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415)
415화. 의사가 될 거예요
연두가 내 무릎을 베고 잠든 사이.
나와 삼촌은 불가항력으로 정자에서 꽤나 긴 시간을 보냈다.
곤히 잠든 연두를 깨울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시간 낭비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맑은 시골 공기를 마시며 앉아있는 거 자체가 훌륭한 휴식인데.
그에 더해 삼촌과 얘기까지 나눴지 않은가.
삼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할 때는 꽤나 생산적인 대화였다.
아니, 정정한다.
삼촌의 생각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근거는 하나였다.
대화가 끝나고 나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그 표정.’
줄곧 연두가 말했던 삼촌의 그 표정을 말이다.
물론 일치하지는 않겠지.
다만, 그게 어떤 느낌이었을지 알 수 있는 표정이었다는 건 확실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생산적인 대화였다고 할 수 있었다.
‘나도 조금은 가까워진 느낌이고.’
연두는 말해줬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내 모습을, 그리고 삼촌이 모르고 있던 삼촌의 모습을.
그게 비슷하다고 느껴서일까.
삼촌과의 거리가 조금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스윽. 슥.
대화가 끝나고 꽤나 긴 시간 동안 삼촌은 잠든 연두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미소를 띠며.
시간이 지나 손을 뗀 뒤에도 시선은 줄곧 연두를 향했다.
입을 뗀 건 또 한참 뒤였다.
“주원아.”
낮은 음성으로 부르는 내 이름.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네, 삼촌.”
“.. 넌 괜찮아?”
“뭐가요?”
생각지 못한 물음이 이어졌다.
“내가 이 아이, 네 딸 연두를 진짜 가족처럼 대해도. 넌 아빠로서 괜찮겠어?”
대상은 연두인데 내게 허락을 구하는 게 재미있었다.
이걸 뿌듯해해야 하나. 나를 아빠로서 존중해준다는 거니까.
빙긋 웃으며 나는 답했다.
“연두가 괜찮다면요. 그런데……”
“.. 그런데?”
“아빠인 제가 판단하기에 연두는 괜찮은 거 같네요.”
그런 내 말에 다시 한번 김윤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물론 잘 알고 있다.
가족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는.
‘달라.’
사전적 정의와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뜻은 달랐다.
같은 핏줄이라고 해서 가족인 건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나랑 연두도 가족이라 할 수 없겠지.
‘진짜 가족의 요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만큼은 망설임 없이 얘기할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같은 편에 서 줄 수 있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가족이었다.
생각해 봤다.
김윤호가 연두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 있을지.
우선 친척들끼리 모였던 날.
삼촌은 굳이 나설 이유가 없었음에도 친척들의 반대인 우리 편에 서 줬다.
장례식장 때와는 다른 선택을 한 거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김윤호는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었다.
장례식 때도 마찬가지였다.
섣불리 말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했던 거다.
어떻게 아냐고?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삼촌이 입에 담았다. 가족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을 텐데.’
분명히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 단어의 무게에 대해.
그런데도 입 밖에 내고 허락을 구했다는 건 결코 가볍게 꺼낸 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믿어도 되겠지.’
그렇다면 믿어도 될 거란 판단이었다.
삼촌이 입에 담은 가족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
자연스레 이어지는 대화.
피식 웃으며 나는 장난스레 툭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감당되시겠어요, 삼촌?”
“뭐가?”
“저 연두 아빠잖아요. 연두랑 가족이 된다는 건 저랑도 가족이 된다는 건데. 그거까지 생각하고 하신 얘기인가 해서요.”
사실 상관없었다.
연두에게만 기댈 수 있는 가족이 되어준다면 나는 그걸로 족했으니까.
그러니 이건 그저 장난일 뿐이었다. 삼촌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거든.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들려오는 목소리.
“.. 잠깐. 그건 변수인데?”
말도 말인데 복병을 만나기라도 한 듯한 리얼한 표정에 말문이 막혔다.
이 양반.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어?
발끈한 나는 입을 열었다.
“아니, 삼촌. 그렇게 싫은 티를 내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
엘리트인 건 알겠다.
그렇다고 이렇게 사람을 대놓고 변수 취급을 하다니.
‘나도 싫었어요!’라며 세상 유치한 말이 추가로 나가려는 찰나.
“흣.”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보기 드문 소리 내어 웃는 삼촌의 모습.
불난 데 기름을 끼얹는 약 올리는 듯한 웃음은 아니었다.
‘저 웃음은..’
내가 자주 짓는 웃음이었다.
주로 연두에게 장난을 치고 나서 원하는 반응이 나올 때 짓는 웃음.
잠깐. 그런 내 모습과 겹쳐 보인다는 건 설마 삼촌이 나한테 장난을 쳤다는 건가?
“하하, 장난이야, 장난.”
정답이었다.
사람을 맛에 비유하는 게 너무하긴 하지만, 그 무미건조함의 극치인 삼촌이 장난을 친 거다.
그 사실이 상당히 놀랍게 다가왔다.
생각해 보면 전에 통화할 때도 한 번 그런 적이 있긴 했지.
귀에 들어오는 목소리.
“당연히 생각했지. 주원이 너도.”
불과 방금까지만 해도 진심으로 발끈했던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받았다.
“그렇겠죠.”
“응? 알고 있었어?”
“네. 삼촌이 어떤 사람인지 잘은 몰라도 조금은 아니까요.”
“그렇구나.”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김윤호는 말했다.
“전에 말한 거 기억나?”
“어떤 말요?”
“주원이 너는 나랑 비슷한 면이 있다고 했던 거.”
“아, 그렇게 말하고 나서 욕해서 미안하다고 했던 거요?”
“.. 너 기억력 엄청 좋구나?”
아직도 웃음이 나왔다.
본인과 닮은 거 같다고 하고 욕해서 미안하다니.
세상 독특한 자학 아닌가.
“그런데 그건 왜요?”
“미안하긴 한데 여전히 나는 그렇게 생각해. 나랑 주원이 너는 꽤 닮은 구석이 있다고.”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이제는 나도 확연히 느끼는 사실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기본적으로 삼촌과 나는 성향이 비슷했다.
나서는 걸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었고 귀찮은 걸 질색하는 타입.
김윤호는 무언가 떠올리는가 싶더니 말했다.
“그래서 그때 더 놀랐지.”
“언제요?”
“네가 연두 손잡고 소리치면서 자리 박차고 일어났을 때.”
“…”
이상했다.
아찔하기도 했지만 그 순간을 생각하며 가끔은 흐뭇한 웃음을 짓곤 했는데.
내가 봐도 멋있다는 생각에.
타인의 입으로 들으니 이렇게 오그라들 수가 없었다.
화끈거리는 얼굴.
“삼촌. 그때 얘기는 좀..”
“하하, 미안. 그런데 오해하지 마. 나는 그때 주원이 네가 진심으로 멋있다고 생각했거든.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선택을 한 게.”
작게 목소리가 이어졌다.
“……누나도 떠올랐고.”
“네?”
“하연이 누나.”
순간 멈칫했으나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게 익숙한 하연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바로 우리 엄마였다.
“엄마 말하는 거죠?”
내게는 엄마지만 삼촌에게는 친누나였다.
전해 듣기로는 삼촌이 가족 중에 유일하게 무척 가깝게 지냈다고 들었고.
역시나 고개를 끄덕이며 김윤호는 말했다.
“그래. 너도 들어서 알겠지만 나랑은 완전히 정반대의 사람이었지.”
“.. 어떻게요?”
“그런 타입 있잖아. 세상 착해가지고 오지랖은 태평양처럼 넓은 타입. 옆에 있으면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어. 옆에서 쉬지도 않고 쫑알쫑알……”
예상과 달리 한참이나 누나의 디스를 쏟아낸 뒤 김윤호는 말했다.
“그래서.. 아직까지 그립지.”
굳이 그립다고 하지 않았어도 표정을 통해 전해졌다.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도 알 거 같았다.
김윤호는 나를 보며 말했다.
“다행이네.”
“뭐가요?”
“누나를 닮은 아이를 만나서.”
누군지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잠든 연두에게 시선을 두고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엄마랑 차이가 있긴 하네요.”
“어떤 차이?”
개미만 한 목소리로 나는 말했다.
“하나도 안 귀찮거든요, 우리 연두는.”
애꿎은 엄마 1패였다.
뭐, 비교 대상이 아들의 딸이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시겠지.
얼마나 지났을까.
톡.
조금 뒤척이는가 싶더니 눈을 팟 하고 뜬 연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진짜 과학이네.
시계를 보니 정확히 한 시간가량이 흘러 있었다.
“.. 아빠!”
비몽사몽한 아침과 달리 낮잠을 잘 때면 연두는 이렇게 세상 개운한 표정으로 일어나곤 했다.
나를 거쳐서 삼촌을 향하는 연두의 시선.
입을 떼기도 전에 삼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어났니, 연두야?”
“..!”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연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가족이라는 게 느껴지는 물음이었으니까.
***
“염병. 약수를 만들어서 타 와?”
늦게 돌아온 우리를 향해 타박하는 할머니.
꿀잠을 잔 연두는 찔리는지 내 뒤로 슬그머니 몸을 숨겼다.
그 모습을 보며 김윤호가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 엄마.”
“뭐?”
“좋은 시간이었어.”
벌써부터 가족 된 거 티 내네, 이 양반.
대놓고 편을 들어준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딱히 서운함을 드러내거나 하지 않았다.
“흥.”
외마디 음성과 함께 고개를 홱 돌리긴 했지만.
약수를 집 안에 두고 나서 입을 열었다.
“할머니.”
“뭐.”
“여기서 선동이 집은 얼마나 걸려요?”
“그 뺀질이 집은 왜.”
“선동이한테도 줘야 하거든요. 우선 여기 할머니부터 받으세요.”
동화책을 꺼내 할머니에게 건넸다.
혹시 몰라 여러 권을 챙겨왔기에 아직 여유분은 충분했다.
옆에서 삼촌이 말했다.
“기대해도 돼, 엄마.”
“뭐?”
“진짜 재밌더라고. 주원이가 그린 그림도 예쁘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삼촌은 선물 받은 동화책을 손에 쥐고서 말했다.
“나는 먼저 연두한테 선물로 받았거든. 이거 읽느라 늦은 거야.”
“.. 어쭈?”
평소 패턴대로라면 나올 말은 뻔했다.
“할미는 뒷전이라 이거지?”
“에이, 할머니.”
결국 그럴 듯하게 둘러대는 데에 꽤나 긴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그 뒤에 알아낸 선동이의 집 주소.
여기서 불과 십 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가자, 연두야.”
“네, 아빠!”
꿀잠을 잔 뒤라서인지 활기찬 대답.
집을 나서려다가 조금 걱정이 된 나는 할머니를 향해 물었다.
“근데 말없이 가도 될까요?”
“뭐?”
“연락이라도 하고 가야 되는 거 아닌가 해서요.”
“연락은 무슨.”
답답하다는 듯 할머니가 빽 소리쳤다.
“할미가 말해줄 테니까 빨리 갔다 오기나 해. 쫑알대지 말고.”
“.. 쫑알.”
“이놈의 새끼가!”
“도망가!”
“꺄아..!”
냅다 연두의 손을 잡고 뛰었다.
집을 벗어나서도 멈추지 않고 할머니가 알려준 길을 따라 쭉 달려갔다.
채 1분을 못 가서 방전되긴 했지만.
“헉. 헉.”
“힘드러요, 아빠..”
“우리 운동해야겠다. 그치, 연두야.”
“네에.”
함께 운동하기로 다짐하며 얼마간 길을 따라 쭉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하는 집.
마당의 풍경을 보니 선동이의 집이 틀림없었다.
‘꿈에도 모르겠지.’
우리가 올 거라는 걸 선동이는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있을 터였다.
할머니가 연락해 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실제로 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두 번은 속지 않는다.
삼촌한테도 말 한마디 안 하신 걸 보라.
결과적으로 삼촌을 만난 건 다행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스윽.
민폐가 될 수 있으니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느껴지는 인기척.
안에 누군가 있는 건 확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한 사람.
“.. 어머!”
선동이 어머니였다.
놀라는 그녀를 향해 나는 곧바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동이 어머님.”
“안녕하세여..!”
뒤따라 인사하는 연두.
다행히 선동이 어머니는 반갑게 인사를 받아줬다.
그 뒤에 목청 높여 불렀다.
“얘! 선동아, 나와봐! 빨리! 손님 오셨어!”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실루엣도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를 긁적이며 등장하는 감자소년.
“왜 그러는데. 누구……”
귀찮음 가득한 눈은 우리를 보자마자 태평양처럼 확장됐다.
정확히는 연두를 보자마자.
“뭐, 뭐야!”
얼마나 놀랐는지 콧구멍까지 벌렁거린다.
다소 빠르게 이루어진 재회.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나는 말했다.
“선동아.”
“네, 아저씨.”
“아버지는 집에 계셔? 인사드리려고 하는데.”
선동이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서울에 가면 코를 떼어간다는 뻥으로 선동이가 코를 부여잡고 있게 만들었던 짓궂은 아버님.
집까지 찾아온 만큼 인사를 드릴 생각이었다.
“아, 잠깐만요.”
그렇게 말하고서 선동이는 집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열린 문틈으로 들려오는 음성.
“아빠!”
“그래, 아들아.”
“나와 봐. 손님 왔어.”
“오호라. 아빠가 나가 봐야 할 손님이더냐.”
“아, 빨리!”
뭔가 언뜻 듣기에는 포스가 느껴지는 말투다.
선동이는 다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연두랑 아저씨 왔다고! 아빠한테 인사하고 싶대!”
“.. 연두가?”
“응!”
“흐하하, 그럼 아빠가 나가봐야지. 우리 아들 신붓감이 왔다는데.”
“아악! 뭐라는 거야!”
허물없는 부자의 대화.
보기 좋은 것과 별개로 상당히 거슬리는 단어가 있었다.
신붓감이라니.
‘용납 못 하지.’
아빠 대 아빠로서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는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코앞인 거 같은데.’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코앞이 분명한데 생각보다 나오는 게 너무 늦었다.
여유로운 성격이신가?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버님은 선동이를 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소.”
“안녕하세요, 선동이 아버..님.”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아버님의 모습.
동시에 선동이가 시골에 돌아가던 날, 마지막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꿈을 묻는 질문에 선동이가 했던 대답이.
“의사. 의사가 될 거예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동이가 그렇게 답했던 이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