대 영이에요.”
“…”
수준이 안 맞아서 못 놀아준다더니.
누구보다 게임에 과몰입하고 있는 우영이였다.
***
“그럼 이렇게 한 바퀴만 돌고 올게.”
하나 빼기 일에 완전히 빠진 우영이와 연두를 두고 나와 천재경이 몸을 일으켰다.
작게 한 바퀴만 돌며 얘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뭐, 괜찮겠지.’
다소 애같은 면이 있긴 하지만 우영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연두와 단둘이 있게 할 수 있는.
그렇게 시작된 산책 겸 팬미팅. 먼저 입을 뗀 건 천재경이었다.
“직접 보니 정말 신기하네요.”
“어떤 거 말씀이세요?”
“우영이가 여자아이랑 저렇게 서슴없이 대화하는 모습이요. 내가 아는 우영이라면 상상도 못 할 모습인데…”
“하하, 그런가요.”
확실히 그랬다.
학교에 들렀을 때 느낀 건데 또래를 대하는 모습부터 우영이는 다소 공격적인 면이 있었으니까.
연두를 대할 때는 전혀 그런 면이 보이지 않았다. 말없이 챙겨주는 건 봤어도.
“그리고 주원씨도요.”
“저요?”
“다행이에요. 우영이한테 주원씨같은 좋은 형이 생겨서. 마음이 안심이 되네요.”
그녀는 미소를 띠며 덧붙였다.
“.. 한 번도 못 봤거든요.”
“어떤……”
“우영이가 아빠 말고 그렇게 누군가를 잘 따르는 건.”
자연히 조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여기서 ‘아빠’는 천재경에게는 무척 아픈 손가락일 테니.
애써 어색하게나마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보이셨나요? 그렇게 잘 따르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뇨.”
그녀는 확신하듯 답한 후 얘기했다.
“주원씨는 우영이한테 은인같은 존재예요.”
“.. 은인이요?”
“네.”
다소 낯간지러운 단어와 함께 그녀는 얘기했다.
나와 인연이 생기고 난 후의 우영이의 변화에 대해.
몰랐던 사실도 꽤나 있었다.
‘밝아진 것뿐만 아니라.’
나와 연두에 관해 얘기할 때면 무척 즐거워했다는 것까지.
그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학습지 그림 그리는 걸 종종 봤어요.”
“아, 그러셨나요?”
“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느껴지더라고요. 주원씨가 어떤 사람일지.”
그녀는 천천히 걸으며 얘기했다.
“어떤 것도 쉽게 그리려 하지 않더군요.”
꽤나 묵직하게 다가오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천재경 화백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직접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림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관한 얘기임이 분명했다.
그녀의 말을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작품을 봤죠.”
“그 작품이라면……”
“그 날의 감정.”
생각지 못한 말에 어깨가 들썩였다.
‘그 날의 감정’은 청년작가 미술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내 그림이었다.
우영이가 보여준 모양이었다.
“많은 게 느껴지는 그림이었죠. 여러 감정들이 교차하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작품에 대한 코멘트였다.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표현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영광입니다.”
“에이, 영광은요. 그냥 할머니의 감상일 뿐인데.”
그녀는 손을 휙휙 저으며 말했다.
“동시에 생각하게 만들더라고요.”
“어떤 생각 말인가요?”
“주원씨가 그린 그 날. 내게 있어서 ‘그 날’은 언제일까.”
“.. 답은 찾으셨나요?”
“아뇨. 몇몇 장면이 떠오르긴 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천재경은 환한 미소를 띠며 얘기했다.
“아직 그 날이 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왠지 모르게 크나큰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 뒤에는 마음을 짓누르는 한 마디가 이어졌다.
“살 날이 얼마 남지는 않았겠지만.”
충분히 나으실 수 있다는 얘기를 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속은 곪을 대로 곪았거든요.”
어떻게 이런 얘기를 웃으며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아빠도 그랬다.
24시간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나를 볼 때면 늘 웃었지.
순간 울컥하는 기분과 함께 속마음이 말로 나갔다.
“.. 어떻게 웃을 수 있으세요?”
조금 놀란 그녀의 표정.
곧바로 실례라는 생각이 든 나는 서둘러 정정했다.
“다른 의도가 아니라.. 힘드실 텐데 어떻게 그렇게 밝으실 수 있는지 궁금해서……”
“간단해요.”
“네?”
“포기한 게 아니니까요.”
역설적인 말이었다.
애초에 호스피스 병동 자체가 그랬다.
더이상의 완치를 위한 치료는 힘들다는 판단 하에 오는 환자들이 있는 곳.
‘게다가.’
방금 얘기에 의하면 그녀 역시 어느 정도 체감한 듯 보였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런데 대체 뭐지. 뭘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지.
그런 의문 속에 들려왔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소중한 사람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우영이 말인가요?”
“네. 늙고 아파서 주책일지 몰라도 난 오래 살고 싶거든요. 그리고..”
“…”
“혹시 내가 죽더라도 이 마음은 같아요.”
밝은 목소리지만 장난은 결코 아니었다.
진심이 잔뜩 담겨있었다.
“계속 우영이 옆에 있을 거라서.”
눈앞에 보이는 환한 미소.
왜인지 그 미소가 얼굴도 목소리도 다른 한 사람과 겹쳐보였다.
***
“.. 하나 빼기 일!”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한 바퀴 다 돌았을 때는 또 게임이 펼쳐지고 있었다.
몰래 다가가 승부의 향방을 지켜봤다.
척!
우영이의 주먹과 연두의 가위.
결과는 연두의 패배였다.
“크크, 좀 이겨봐라, 땅콩.”
“으으..”
“17대 2. 참고로 한 번은 내가 계속 이기기 미안해서 져준 거다. 알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녀석이군. 열아홉 판 할 동안 안 빼놓고 센 것도 대단하다.
연두가 일 대 영이라 한 거에 대한 복수인 건가.
천재경은 이마를 한 번 부여잡더니 손주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리고선 냅다 꿀밤을 먹였다.
꽁.
“악! 뭐, 뭐야!”
“뭐긴, 요 녀석아. 연두 그렇게 이기니까 좋니? 어휴.. 참 누구 손주인지.”
“누구 손주긴. 할머니 손주지. 그리고 일부러 져 주는 게 더 나쁜 거야.”
못 말리는 녀석이었다.
분한 표정으로 연두가 얘기했다.
“다음에는 이길 꺼에요, 우영이오빠!”
“풋. 땅콩 네가 무슨 수로? 해 보니까 이거 똑똑해야 이기는 게임인데?”
“시으니랑 연습하면 이길 수 이써요! 시으니가 우영이오빠보다 똑똑하니까…”
“허, 어이가 없어서 기가 차네. 누가 나보다 똑똑하다고?”
“시으니요!”
“백날 연습해 봐라. 둘이 같이 덤벼도 못 이길 테니까.”
그렇게 하나 빼기는 다음을 기약하며 끝이 났다.
이후 병문안을 끝내고 우영이를 집에 데려다준 후 나는 집으로 향했다.
머릿속에는 계속 한 장면이 맴돌았다.
‘거기서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할머니의 마지막 말이 그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집.
문을 열자마자 나는 연두에게 말했다.
“연두야.”
“네에.”
“아빠랑 같이 뭐 하나 좀 같이 볼래?”
“뭐요..?”
“아빠 애기 때 모습.”
그걸 보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내 애기때 모습도 확실히 나오긴 하니까.
연두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볼래여! 보고 시퍼요..!”
“하하, 그래.”
방으로 향한 나는 서랍을 열었다.
마지막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둔 물건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위에 쌓인 것들을 다 뺀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스윽.
일부러 오랜 시간 감춰둔, 세월의 흔적이 잔뜩 느껴지는 CD 하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