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423)
423화. 성지
이미 충분히 놀란 상태였다.
앳된 외모만 보면 ‘포롱포롱 포로로’나 ‘아기공룡 달리’나 칠 법한 아이들이 연이어 수준 높은 연주를 선보였으니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초등학생 시절 이은경의 모습은 정말이지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라락.
건반 위를 현란하게 춤추는 손가락.
앞선 참가자들의 정직했던 몸놀림과 달리 음에 따라 화면 속 아이의 어깨는 강하게 들썩였다.
그런데도 소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곡의 제목인 겨울바람처럼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는 기분이다.
‘알 거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화면 속 분위기가 어땠을지 알 거 같았다.
그래. 이건 생태계 파괴다.
그나마 연주의 차례가 후순위긴 게 배려라 느껴졌다.
만약 이게 첫 무대였다면 남은 참가자의 절반 이상은 연주를 포기했을지도 모르니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속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이 연주를 본다면 누구라도 알아봤을 거다.
될성부른 나무였다는 걸.
그 나무가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대상을 거머쥘 거라고는 차마 생각지 못했을 테지만.
결이 다르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
입이 벌어진 채로 화면을 바라보는 연두.
이걸 어쩐다.
연주에 감탄하면서도 떨고 있는 게 보인다.
그럴 만도 한 게 연두에게 이걸 주기 전에 ‘아름다운 경쟁’에 대해 얘기해줬다고 들었다.
‘대단한 연주긴 하지만.’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이들의 콩쿠르에 부적절한 표현이긴 하지만, 사실상 이건 경쟁이라고 보기도 뭐한 일방적인 폭행이니까.
넋 놓고 연주를 듣던 나는 걱정이 됐다.
오히려 연두가 이 영상을 보고 더 충격을 받아 이렇게 얘기하지는 않을까 하고.
‘여, 연두 시러요. 아름다운 경쟁……’
7등을 한 얘기까지 하며 경쟁에 대한 연두의 인식을 간신히 돌려놨는데.
하아. 큰일이네.
이게 소위 말하는 천재의 왜곡된 기억이라는 건가.
그래도 영상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아무리 내가 음알못이라고는 해도 이런 연주를 중간에 끊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끝까지 이은경은 완벽하게 무대를 마쳤다.
“후우..”
그러고 나서야 나는 스페이스바를 눌러 영상을 멈췄다.
연두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 말 없이 벙찐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데, 그 상황이 우스워 그만 실소가 나왔다.
잠깐 인터넷을 켜서 검색해 봤다.
[쇼팽, 겨울바람]간소화한 검색.
곡에 대한 정보가 몇 줄로 짤막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겨울바람은 쇼팽 에뛰드를 통틀어 가장 난도가 높다고 평가받는 에뛰드이다. 음형은 물론이고 왼손을 살리며 연주하는 게 무척 어렵다.
그럼 그렇지.
예사 곡이 아니라는 건 귀가 있으니 감이 왔다.
쇼팽 에뛰드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중에 가장 난도가 높다고 하면 엄청난 거겠지.
일단 쇼팽이 대단한 음악가잖아.
미술 분야로 치면 고흐랑 비빌 수 있는 사람 아닌가?
음알못인 나로서는 이 정도의 비유를 든 감상이 최선이었다.
이어지는 한 가지 고민.
‘.. 봐야 하나?’
아직 시간이 남은 영상이었다.
높은 확률로 보기 고통스러운 장면이 펼쳐질 거 같은데.
아무리 멘탈이 세다고 해도 이 연주를 직관하고 무대에 설 수는 없을 테니.
연두의 정서를 위해 여기까지 볼까 생각하다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숙제잖아.’
동영상 시청. 이것도 엄연한 숙제였다.
피아노 연습 외에 처음으로 이은경이 연두에게 내준 숙제.
생각해 보면 그랬다.
아무런 의도도 없이 어릴 적 자신의 피아노 실력을 뽐내려고 이런 숙제를 내준 걸까?
아까 말했듯 천재의 왜곡된 기억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은경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세계 최정상에 올랐는데도 늘 겸손함을 보이는 그녀였으니까.
그래.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이미 충분히 잔인한 장면을 봤고 더 충격받을 것도 없었다.
뒤에 나오는 아이가 무대에 올라 오열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제발 울지만 말아주라.
그런 생각과 함께 한쪽 손은 키보드에, 다른 한쪽 손은 연두의 어깨에 가볍게 내려놨다.
“.. 괜찮은 거지, 연두야?”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는 스페이스바를 눌렀다.
다시 영상이 재생됐다.
이은경이 무대에서 내려가고 올라오는 건 역시 앳된 외모의 여자아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정면을 바라보며 인사하는 아이의 표정이.
‘웃고 있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앞선 무대를 보고 실성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사를 마치고 피아노 앞에 앉아 손수건 비슷한 걸 꺼내는 아이.
슥. 슥.
익숙한 손놀림이다.
전혀 서두르지 않고 건반을 닦는 모습에서는 여유가 느껴진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앞선 이은경의 무대를 봤을 텐데.
‘멘탈 하나만큼은 최정상이네.’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연주가 시작됐다.
동시에 눈앞에 펼쳐졌다.
아까보다 더 충격적인 장면이.
***
달랐다.
앞선 이은경의 연주와는 곡의 분위기와 속도, 연주자의 몸짓까지 모든 게 달랐다.
더 쉬운 연주였다.
격정적으로 전환되지도 않고 음에 따라 어깨가 요동치지도 않았다.
이은경의 연주가 거센 겨울바람 같았다면, 이번 참가자의 연주는 산뜻한 나비의 날갯짓 같았다.
‘왜지.’
그래서인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렇게 좋은 거지.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이 음을 낼 때마다, 그 서로 다른 음들이 심장을 톡톡 건드는 거 같았다.
날갯짓을 하듯이 아주 가볍게 말이다.
간질거리는데도 긁을 수 없어 답답한 마음이 드는, 그런 음의 향연이었다.
따라란. 딴. 따란.
딱히 연주를 감상하는 취미는 없었다.
나 역시 처음이었다.
연두와 함께 이은경의 콩쿠르 우승곡을 유투브를 통해 감상했던 게.
‘처음부터 끝판왕을 본 셈이지.’
감탄을 자아내는 연주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허나 몰랐다.
초등학생의 연주를 보며 이런 느낌을 받게 될 거라고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라 그런지, 더더욱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만약 내가 심사위원이었다면 누구의 손을 들어줬을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전문지식을 모르는 내게 있어서 판단 기준은 단 하나, 직관이었다.
그 직관이 가리키고 있었다.
Wilhelm lege – Op. 59 No. 2 Butterflies
뒤늦게 떠오른 곡의 제목.
곡의 제목을 확인하고는 강하게 한 번 더 소름이 돋았다.
버터플라이. 나비였다.
처음 들어보는 곡을 들으며 나비의 날갯짓 같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확인한 곡의 제목이 나비였다면.
기분이 어떨지 상상이 가는가?
“연두야.”
연주가 끝난 뒤.
내 부름에 연두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빛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만약 연두가 심사위원이었다면 말이야. 선생님 연주랑 방금 들은 연주 중에 뭐에 더 높은 점수를 줬을 거 같아?”
“연두가.. 심사위원이면요..?”
“응.”
방금 들은 연주가 좋았는지 같은 시시한 질문은 굳이 할 것도 없었다.
단지 궁금할 뿐이었다.
연두도 나랑 비슷하게 느꼈을지.
들려오지 않는 대답.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질문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게 아니라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하는 거라는 걸.
차마 말할 수 없는 거겠지.
선생님의 연주가 더 별로였다고.
“괜찮아, 연두야. 대답하지 않아도 돼.”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무대는 끝이었다.
잠깐 흑백 화면이 되고, 이어붙인 듯 장면이 전환됐다.
수상 발표를 하는 거 같았다.
‘.. 과연.’
이름 모를 고수 소녀의 연주가 더 좋다고 평하긴 했지만 그건 내 주관에 불과했다.
심사위원의 감상은 다를지도 몰랐다.
미술에서도 그렇듯, 더 어려운 곡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가산점이 붙을 수도 있을 테고.
…… 그렇게 생각했지만,
척.
금색 트로피는 마지막 차례에 연주한 아이에게 주어졌다.
이제야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은 성인이겠지만 은주아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였다.
‘있었구나.’
이은경에게도 있었던 거다.
패배의 기억이.
그 장면을 담고 있는 동영상이 연두의 숙제였다.
“선생님…”
떨리는 목소리로 연두가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완패였다면 모를까, 완벽한 연주를 선보이고 패한 거니까.
그때였다.
화면 속에 이은경의 모습이 비쳤다.
손에는 은색 트로피를, 시선은 금색 트로피를 든 은주아를 향하고 있었다.
화면을 보며 벌어지는 연두의 입.
“아, 아빠..”
“.. 응.”
“웃고 이써요. 선생님, 웃고 이써요..!”
그 말대로였다.
화면 속 이은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미묘한 기분.
이윽고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은 경쟁…”
그렇게 중얼거리는 연두 역시 웃음 짓고 있었다.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
영상을 시청한 뒤.
연두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거 같았다.
“진짜진짜 예뻐써요..”
“뭐가?”
“선생님 웃는 거…”
그러더니 배시시 웃으며 중얼거렸다.
“보고 싶따…”
“응?”
“아빠도 해쓰니까. 아름다은 경쟁…”
바로 이해가 갔다.
아름다운 경쟁을 했을 당시에 내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거겠지.
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말했다.
“아빠는 연두 선생님처럼 예쁘게 웃지 않았는데?”
“으응? 아!”
무언가 깨달은 듯 덧붙이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
“아빠는 멋찌게 웃어써요..!”
“푸흣.”
애써 웃음을 지우고서 말했다.
“그것도 아니야.”
“그럼요?”
“아빠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웃었거든. 아빠가 7등을 했다고 했잖아.”
바로 중이병 연기에 들어갔다.
“지금 마음껏 기뻐해, 형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1등을 차지하고 형들은 전부 내 아래에 있을 거니까. 흐흐흐.”
“…”
쓰읍. 연기가 너무 과했나.
나를 바라보며 연두가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난다.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
“연두야. 장난이야, 장난.”
“장난이여..?”
“그래.”
토독. 톡.
다시 두 발자국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때 튀어나오는 녀석.
숨어있다가도 한 번씩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는 누렁이였다.
“냐아!”
“.. 누렁아!”
바로 쪼그려 앉아 연두는 누렁이를 품에 안았다.
무언가 궁금증이 떠오른 듯.
“아빠.”
“응?”
“누렁이는 왜 안 우서요..?”
오랜만에 나온 답이 어려운 질문.
그러게. 왜 안 웃지.
안 웃는 게 아니라 웃을 수 없게 설계된 거 아닌가.
‘그렇잖아.’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동물들이 그랬다.
웃는 동물이 있나?
코끼리, 기린, 강아지, 코뿔소, 도마뱀, 나무늘보…. 다 안 웃는 거 같은데.
그렇게 혼자 쓰잘데기없는 진지한 생각에 빠진 사이.
“누렁아..”
“냐아~”
“언니 보고 우서조.. 응? 한 번만……”
연두는 누렁이에게 웃음을 애원하고 있다.
그걸 보며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찍었어야 하는데.
‘이걸 놓치다니.’
카메라를 방에 둔 나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귀여운 장면이었다.
어쩔 수 없지. 눈에라도 확실히 담아두기로 하자.
연두의 애교는 멈추지 않았다.
“푸흣.”
미치겠네.
일부러 손을 사용해서 잔뜩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만들어 누렁이에게 들이대는 연두.
저러면 웃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으헤..”
바보 같은 웃음소리도 낸다.
그나저나 누렁이 이 녀석은 진짜 피도 눈물도 없구나.
이 정도면 웃지는 못하더라도 이빨이라도 보여줄 만한데, 그러기는커녕 연두의 무릎 위에 누워 졸리다는 듯 눈을 끔뻑인다.
어떻게 코앞에서 연두의 애교를 직관하면서도 저럴 수 있지.
한편 머릿속에 드는 생각.
안 되겠다. 지금이라도 카메라를 들고 와 이 모습을 담아야 할 거 같았다.
조용히 나는 자리를 벗어나 카메라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눈에 바로 들어왔다.
스윽.
카메라를 들고 바로 나가려는데.
드르륵.
책상 위에 함께 놓아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무시하고 나가려 했으나 한 번 더 울리는 진동.
‘.. 아오.’
한 시가 급한 상황인데.
확인했는데 별 거 아니면 가만 두지 않을 테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하는 쫄보의 생각일 뿐이었다.
스윽.
결국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
동시에 눈이 확장됐다.
여기저기서 온 수십통의 부재중 전화와 수백개의 문자 메시지.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게 대체 몇 개야.’
얼마 전 설치한 카페 어플.
평소에는 거의 뜨지도 않던 카페 알림이 미친듯이 떠올라 있었다.
뭔지 몰라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 확실해보였다.
툭.
무의식적으로 알림을 클릭했다.
그러자 화면에 떠오른 건 다름아닌 내가 가입한 육아 카페 중 하나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작성한 가입인사 글.
-환영해요! 애기 이름이 너무 예쁘네요 ㅎㅎ 요즘 완전 대세 이름!
-푸핫!(이모티콘) 세연엄마 진짜 웃겨요. 대세 이름이라니 ㅎㅎㅎ
-맞긴 하네용~ 대세 이름 ㅎㅎ
-저 요즘 엄청 보잖아요. 심지어 우리 아들이랑 같이 본다구요. 우리 글쓴이님 이쁜이는 남자아이인가요, 여자아이인가요?(남자아이면 반전…)
이런 댓글이 달렸던 가입인사 글이었다.
답글도 달았었지.
-반전 없이 예쁜 딸입니다 ㅎㅎ
그게 이 게시물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지금.
정신이 아득해지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성지순례 왔습니다..
-하는 일 모두 잘 되게 해 주시고, 이번 시험 만점 맞게 해 주세요.
-부모님 건강하게 해 주세요.
-썸녀랑 잘 되게 해 주세요… 아멘.
내가 쓴 가입인사 글이 성지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