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411)
411화. 현실
“.. 너무 티 내지 마.”
다소 뜬금없게 들렸던 문 앞에서의 우영이의 한 마디.
문을 여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끼익.
열린 문 안으로 들어왔다.
전에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아니 많이 달라진 우영이 할머니 천재경의 겉모습이.
처음 그녀를 봤을 때가 떠오른다.
시한부라고 들은 거 치고는 정정한 모습에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조금은 안도하기도 했고.
‘알고 있으니까.’
시한부의 모습을 나는 두 눈으로 봐서 알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산책을 나가서 할머니가 내게 했던 얘기도.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속은 곪을 대로 곪았거든요.’
그 말을 믿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생각했다.
아직 그 곪은 부분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건 조금이나마 회생의 가능성이 남아있는 게 아닐까 하고.
헛된 희망이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달라진 천재경의 겉모습이 말해주고 있었다.
‘같아.’
내가 알고 있는 시한부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볼이 움푹 들어간 수척한 얼굴과 퀭한 눈, 아래로 짙게 드리운 다크서클.
불과 몇 달 사이에 모든 게 변했다.
달라지지 않은 건 하나였다.
“.. 우영이 왔니?”
인자한 미소만이 그대로였다.
손주에 이어 그녀는 우리에게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요, 주원씨. 우리 연두도 어서 오렴.”
목소리를 내는 것도 힘겨워 보인다.
울렁거리는 기분. 연두 이전에 나부터 표정관리가 안 될 거 같았다.
그때였다.
스윽.
갑자기 내 손을 놓고서 연두가 할머니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그렇게 침상 바로 앞까지 도달한 연두가 입을 뗐다.
“할머니..”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아직 어린 만큼 본의 아니게 실례가 되는 말을 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다.
우영이도 같은 생각인지 앞으로 발을 내디뎠지만 한발 늦었다.
연두가 말을 이었다.
“할머니.. 살 마니 빠저써요…”
속상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딱히 할머니의 상황이 악화됐다는 걸 인지해서 한 말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뭐냐고?
순수하게 본 그대로 얘기하는 거 같았다.
“살 마니 빠지면 안 대는데……”
씁쓸한 표정의 우영이.
막상 천재경은 가늘게 미소를 띠며 반응했다.
“왜? 살 빠지면 좋은 거 아니니?”
“아니에요!”
단호한 대답과 함께 연두는 말했다.
“연두도 진짜 살 마니 빠져썼는데.. 마싰는 거 마니 머그니까 살 쩌써요..”
어떤 의미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음식을 못 먹어서 말랐던 때에 비해 살이 붙었다는 걸 얘기하고 싶은 거겠지.
천재경은 말을 받아줬다.
“호오.. 그런데?”
“살 마니 찌는 거 시렀는데.. 아빠가 그래써요.”
“뭐라고?”
“마싰는 거 마니 먹고.. 그래야 무럭무럭 크고 건강해진다고. 그리고.. 더 예쁘대요..”
연두의 말에 천재경은 웃으며 얘기했다.
“그래서 연두가 그렇게 예쁜 거구나?”
“헤헤..”
배시시 웃으며 연두는 말했다.
“할머니도 예뻐요! 그런데..”
“그런데?”
“살 조금 찌면 더 마니 예뻐요.”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얘기라는 것쯤은.
그럼에도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고맙구나. 할머니도 맛있는 거 많이 먹어서 살쪄야겠네. 더 많이 예뻐지려면.”
“네에..”
그녀가 손을 올려 연두의 머리를 쓰다듬는 사이.
우영이가 끼어들었다.
“너나 많이 찌고 예뻐져, 땅콩.”
그 말에 연두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안 대요!”
“뭐?”
“연두는 마니 쩌써요. 뱃쌀도 이러케 나오고……”
“.. 허.”
실소를 뱉는 우영이를 향해 연두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쩌야 해요.”
“어?”
“우영이오빠는 살 쩌야 해요.”
황당해하는 우영이.
옆에서 천재경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맞장구쳤다.
“맞지. 우영이는 좀 찔 필요가 있지. 빼빼 말라서 연두보다 약할지도 몰라.”
“…?”
얼굴에 물음표가 된 채로 고개를 돌린 우영이는 발끈해서 말했다.
“뭔데 넌 고개를 끄덕이고 있냐, 땅콩?”
“.. 아!”
“아는 무슨. 설마 진짜 내가 너보다 약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말에 연두는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답한다.
“연두 조금만 크면요..”
“와.. 잠깐만.”
평소와 같은 모습이다.
세상 순수한 연두와 완전 애같이 반응하는 우영이.
여느 때라면 웃음이 번졌을 장면이지만 오늘은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얼마 뒤, 천재경은 말했다.
“그래서.. 가져왔니, 우영아?”
“뭘.”
“동화책.”
원래 진작에 가져왔어야 했다.
이유를 듣지 못했지만 지금으로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병문안도 가기 어려울 만큼 할머니의 상태가 좋지 않으셨다는 거 아닐까.
스윽.
우영이는 말없이 가방을 열어 꺼냈다.
소녀와 환상의 숲을.
그걸 본 연두는 눈이 동그래져서 입을 열었다.
“우아.. 소녀와 환상으 수피다!”
“연두는 읽어봤지?”
“네.”
무언가 떠오른 듯 연두는 다시 목소리를 냈다.
할머니의 귀에 대고.
“할머니. 이건 비미리긴 한데..”
“연두야.”
말하다 말고 돌아본 연두를 향해 나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할머니한테는 비밀 얘기 안 해도 돼.”
“왜여..?”
“우영이 할머니라 이미 알고 계시거든. 아빠랑 우영이가 그렸다는 거.”
“아!”
깨달음을 얻은 듯 연두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천재경의 무릎 위에 놓인 동화책.
가만히 표지를 보다가 그녀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다행이구나.”
“뭐가?”
“볼 수 있어서 말이야. 이 동화책을.”
의아해하는 연두의 표정.
우영이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받았다.
“그게 다행인 일인가. 당연히 보는 건데.”
“호호, 그런가?”
한 장을 넘기려다 말고 천재경은 연두를 향해 말했다.
“연두야.”
“네에.”
“할머니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래?”
연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그녀는 미소를 띠며 부탁을 이야기했다.
“이 동화책. 처음부터 끝까지 연두 목소리로 읽어줄 수 있을까?”
“연두 잘 못 읽는데..”
“괜찮아. 느려도 되고 틀려도 된단다.”
그 말에 연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럼 연두가 일거줄께요..”
“고맙구나.”
그렇게 시작됐다.
연두의 동화책 읽기가.
***
꽤나 긴 시간이 소요됐다.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책 하나를 통째로 읽기에는 미숙한 점이 많은 연두였으니까.
“그러치 아나, 주드..”
어려운 발음이 나올 때면 더듬거리기도 했고, 한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기도 했다.
그럼에도 천재경은 한 번도 답답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눈을 떼지도 않았다.
‘보고 있어.’
연두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의 그림을 빠트리지 않고 눈에 담고 있었다.
느린 속도로 페이지는 넘어갔다.
마침내 도달한 후반부.
“와아! 축제다!”
“신난다!”
“율아! 이거 좀 머거바! 달콤한 과일이 잔뜩 이써..!”
호랑이를 쫓아낸 기념으로 숲속 친구들과 함께하는 성대한 파티.
동시에 율이를 위한 파티이기도 했다.
모든 관문을 거쳐 숲을 나갈 수 있게 된 율이를 배웅하는 축제 말이다.
촤락.
축제가 끝난 뒤 나비가 날갯짓한다.
그에 따라 펼쳐지는 휘황찬란한 무지갯빛 길.
섣불리 발을 내딛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는 율이를 향해 숲속 친구들은 말한다.
“율아.”
“.. 응.”
“유리가 숲을 나가도.. 우리는 언제나 함께할 거야. 마음속에서!”
눈물을 글썽이다가 결국 율이는 발을 내딛는다.
암전되는 시야.
다시 눈을 뜬 곳은 침대,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 엄마?”
들리지 않는 목소리.
비로소 숲에서 나왔다는 걸 깨달은 율이는 좌우를 돌아본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숲속에서 언제나 함께하던 나비의 모습이.
핑.
핑 도는 눈물.
하지만 소녀는 숲속 친구들이 한 말을 떠올린다.
언제든 함께할 거라는 말.
보이지는 않지만 숲속 친구들은 마음속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악몽이라도 꾼 거니, 율아?”
들리지 않는 엄마의 물음에 소녀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대답한다.
“아니. 너무 행보칸 꿈이었어..”
“그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녀는 알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는 걸.
숲속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은 모두 현실이었다는 걸.
끼익.
환하게 웃으며 엄마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서는 율이.
아직 끝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하얀 날개를 가진 생명체가 날아오른다.
나비였다.
사락.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유유히 날갯짓해서 빠져나가는 나비.
그렇게 이야기가 끝난다.
마지막 글자를 읽은 연두가 말했다.
“끝나써요, 할머니..”
“그래.”
천재경은 옅은 미소를 띠며 얘기했다.
“아름다운 이야기구나.”
많은 게 담겨있는 표정이었다.
***
“그럼 잠깐만 걷다 올게요.”
“그래요.”
“할머니랑 잠깐 있어, 연두야.”
“네, 아빠!”
동화책을 읽은 뒤.
왠지 모를 갑갑한 마음이 들어 바람을 쐬러 병실을 나섰다.
우영이도 따라나섰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버튼 눌러, 할머니.”
“걱정 말고 갔다 오렴.”
병동에 마련된 정원.
우영이와 나는 말 없이 한 바퀴를 걸었다.
침묵을 잘 못 견디는 나지만 어색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떠오르지도 않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조심스러운 것도 있지만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원하지 않는다는 거.’
같은 입장이었기에 알고 있었다.
어떤 위로의 말도 동정의 말도 듣고 싶지 않은 상황이라는 걸.
침묵이 답이 될 때도 있는 법이다.
터벅. 터벅.
한참 더 걷고 나서야 나는 입을 뗐다.
“다행이네.”
“뭐가요?”
“우영이 너, 엄청 보여드리고 싶어했잖아. 완성된 소녀와 환상의 숲.”
“.. 그랬죠.”
위로의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다시 침묵 속에서 얼마간 걷다가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런데 우영아.”
“네.”
“저번에 같이 병문안 온 뒤로 너는 여러 번 찾아뵙지 않았어? 할머니.”
“찾아뵀죠.”
“그런데 왜……”
왜 얘기 안 했냐고 물어보려다 말을 멈췄다.
몇 번이고 우영이에게 물어본 적 있었다.
할머니 몸 상태는 좀 어떠시냐고.
‘괜찮아요.’
항상 같은 답이 돌아왔다.
조금도 작화가 밀리거나 하지 않았기에 정말 그런 거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형도 알잖아요.”
“어?”
“보여주고 싶었어요. 완성된 이야기.”
우영이는 매 순간을 버텨가며 그렸던 거다.
티 내지 않은 이유는 짐작이 갔다.
그로 인해 내가 신경 쓰거나 해서 작화가 지체되는 걸 원하지 않았던 거겠지.
“.. 미안하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펜을 잡았을 우영이의 시간을 생각하니 올라오는 감정.
동시에 미안했다.
함께 작화한 입장에서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게.
“풋.”
그런 나를 보며 우영이는 영문 모를 웃음을 터트렸다.
“왜 형이 미안해해요. 제가 말 안 한 걸.”
툭.
자연히 우리는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선 채로 우영이는 말했다.
“주원이형.”
“응.”
“항상 생각했거든요?”
“뭐를?”
“할머니는 죽지 않을 거라고요.”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할머니가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할 때마다 우영이는 코웃음을 치곤 했으니까.
완전히 헛소리라는 듯이.
그에 더해 우영이는 습관처럼 얘기하곤 했다.
‘다 나으면.’
다 나으면 뭘 하자, 다 나으면 뭘 보여주겠다.
저번에 병문안에 갔을 때는 귀에 익을 정도로 들은 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스윽.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우영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말로 표현이 불가능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우영이는 한 마디를 뱉었다.
“할머니는 죽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