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311)
311화. 밴드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선 레나가 앞으로 나갔다.
아직 조금 수줍긴 했으나 새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긴장은 많이 풀린 상태였다.
연두언니, 아니 친구 연두가 먼저 인사해 준 덕이었다.
“자, 레나.”
“네.”
조심스레 선생님이 건네는 물건을 받아들었다.
레나에게는 손만큼 익숙한 악기.
스윽.
다름아닌 바이올린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연주는 레나에게 별로 낯선 일이 아니었다.
하파엘 마이어란드루트
우선 아빠부터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슈페르거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고 각종 국제 콩쿠르에서 상을 휩쓴 음악인.
독일 내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는 인지도였다.
이은경
엄마도 분야는 달랐지만 역시 음악인이었다.
마찬가지로 여러 국제 콩쿠르에서 상을 받을 정도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으니까.
둘의 첫 만남도 콩쿠르였다고 하니 말 다 했지.
또 한국에 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교수.
엄마가 한 음대의 교수 자격으로 초청을 받았다고 하니까.
음악인에게 국제 콩쿠르 1위 이상의 스펙은 손에 꼽을 정도니 충분히 그럴 만 했다.
그와 별개로 레나는 처음 그 소식을 듣고 생각했다.
언니오빠들 엄청 힘들겠다고.
피아노와 바이올린.
둘 중에 레나가 바이올린을 하게 된 이유는 무척 단순했다.
엄마보다 아빠한테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천사같은 엄마지만 음악을 대할 때는 180도 달라지곤 했으니까.
막 화는 안 내도 엄청 날카로워진다고 해야 하나.
그런 엄마의 모습이 무서웠던 레나의 마음은 자연히 바이올린으로 기울게 됐다.
엄마와 달리 아빠는 음악을 대할 때 자유분방함 그 자체였으니까.
엉망으로 연주해도 오히려 북돋아 줄 정도였다.
“Gut gemacht, Lena! Spiel, was du willst!”
‘잘했어, 레나! 연주하고 싶은 대로 연주해!’라는 뜻이었다.
엄마아빠의 재능은 어디 가지 않았다.
바이올린을 시작하고 어느 시점부터 레나의 앞에는 수식어가 하나 붙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영재.
레나는 그 수식어가 좋았다.
그만큼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좋아하게, 아니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즐거움도 알게 된 지 오래였고.
가지고 있는 바람이라면 딱 한 가지였다.
‘있었으면 좋겠다.’
때때로 엄마와 아빠는 함께 연주하곤 했다.
그럴 때면 레나는 눈을 꼭 감은 채로 조화롭게 섞이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선율을 듣곤 했다.
그때만큼 황홀한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다.
음악을 대하는 성향은 달라도 엄마아빠는 환상의 짝꿍이었다.
‘.. 악기도.’
그리고 악기도 마찬가지였다.
레나의 생각에 피아노와 바이올린만큼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는 악기는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환상의 짝꿍이라는 소리다.
따라서 레나는 항상 생각했다. 피아노를 치는 환상의 짝꿍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엄마는 안 돼.’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일단 바이올린으로 아빠를 이길 수 없어서 실현 불가능했다.
언젠가는 이길 생각이긴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못 해.’
엄마와 함께하는 합주.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처졌다.
한 곡을 연주하는 데만 하루가 걸릴지도 모른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라고 할 게 분명하니까.
레나가 원하는 환상의 짝꿍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찾고 싶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꼭 환상의 짝꿍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나는 가방을 열었다.
동시에 가방 속에 보이는 바이올린.
스윽.
꺼내서 손에 든 뒤 앞을 바라봤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연두의 얼굴이었다.
바이올린이 신기한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우와!”
“나 저거 아라! 바이올린!!”
“우리 엄마도 바이올린 칠 줄 아는데!”
뒤이어 떠들썩해진 분위기.
그 속에서 레나가 생긋 웃으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우아하고 절도 있는 자세.
이제 새 친구들에게 보여줄 시간이었다.
바이올린 영재의 면모를.
***
울려퍼지기 시작한 바이올린 선율.
피아노 소리보다는 다소 무겁고 리드미컬한 연주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진 아이들.
“…”
연두도 입을 헤 벌린 채로 레나의 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이올린 연주를 보는 건 처음인 만큼 신기함과 새로움이 공존했다.
시선이 닿는 곳은 활을 잡은 레나의 손끝이었다.
“우아…”
꼭 아빠가 읽어주는 동화 속 그림을 보는 거 같았다.
작고 하얀 손으로 기다란 활을 잡고 연주하는 레나의 모습은.
스륵. 스르륵.
활이 줄을 스칠 때마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음표와 계이름들.
몸이 찌릿찌릿하는 느낌이었다.
피아노를 처음 보고 쳤을 때처럼.
놀란 건 연두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유미경의 표정은 말 그대로 감탄 그 자체였다.
미리 전해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여섯살 아이의 연주가 아니잖아.’
단지 재능이 출중한 느낌이 아니었다.
그야, 곡의 난이도는 결코 쉽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레나의 연주에서는 끼긱거리는 마찰음 한 번 나지 않았다.
‘게다가.’
몰입력도 아이의 수준을 넘어섰다.
완전히 연주에 집중한 모습.
옆에서 툭 건드려도 눈치채지 못할 거 같았다.
‘연두가 아직 가공하지 않은 원석이라면.’
레나는 이미 가공이 진행돼서 반짝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반짝임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동시에 이해가 갔다. 따로 학원에 보내 바이올린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게.
‘나라도 그럴 테니까.’
내가 일류 바이올리니스트인데 이런 딸의 모습을 본다면.
절대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을 거 같았다.
툭.
얼마 후, 연주가 멎고 레나가 활을 내려놨다.
짝.
어디선가 터지는 박수.
그걸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박수가 쏟아졌다.
“우아아!!”
“레나! 레나!”
“바이올린 진짜 짱이다..”
연두와 시은이는 스스로의 손으로 부족했는지 하이파이브를 하듯 손바닥을 맞추고 있었다.
세상 뿌듯한 표정을 짓는 레나.
친구들 앞에서 제대로 자기소개를 성공한 레나였다.
***
“루~ 루루~ ♪”
이런 날이 있었다.
귀가할 때 유독 연두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날. 넘치는 흥을 숨기지 못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날.
거의 100% 확률로 어린이집에서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게다가.’
옆에 있는 시은이 역시 기분이 좋아보인다.
둘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나는 옆에서 걸어가는 세연씨를 바라봤다.
그리고선 작게 얘기했다.
“저만 느끼는 거 아니죠?”
굳이 주어를 얘기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와 그녀는 같은 시선에서 동일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을 테니.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답이 돌아왔다.
“네, 확실해요.”
생각이 일치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망설일 이유는 없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연두야.”
“네, 아빠!”
“오늘 어린이집에서 좋은 일 있었어?”
질세라 세연씨도 시은이를 향해 똑같이 묻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답도 동시에 들려왔다.
“네!”
“응!”
연두의 말이 이어졌다.
“새 친구가 와써요!”
“.. 새 친구?”
“네.”
뜻밖의 이야기에 나는 말했다.
“그랬구나. 새 친구는 여자야, 남자야?”
“여자에요!”
“이름이 뭔데?”
“레나..”
되게 특이한 이름이네.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연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 친구에 대한 이야기였다.
“레나는요.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노랑색이에요!”
“.. 머리카락이 노랑색이라구?”
“으응!”
“완전 노랑색?”
“네, 완전 노랑색이에여!”
여섯살에 노랗게 염색이라. 부모님이 되게 신세대이신가 보네.
우습지만 처음 든 생각은 그랬다.
그런데 다음 얘기는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그리고.. 레나는 눈동자가 파랑색이에요!”
“…?”
머리카락은 그렇다 쳐도 여섯살에 컬러렌즈라니.
이건 좀 지나치게 신세대 아닌가?
내가 아는 상식에는 많이 벗어난 얘기였다.
‘.. 잠깐. 레나?’
그제야 머릿속에 생각이 스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또 물었다.
“연두야.”
“네에.”
“새 친구 말이야. 레나가 이름이면 성은 뭐야?”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연두.
대신 대답한 건 다름아닌 시은이였다.
“레나 요한나 테르제 마이어란드루트.”
갑자기 시은이가 쏟아낸 외계어.
나뿐 아니라 세연씨의 눈도 동그랗게 부풀었다.
이어지는 말을 듣고서야 알 수 있었다.
“레나는 독일에서 왔어요. 이름이랑 성을 다 합치면 엄청 길대요. 그래서 레나라고 불러요.”
“아!”
나도 모르게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새로운 친구는 당연히 한국인일 거라고.
이제 납득이 갔다. 새 친구의 머리 색깔과 눈동자 색깔이.
‘그나저나.’
그 긴 이름을 다 외웠다니.
이렇게 또 영특함을 드러내는 시은이였다.
뒤에 연두의 말이 들려왔다.
“레나는.. 바이올린을 엄청 잘 처요.”
“오, 그래?”
바이올린은 치는 게 아니라 켜는 거지만.
신난 거 같으니 집에 가서 정정해 주는 게 좋을 듯했다.
맥을 끊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네! 그래서 레나는 바이올리니스투가 꿈이래요..!”
“하하, 그렇구나.”
역시 피아니스투의 발음이 여기서도 묻어난다.
나는 빙긋 웃으며 얘기했다.
“그럼 연두는 꿈이 피아니스투고, 레나는 꿈이 바이올리니스투니까. 좋은 친구가 생겼네?”
“.. 네!”
“그런 걸 만들어보는 건 어때, 연두야?”
“어떤 거요..?”
“단비어린이집 밴드.”
별생각 없이 던진 이야기였다.
생소한 단어에 연두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되물었다.
“밴드?”
“밴드라는 건……”
나는 최대한 쉽게 설명해줬다.
“……그런 거야.”
“아!”
“그러니까 연두가 피아노를 치고, 레나가 바이올린을 켜고, 또 밴드에 들어올 친구들을 모집하는 거지.”
생각만 해도 설레는지 환하게 미소짓는 연두.
그러다 또 묻는다.
“아빠. 그럼 노래는요..?”
노래라.
확실히 밴드에 있어서 필수요소긴 하지.
굳이 멀리서 찾을 이유는 없었다.
“시은아.”
깜짝 놀란 시은이가 어깨를 들썩인다.
“.. 저요?”
“응.”
“왜요?”
“밴드 만들면 노래는 시은이가 하는 거 어때?”
시은이는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 노래 완전 못해요.”
격하게 부정하니 더 밀어붙이고 싶어진다.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괜찮아. 연습하면 잘할 수 있어. 시은이는 목소리가 예쁘니까.”
“…”
뭐지. 착각이 아니라면 얼굴이 살짝 붉어진 거 같은데.
밀어붙여서 화가 난 게 아닐까 조금 걱정이다.
생각해 보니 나라도 나더러 밴드 보컬하라고 하면 잔뜩 화 날 거 같긴 하네.
놀리는 건가 하고.
그런 와중 연두가 덧붙였다.
“마자! 시으니 잘 할 수 이써! 목소리 엄청 예쁘니까..”
“.. 정말?”
“응, 정말!”
진지하게 꺼낸 얘기는 아닌데.
벌써 연두는 밴드를 만들 생각 만땅인 듯했다.
세연씨는 그 모습이 귀여운지 쿡쿡 웃음짓고 있다.
‘뭐, 괜찮겠지.’
그렇게 나는 연두와 시은이의 단비어린이집 밴드 구상을 들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
드디어 다가온 전시회 날짜.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긴 하지만, 대상 자격으로 작품이 전시될 예정이었다.
그런 만큼 불참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왜냐고?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스케일이 커졌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아니었는데.’
전시회에 오기로 한 인원이 처음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우영이가 단톡방에 얘기해서 오기로 한 주연이와 예림이, 범재와 동건이.
그리고 홍수찬선생님.
‘이 정도였을 텐데.’
스케일이 훨씬 커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름아닌 연두에 의해서였다.
언젠가 시은이네와 함께 귀가하던 날이었다.
“시으나..”
“응.”
“연두 아빠 있자나…”
“아저씨?”
“응.”
배시시 웃으며 얘기하던 연두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미술대회에서 일등 해따?”
“.. 진짜?”
“응, 진짜!”
그 얘기를 들은 세연씨가 깜짝 놀라며 보러 오겠다는 의사를 표했고.
자연히 두 명의 인원이 늘어났다.
지혜씨가 오게 된 이유도 거의 비슷했다.
‘소풍 때였지.’
돗자리를 깔아두고 얘기하던 도중.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연두가 맥락없이 꺼낸 말이었다.
“지해언니..”
“응, 연두야.”
“연두 아빠 미술대회 일등 해써요…”
얘기를 들은 지혜씨의 반응도 세연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서운한 뉘앙스를 더 풍기긴 했지만.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됐고, 자연스레 스케일은 커졌다.
‘물론 고마운 일이지.’
많은 사람이 내 작품을 보러 시간을 내서 와 준다는 건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다만 의도치 않게 스케일이 커진 건 확실했다.
마치 집들이 때 같았다. 장소가 집에서 갤러리로 바뀌었단 거 말고는.
‘빠지는 건 말이 안 되지.’
이런 상황에 내가 빠지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빠질 생각도 없긴 하지만.
“아빠!”
막상 스케일을 키운 연두는 마냥 해맑게 웃음짓고 있다.
처음으로 전시회를 갈 생각에 설레서일까.
사실 나도 그랬다. 처음은 아니지만 굉장히 오랜만에 가는 전시회인 만큼 심장이 두근거렸다.
딸과 함께 가는 전시회는 처음이기도 하고.
“그럼 가 볼까, 연두야?”
“네, 아빠!”
출발할 시간이었다.
집들이, 아니 전시회 장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