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34)
34화. Draw
“지혜 씨..?”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은 다름 아닌 서지혜였다.
한동안 오지 않았기에, 발길을 끊은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잠깐의 어색한 적막이 흐르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네.. 안녕하세요.”
목소리부터 힘이 없는 게 무언가 침울해 보였다.
얼굴도 전에 비해 수척해 보이고.
무슨 마음고생이라도 한 건가? 아니면 어디 아팠던 건가?
그러던 와중 저번에 그녀가 한 대화가 떠올랐다.
‘.. 시험이었어요.’
‘아, 이제 끝난 거예요, 그럼?’
‘다음 주에 끝나요..’
당시에 그녀는 시험이라고 말했다. 시기로 따지면 아마 중간고사였겠지.
지금이라면 시험이 끝난 뒤 그리 오래 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혹시 시험 망친 거예요?”
“…”
아차. 기분도 안 좋아 보이는데 너무 정곡을 찔렀나?
말투만 조심스러웠지, 너무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내 우려와는 달리, 서지혜는 고개를 저으며 평범하게 대답했다.
“아뇨, 시험은 잘 봤어요.”
“그렇구나. 다행이네요, 하하.”
뭔가 힘겨운 느낌이 들었다.
전에는 무슨 말을 해도 대화가 물 흐르듯 이어졌는데, 지금은 대화가 툭툭 끊기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떤 얘기를 꺼내야 할지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부터 이전과 달랐다.
무의미한 대화를 계속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사실 지혜 씨랑 한 번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저번에 기분이 안 좋아 보였던 게 마음에 걸렸거든요.”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었다. 그 날의 서지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걸.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나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는 열차 시간을 맞춰야 해서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따라서 지금 물어볼 생각이었다.
왜 기분이 안 좋았던 건지, 내가 생각한 이유가 맞는 건지.
‘풀 수 있는 오해는 푸는 게 좋으니까.’
나와 그녀가 별 사이가 아니긴 하지만, 누군가와의 좋지 않은 감정을 굳이 가만히 둘 이유는 없다.
대화를 통해 풀 수 있다면, 그러는 게 좋다는 판단이었다.
그때였다.
“죄송해요..!”
갑자기 서지혜는 내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당황한 나는 입을 열었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사실 지금 학교 가는 길인데, 주원 씨한테 사과하려고 일찍 나왔어요.. 그 날 제가 괜한 짜증을 부린 거 때문에..”
“잠깐만요, 지혜 씨.”
“.. 사과 받아 주실래요?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이 말은 왜인지 앞으로는 너 볼 일 없을 거라는 말로 들렸다.
딱히 상관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어정쩡하게 푸는 건 마음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지혜 씨.”
“네.”
“왜 그랬던 건지 물어봐도 돼요?”
진지해진 내 표정 때문인지,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혹시 그 날 화 많이 나셨나요..?”
“아뇨. 급한 일 때문에 이야기 못 한 것도 전데요, 뭐.”
하지만 그 날의 서지혜는 확실히 날이 서 있었다.
나는 그전까지 한 번도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빙빙 돌려 물을 필요는 없었다.
“혹시 저 때문이에요?”
“네..?”
“제가 딸 있다는 거 얘기 안 해서 그런 거예요?”
이렇게 직접적으로 얘기할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모양이다.
서지혜의 얼굴에 당황감이 묻어났다.
이윽고 그녀가 대답했다.
“맞아요..”
그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주원 씨랑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순간적으로 욱했나 봐요. 웃기죠.. 제가 그걸 물어본 것도 아니고, 주원 씨가 저한테 얘기해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하하..”
순간적으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 그거 때문이었다니.
한편, 서지혜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 그러시는..”
“상황이 웃겨서요.”
“…?”
뭐, 이유를 알았으니 이제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완전히 오해예요, 지혜 씨.”
***
나는 대충 어떻게 된 건지를 설명해 줬다.
친구들에게 얘기한 것과 달리, 자세한 정황을 다 설명하지는 않았다.
오해를 푸는 데에 그 정도 이야기까지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냥 친척들이 연두를 데려가기 싫어했고, 안쓰러워서 내가 데려왔다는 것 정도만 이야기했다.
“그랬던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지혜 씨한테 이야기할 기회 자체가 없었다는 거죠. 연두랑 같이 지혜 씨 만난 날이, 연두가 우리집에 온 바로 다음 날이니까. 이해했어요?”
설명이 끝나자 서지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해는 갔다. 멋대로 오해하고 혼자 발끈한 상황이니까.
나라도 부끄러워서 고개 못 들 거 같다.
뭐, 보는 내 입장에서는 나름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진짜…”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열더니 말했다.
“진짜 너무너무 죄송해요.. 생각도 못 했어요. 그런 사연이 있었을 거라고는.”
“저도 생각도 못 했는데.”
“네? 어떤 걸…”
“지혜 씨가 그런 거 가지고 삐지는 속 좁은 사람일 거라고는.”
“흐으아아… 아니에요! 아, 내가 왜 그랬지? 아시잖아요. 저 원래 그런 애 아닌 거.”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표정이었다.
당황했는지 말도 꼬이고, 횡설수설하는 게 재미있다.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크크, 알아요, 알아. 장난이에요.”
“진짜 제 인생 최고의 흑역사예요.. 넘어가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그럼 앞으로 저한테 잘해요. 안 그러면 바로 언급할 거니까.”
“으으… 알겠어요.”
이제야 뭔가 예전의 대화로 돌아간 거 같았다. 그런데 뭔가 묘한 느낌이 든다.
엄청 당황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 상황이 우스운 모양이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아빠가 되신 거네요.”
“.. 그렇죠.”
“스물다섯에 아빠라니. 대박이네요, 크크.”
“더 젊은 아빠도 많은데요, 뭐.”
“힘들지는 않으세요? 갑자기 아빠가 됐는데.”
“처음에는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요?”
연두를 처음 만난 날에는 생각했다.
앞으로 엄청나게 힘든 나날이 이어질 거라고.
결국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그 반대였다. 연두가 오고 난 이후로 깜깜했던 내 인생이 밝아졌다.
목표가 생기고, 나 자신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나는 그녀의 질문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었다.
“전혀 안 힘들어요.”
그녀는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흐응.. 그렇구나..”
“물론 미숙한 건 많죠. 연두는 모르는 것도 많고, 경험해보지 못한 게 많거든요. 제가 그걸 도와줘야 하는데, 초보 아빠라 그런지 자주 헤매죠.”
서지혜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생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럼 제가 도와드릴까요?”
“지혜 씨가요?”
“네. 제 전공 아시잖아요.”
서지혜가 어깨를 으쓱했다.
전공이라. 그녀는 현재 한국교육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한국교대는 국내 교대 중에서 1위를 다투는 학교였다.
이변이 없는 한, 지혜 씨는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가 되겠지.
중고등학교 교사가 될 거였으면 사범대를 갔을 테니까.
그런데 의문점이 있었다.
“지혜 씨, 이제 2학년이잖아요.”
“와.. 2학년이라고 무시하시는 거예요?”
“하하, 아니에요. 제 말은 아이들을 대한 경험이 거의 없지 않냐는 거죠.”
“저 봉사활동 엄청 많이 했어요. 교대도 아이들 좋아해서 간 거고요.”
이건 사실일 것이다.
한국교대에 합격했을 성적이면 다른 곳도 얼마든지 갈 수 있었을 테니.
“그니까 한 번 믿어보세요, 헤헤.”
“지혜 씨 학교 공부는요?”
“시험 막 끝났는데요, 뭐. 내친김에 이번 주 주말 어때요? 제가 집으로 가는 걸로.”
“집이라면.. 제 집이요?”
“네.”
바로 날짜에 장소까지 잡다니, 행동력이 빠르다.
“우리 집 엄청 좁은데요.”
“그게 왜요?”
“…”
결국 나는 마음대로 하라고 이야기했다.
그 과정에서 번호를 물어보길래 알려 줬고.
휙. 휙.
그러는 사이, 서지혜는 음료 칸에 가더니 딸기우유 두 개를 꺼내왔다.
그녀가 자주 와서 사 먹던 우유였다.
“계산 부탁드려요!”
신난 표정으로 우유를 올려놓는 그녀.
삑. 삑.
“2300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우유 두 개를 양손에 들더니 내게 하나를 내밀었다.
“뭐예요?”
“사과의 의미로 드리는 선물이요.”
나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선물이 너무 과한데.”
“드시고 오늘 하루 힘내시라구요, 오빠.”
***
그 시각 단비어린이집.
연두를 포함한 아이들이 손에 크레파스를 쥐고 앉아 있었다.
아이들 앞에서 어린이집 교사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그림을 그려 볼 거야, 얘들아.”
신난 아이들의 표정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특히나 가장 표정에 기대를 머금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연두였다. 교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두는 왜 그렇게 활짝 웃어? 그림 그리는 거 좋아?”
“네에!”
“크크, 왜 좋은데?”
“우리 아빠는.. 그림 하늘만큼 땅만큼 잘 그려요..! 연두도 아빠처럼 잘 그리고 시퍼요..!”
“우와, 연두 아빠는 그림도 잘 그리셔?”
“네! 아빠가 연두도 예뿌게 그려줘써요..!”
기회만 나면 아빠 자랑을 하는 모습이 귀여운지, 교사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 그림, 선생님도 보고 싶은데? 얼마나 잘 그리시는지.”
“안 대는데.. 연두 비밀상자 안에 꼭꼭 숨겨났는데..”
“그렇구나.”
그러자 시은이가 옆에서 말했다.
“나만 몰래 보여주면 안 돼, 연두야?”
“.. 시으니 너만?”
“응. 보여주고 바로 비밀상자에 넣으면 되잖아. 그 대신 나도 내가 아끼는 거 보여줄게.”
역시 영특한 어린이답게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시은이였다.
연두가 잠깐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알게써.. 그럼 나중에 시으니 너만 보여줄께..”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연두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야, 연두는 어린이집 최고의 인기 어린이였으니까.
“연두야, 나도!”
“나도 보여주라.. 응?”
“우리 친구잖아.”
연두의 눈이 이리저리 돌아갔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연두.
그 모습에 어린이집 교사가 웃음을 참으며 아이들을 제지했다.
“자, 다들 그만하고 일단 그림을 그리기로 해요.”
아이들 중 질문 대장으로 꼽히는 도경이가 손을 들었다.
“선생님! 어떤 걸 그리는 거예요?”
“뭐든지 가장 그리고 싶은 걸 그리면 돼. 다 그리면 발표도 할 거니까 열심히 그려야 한다?”
“네!”
그렇게 단비어린이집 아이들의 그림 그리기가 시작됐다.
스윽. 스슥.
연두도 신이 나서 알록달록 크레파스를 꺼내 들었다.
본격적으로 그리기 전에, 연두는 무엇을 그릴지 곰곰이 생각했다.
“아!”
그러다가 연두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크레파스를 손에 쥐었다.
글은 몰라서 쓸 수 없지만,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었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스슥. 슥. 사사삭.
연두의 손은 백지 위에서 현란하게 춤추기 시작했다.
노란색, 연두색, 파란색, 초록색.
색깔을 바꿀 때마다 하얀 도화지가 알록달록 칠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몰두한 끝에, 연두는 그림을 완성했다.
“다 그렸어, 연두?”
“네!”
거의 마지막으로 그림을 완성한 연두였다.
연두는 씩씩하게 일어나 그림을 선생님께 내밀었다.
“재밌었어, 연두야?”
“네에!”
선생님은 웃으며 그림을 받아들었다.
“응..?”
그런데 그림을 보는 선생님의 눈이 커다래졌다.
심상치 않은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