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403)
403화. 약속
다음날, 선동이는 시골로 돌아갔다.
마지막 날을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 즐겁게 보내서일까.
선동이와의 작별은 예감했던 것처럼 슬프지는 않았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다음에는 우리가 시골로 놀러 갈게.”
“네.”
대답하는 녀석을 향해 물었지.
“기억하지, 선동아?
“뭐를요?”
“다음에 만날 때까지……”
굳이 끝까지 얘기할 필요도 없었다.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선동이가 씩 웃으며 말을 받았으니까.
“기억해요.”
“하하, 그래. 더 멋진 사람이 돼서 보는 거다?”
“네.”
그렇게 대답하고 난 뒤.
멋쩍은 듯 시선을 허공에 둔 채로 선동이는 입을 뗐다.
“저기.. 그..”
“응?”
“감사했습니다.”
수줍지만 진심이 묻어나는 인사였다.
그래서 좋았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선동이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거 같다는 생각에.
아, 참. 선동이의 마지막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내 손을 꼭 잡은 연두를 향해서도 말했지.
“연두야.”
평소에는 절대 안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래서인지 깜짝 놀란 연두를 향해 선동이는 말했다.
“고마워. 선물..”
집을 나서기 전 연두가 선동이에게 줄 선물이 있다며 방으로 데려갔다.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게 상의하거나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뜻밖의 선물이었지.’
들어가서 본 연두의 선물은 눈에 보이거나 손에 쥘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럼 뭐냐고?
따란. 딴.
바로 피아노 연주였다.
나조차 꿈에도 생각 못한 선물이었다.
여섯 살 아이가 생각하기에는 꽤나 고차원적인 선물이었으니까.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연두는 알았던 건지도 모른다.
선동이오빠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선물이 무엇일지.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옆에 선 채로 멍하니 연두의 연주를 바라보던 선동이의 표정이.
‘위기였지.’
잘 버티고 있던 선동이의 눈물샘이 진짜 터질 뻔 했으니 말이다.
다행히 끝내 울지는 않았지만.
선동이의 감사인사에 연두도 옅은 미소를 띄우며 화답했다.
머리에 꼽은 머리핀을 만지작거리며.
“응. 연두도 고마어.. 선물…”
마지막으로 선동이가 차에 타기 직전, 문득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놀랍게도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었다.
선동이의 꿈을.
“제 꿈이요?”
“응.”
마지막 물음에 선동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힘주어 말했다.
“의사. 의사가 될 거예요.”
“멋진 꿈이네.”
나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응원할게.”
그게 선동이와의 작별이었다.
***
선동이가 떠나고 돌아온 일상.
며칠이 흘러갔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작화.’
얼마 남지 않은 ‘소녀와 환상의 숲’의 작화에 몰두했다.
물론 우영이와 함께였다.
결과적으로 바로 조금 전, 나는 동화의 모든 작화를 끝맺었다.
‘후반부의 하이라이트 에피소드.’
숲의 끝자락에서 소녀는 호랑이를 맞닥뜨린다.
절체절명의 상황.
주저앉은 소녀의 앞에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건 다름아닌 원숭이 주드였다.
초반 에피소드에서 소녀에게 치유받은 절름발이 원숭이.
“율이는 해치지 못해.”
주드는 외발로 선 채로 나뭇가지를 치켜들어 으르렁거리는 호랑이를 겨냥한다.
내가 그리면서도 무척 짜릿한 장면이었다.
총 두 가지 포인트였다.
‘소녀의 손길이 구원의 손길로 돌아왔다는 거랑.’
또 다른 포인트는 무척 단순했다.
그냥 미치도록 멋있었다.
바람처럼 나타나 소녀의 앞에 서서 호랑이와 대적하는 내 손끝에서 완성되는 주드의 모습이.
“.. 주드?”
하지만 최악의 상황인 건 변함없었다.
주드가 숲의 먹이사슬 최강자인 호랑이에게 대적할 수는 없으니까.
더군다나 절름발이 아닌가.
소녀는 울며 주드를 향해 외친다.
“도망쳐, 주드!”
그런 소녀를 향해 주드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도망치지 않는다, 원숭.”
“주드.. 흐윽.”
“율이 너는 나를 구했다. 그러니까 나도 너를 구한다.”
그 말과 함께 주드는 나뭇가지를 든 손을 공중으로 치켜든다.
바로 그게 신호였다.
일순간 나무로 우거진 숲의 이곳저곳에서 수많은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우끼끼! 우끼!
동시에 주드를 덮치려던 호랑이에게 날아들기 시작한다.
바나나 껍질, 나뭇가지, 딱딱한 나무열매까지.
“어흥!”
결국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뒤돌아 도망가는 호랑이.
멍한 표정의 소녀를 향해 주드는 말한다.
“친구와 함께라면 원숭이는 지지 않는다, 원숭.”
“주드…”
다리를 다치고 무리를 제 발로 나갔던 주드가 하는 말이기에 의미깊은 대사였다.
그렇게 주드의 도움으로 숲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다.
이어지는 성대한 파티.
여기까지가 마지막 에피소드였다.
그리고 방금, 여운을 남기는 엔딩까지 작화를 마쳤다.
몇 달에 걸친 대장정.
그 결과물이 내 눈앞에 놓여있었다.
***
“진짜 고생 많았어, 우영아.”
“형도요.”
“기념으로 조만간 내가 쏠게. 엄청날 테니까 기대해도 돼.”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말투긴 하지만 그 속에는 기쁨이 묻어났다.
이유는 짐작이 갔다.
병원에 계신 할머니에게 그토록 완성된 동화책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우영이니까.
“출간되는 대로 할머니부터 찾아뵙자.”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작가님에게 원고도 보냈겠다.
작화도 끝냈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는 연두튜브에 들어갔다.
[연두의 초등학교 탐방!(feat. 새로운 음악대 결성?)]최근 올린 영상의 반응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열심히 일했으니 가져야지.
힐링의 시간.
-연두와 초등학교의 조합? 호오, 이건 귀하군요.
┖책가방 멘 연두.. 망상이 폭발한다. 지구 뿌셔! 우주 뿌셔!!
┖진짜 ㅠㅠ 상상만으로 웃음 나오네
┖급식 먹는 연두, 발표하는 연두, 청소하는 연두, 체육복 입은 연두… 대체 상상거리가 몇 개야!!!
┖귀여워서 코피 터진다, 진짜… 흡.
아니, 너무 앞서가는데?
벌써부터 연두부들이 옹기종기 모여 상상하고 있었다.
초등학생이 된 연두의 모습을.
‘없는데.’
안타깝게도 댓글에 언급된 장면은 영상에 등장하지 않았다.
허나 괜찮았다.
연두부의 표현을 빌리면 더 귀한 장면이 많이 등장하니까.
-뭐냐고! 음악실 간 연두 뭐냐고!!!
┖하, 진짜.. 연두성분 수치 더 올라가면 나 진짜 감당 안 되는데.
┖폭주해버릴 거 같다..
┖피아노 앉은 것만 보고도 심쿵했는데 연주하면서 노래까지 하면 반칙이잖아, 연두야 ㅠㅠ 언니 심장 책임져…
┖국민 딸내미 연두가 부르는 국민 여동생 유이아의 좋은 날.
┖앜ㅋㅋㅋㅋㅋㅋ 국민 딸내미 어감 미쳤네. 근데 비유 ㄹㅇ 적절하다.
나 역시 웃음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국민 딸내미라니.
하기야 600만의 연두부가 부모의 마음으로 연두를 품고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니긴 하지.
-이 새로운 뽀짝은 뭐지.. 유준이?
┖말투 귀엽네 ㅋㅋ 그런 고야! 맞는 고야! 예쁜 고야!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중간중간에 한 번씩 코 들이마시는 소리도 중독성 있음 ㅋㅋㅋ
┖ㅇㅈ ㅋㅋㅋ 킁! 킁!
┖연두의 미래 음악실 선배인 건가.. 위험한 단어인데 왜인지 이 아이는 무해할 거 같아… 맞지, 유준아?
┖공감 ㅋㅋ 그림체가 무해함.
┖뭘 모르시네. 그게 진짜 위험한 거라구욧!!(극성 연두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연두부이다.
이 밖에도 많았다.
교실 탐방에 관한 반응이라거나, 탬버린을 쥔 선동이의 급발진에 관한 반응이라거나.
“흐흐.”
아, 힐링된다.
역시 지친 마음을 달래는 데는 연두부성분만 한 게 없었다.
***
목요일 늦은 오후.
원형의 테이블을 두고 아이와 엄마가 나란히 앉아있다.
펼쳐져 있는 학습지.
벌써 공부를 시작한지도 한참이나 지났다.
째깍. 째깍.
열심히 학습지를 풀다가도 지우의 시선은 자꾸만 벽에 있는 시계를 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지우가 손꼽아 기다리던 약속의 날이었으니까.
“오늘이랑 똑같은 목요일. 목요일에 또 여기서 놀자.”
“그럼 며씨에 볼까?
“여서씨! 어리니집 끝나고..!”
새 친구들과 상의 끝에 정해진 약속 날짜와 시간.
목요일 저녁 여섯시.
하도 많이 되뇌어서 이제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게 되어버린 약속이었다.
지우는 너무 소중했다. 처음으로 사귄 친구들과의 약속이.
“어, 엄마..”
또 한 번 시계를 본 지우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
“얘기하렴.”
“오늘 약속.. 연두랑 시은이랑 레나랑 놀이터에서 같이 놀기로…”
이희영 역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정확히 일주일 전.
열심히 공부하면 또 놀러 나가도 된다고 딸과 귀갓길에 약속했으니까.
그녀는 딸을 향해 물었다.
“꼭 가야겠니?”
“으, 응?”
“우중충한 날씨라 놀기 좋을 거 같지는 않은데. 보렴.”
실제로 그리 좋지 않은 날씨였다.
허나 그녀는 몰랐다.
지우에게 중요한 건 날씨가 아닌 새 친구들과의 약속이라는 걸.
“야, 약속 지키고 싶어.. 꼭 만나서 놀기로 손가락 걸고 약속했어요…”
딸과 한 약속.
그 약속대로 한 주간 지우는 그 어떤 때보다도 열심히 공부했다.
옆에서 쭉 지켜봤기에 알 수 있었다.
‘좋지 않아.’
약속을 함부로 깨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아이의 교육상에도 좋지 않았다.
적절한 보상은 필요하다.
잠깐 놀이터에서 노는 것 정도는 충분히 허용범위 내였다.
“그래, 그럼 준비하렴.”
“지, 진짜..?”
“약속이잖니.”
벅차오르는 지우의 표정.
“엄마.. 고마워…”
“고마울 게 어딨니. 약속을 지킨 것뿐인데. 지우가 공부를 열심히 안 했으면 나가지 않았을 거야.”
“헤, 헤헤…”
평소답지 않은 딸의 들뜬 모습에 이희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드는 걱정도 있었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옷을 고르는 지우를 향해 그녀는 말했다.
“나오지 않을지도 몰라.”
“.. 으, 응?”
“그 아이들.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단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지우를 향해 이희영은 덧붙였다.
“날씨도 안 좋잖니.”
사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얄팍한 관계다.
우연히 놀이터에서 만나 잠깐 즐겁게 놀았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딸과 한 약속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들이 지킬 거란 보장은 없었다.
어쩌면 그런 약속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었을지도 모르지.
뭐, 상관없었다.
‘원래 그런 거니까.’
관계란 원래 얄팍한 법이다.
그런 별 거 아닌 것에 신경쓰는 거 자체가 시간낭비였다.
지금 하는 말도 그래서였다.
“아이들이 나오지 않았어도 상처받지 말렴. 어차피……”
괜히 지우가 그런 가벼운 약속 하나로 감정낭비를 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 거야.”
“.. 응?”
“나올 거야.. 꼭!”
확신에 찬 딸의 목소리였다.
소심한 아이라 이런 모습을 보는 건 드문데.
‘.. 난처하네.’
확신하는 만큼 생각과 다를 경우 실망도 큰 법이었다.
뭐, 방법은 없었다.
이희영은 겉옷을 걸치며 딸을 향해 말했다.
“그럼 좋겠구나.”
***
집을 나선 모녀.
놀이터는 집에서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걷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놀이터 입구에 도착했다.
‘역시..’
날씨 탓인지 놀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휑한 놀이터.
그렇다고 아이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아직이니까.’
약속시간인 여섯시까지는 아직 몇 분이 남았으니 말이다.
스윽.
손목을 당겨 시계를 보는 딸아이.
딱히 상관은 없지만, 그런 딸의 모습을 보니 오늘은 그 아이들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라도.
하지만,
째깍. 째깍.
여섯시가 다 되어서도 놀이터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숫자 6을 넘어간 분침.
그에 따라 지우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안 오는 건가.’
작게 한숨을 내뱉는 이희영.
딸을 위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기대가 없었기에 실망도 없었다.
하지만 지우의 경우는 달랐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소리없이 지우는 중얼거렸다.
“여, 연두야.. 시은아.. 레나야…”
날아갈 만큼 기뻤다.
손을 내밀어줘서, 또 함께 놀자고 얘기해줘서, 그리고 친구가 되어줘서.
그런데.. 아니었던 걸까.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꾸만 생각났다.
손을 마주잡고서 활짝 웃으며 얘기하던 연두의 모습이.
토독.
그때였다.
내려다보고 있는 바닥으로 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순간 눈물인가 하고 손을 들어 눈가를 만져봤지만 아니었다.
톡. 토독.
빗방울이었다.
이희영이 미간을 찡그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설마 올까 했는데.’
흐린 날씨였지만 예보에 비가 온다는 얘기는 없었다.
그래서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고.
낭패였다.
“지우야. 엄마 손 잡아.”
“어, 어디 가게?”
아직 미련이 남은 상태였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기다리다 보면 친구들이 올 수도 있으니까.
“그 아이들은 안 와. 비까지 오는데 오다가도 돌아가겠지.”
“그, 그래도..”
“.. 집 가려는 거 아니니까 빨리 잡으렴.”
집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빗방울이 굵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런 비를 많이 맞는 건 여러모로 아이에게 좋지 않았다.
탁! 탁!
지우의 손을 잡고 달려간 이희영은 놀이터 내 정자로 이동했다.
지금 상황에 비를 피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정자 안에 들어가고 나니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비겠지.’
예보에 없었으니 스쳐지나가는 소나기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거세게 내리던 빗방울은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직은 안 돼.’
전부 그칠 때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이희영은 옆을 바라봤다.
정자 위에 다리를 올린 채로 지우는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윤지우.”
“… 네.”
“이런 일로 힘들어하고 감정낭비하는 건 너만 손해란다. 그러니까……”
차라리 이렇게 된 이상 딸에게 얘기해줄 생각이었다.
인간관계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그런데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슥.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보니 눈에 들어왔다.
우산을 들고 있는 한 아이가.
뒤늦게 고개를 든 지우가 중얼거렸다.
“여, 연두야…”
“헤헤, 지우야…”
어디선가 나타난 시은이도 우산 밖으로 얼굴을 쏙 내밀고 말했다.
“늦었지, 지우야. 미안해..”
이희영이 간과하고 있는 게 한 가지 있었다.
그리 가볍지 않았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지우와 새끼손가락 걸고 한 약속의 무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