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435)
435화. 해피엔딩?
“.. 선생님?”
그리 특별한 호칭이 아니었다.
꼭 학교가 아니더라도 때에 따라 어디서든 나올 수 있는 단어였으니까.
단, 그 대상이 이은경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진짜 조아써요, 선생님.’
눈앞에 서 있는 연두라는 여자애는 그렇게 말했다.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동경하는 피아니스트 이은경을 향해.
어떤 분야인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피아노.
피아노가 틀림없었다.
아까 옆에 앉아서 콩쿠르를 감상할 때 무릎 위에서 움직이는 손을 보고 눈치챘으니까.
피아노를 치는 아이라는 걸.
당시로서는 딱 그 정도의 생각이었다.
의외라는 생각이 들어 호기심이 들긴 했으나 별다른 감흥이 들지는 않았다.
또래 중에 피아노를 치는 아이는 차고 넘쳤으니까.
그래. 차고 넘쳤다.
유리의 주변에 어설프게 피아노를 치는 애들은 넘치도록 많았다.
연두도 그런 애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좋은 연주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건 확인했으나 그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 정도의 안목은 피아노를 치지 않더라도 가질 수 있는 영역이었다.
눈앞의 아저씨만 봐도 그랬다.
음악가 리스트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좋은 연주를 가려냈으니까.
‘리스트 헝가리 랩소디 8번.’
자신과 이은경님이 1위로 꼽은 곡.
그 곡을 1위로 꼽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꼭 피아노를 잘 치지 않더라도 좋은 연주를 판별하는 건 가능하다는 사실을.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 응?”
유리가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던 연두에 대한 이미지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이쁘장하게 생겨서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웃는 애, 짜증 나는 레나의 친구, 의외로 피아노를 치는 애.
그게 연두에 대해 갖고 있던 유리의 인식이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선생님.
그 호칭을 듣는 순간에 그런 쓸데없는 감상은 전부 사라졌다.
물론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애가 어느 정도의 피아노 실력을 갖고 있는지는.
그럼에도 주위의 피아노를 치는 수많은 또래 애들과 다르게 보기에는 충분했다.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이은경.
그녀를 선생님이라 부른다는 것 하나만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특별함이 생기는 거니까.
복잡한 마음.
애써 유리는 그 심정을 감추며 재차 태연하게 물었다.
“왜 선생님이라고 불러?”
너무 섣불리 확신한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이은경님이 피아니스트라도 꼭 가르쳐주는 게 피아노란 법은 없으니까.
그래, 독일어.
레나가 잘난 듯이 구사하는 독일어를 배우는 걸지도 모른다.
뭐든 상관없었다.
피아노만 아니라면 전부 웃어넘기지는 못하더라도 납득할 자신이 있었다.
허나 유리의 그런 바람은 바로 무너졌다.
“연두 선생니미야. 피아노 선생님…”
“…”
또 웃는다.
그 웃음이 유리의 눈에는 꼭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불쾌한 감정이 마구 올라왔다.
‘.. 네가 뭔데.’
이은경님과 선생님.
호칭만 해도 거리감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느껴졌다.
대체 왜?
오래전부터 동경한 건 나인데, 넌 뭐가 그렇게 잘났길래 나도 못 부르는 호칭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건데?
울컥 차오르는 감정과 함께 유리는 한 마디를 입 밖에 뱉었다.
“너.. 피아노 잘 쳐?”
***
“너.. 피아노 잘 쳐?”
아까 한 질문이었다.
시상식이 시작하는 탓에 대답을 듣지 못하고 넘어갔지.
동일한 물음이었으나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에, 연두는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답했다.
“아니..”
“.. 못 친다고?”
“응. 그래서 열씨미 연습하고 이써…”
어이가 없었다.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한테 배우면서 못 친다고? 겸손이라도 떨고 싶은 건가?
자연히 감정이 섞인 한 마디가 나갔다.
“너.. 누구한테 배우는 건지는 알고 있는 거야?”
“응, 아라! 선생님한테……”
“아니! 그러니까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한 피아니스트인지 알고 있냐고 물어보는 거야!”
답답함에 올라가는 음성.
깜짝 놀란 연두의 얼굴과 놀란 어른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 들려온 건 레나의 목소리였다.
“야, 미뉴리!”
“.. 뭐?”
“연두한테 짜증 내지 마!”
그렇게 소리친 레나는 빠른 속도로 뭐라 말을 내뱉었다.
“연두는 피아노 마니 안 쳤서! 그리고 잘 치고 레나랑 환상의 짝꿍이거든? 연두는 마니 치면 미뉴리 너보다도……!”
발음도 부정확한 데다가 중구난방해서 뭐라 말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사실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만날 때마다 다투기는 했어도, 레나는 이렇게 흥분해서 말하는 타입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만 두 번을 목격했다.
아까 아저씨 인사를 무시했을 때, 그리고 지금.
유리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흥.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그러자 레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빽 소리쳤다.
“그래! 나 한국말 모태!”
그리고선 외계어를 쏟아낸다.
한국말이 답답할 때면 모국어가 나오는 레나의 버릇이었다.
이번에는 유리가 빽 소리쳤다.
“너만 알아듣는 독일어 하지 말라고!”
뭔가 심각하면서도 우스운 장면이다.
그 상황을 중재한 건 이 사건의 원인이라 볼 수 있는 이은경이었다.
“그만, 얘들아.”
그렇게 말하고서 이은경은 유리를 향해 말했다.
“유리야. 레나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거 같아.”
“.. 어떤 말이요?”
“연두는 피아노를 친 지 얼마 안 됐다고. 그런데도 잘 치고 자기랑 환상의 짝꿍이라고.”
“환상의.. 짝꿍이요?”
“응, 레나는 바이올린을 켜잖니. 그래서 예전부터 늘 피아노를 치는 환상의 짝꿍을 갖고 싶어 했거든.”
일부러 이은경은 뒷얘기는 하지 않았다.
좀 더 연습하면 너보다도 잘 칠 거라는 등의 얘기는 괜히 분란만 조장할 수 있었으니까.
레나도 흥분해서 뱉은 말로 보이고.
‘이상하네.’
엄마인 그녀가 보기에도 오늘따라 유독 다혈질이 된 레나였다.
지금도 씩씩거리고 있는 걸 보면.
한편 유리 역시 이은경의 말을 들었음에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환상의 짝꿍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건 누가 되든간에 아무래도 좋았다.
‘생각 없으니까.’
레나랑 짝꿍이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다만, 피아노를 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 레나 때문이 틀림없다.
레나의 친구가 아니라면 이은경이 피아노 초보를 가르칠 리가 없으니까.
그때 이어지는 이은경의 말.
“고마워, 유리야.”
“.. 네?”
“대단한 피아니스트라고 말해줘서. 그런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연두는 피아노를 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있거든.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그렇지, 연두야?”
그 말에 연두는 자그맣게 대답한다.
“.. 네에.”
은주아도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 유리야. 같이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건데 친하게 지내야지. 예전에 엄마랑 은경이처럼.”
유리는 알고 있었다.
둘은 라이벌이었지만 끝내 이긴 건 엄마가 아니었다는 걸.
그리고 생각했다. 절대 엄마처럼 지는 쪽이 되지 않을 거라고.
‘아니야.’
라이벌도 아니었다.
단지 동경하는 피아니스트의 제자라고 해서 라이벌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 저도 열심히 연습했어요.”
“응?”
“마지막으로 만나고 저도 열심히 연습했어요. 실력도 엄청 많이 늘었고요.”
“그랬구나. 대견하네, 유리.”
미소를 띠는 이은경을 향해 유리는 말했다.
“보여주고 싶어요.”
말 그대로였다. 유리는 보여주고 싶었다.
눈앞의 애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가치가 높다는 걸.
피아니스트의 모습에 가깝다는 걸 말이다.
“여기에서요.”
마침 이곳은 콩쿨장이었다.
***
상황이 묘하게 흘러갔다.
내 느낌이 맞다면 유리는 연두가 이은경의 제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 같았다.
아니, 100% 그랬다.
‘모를 수가 없지.’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든 느꼈을 것이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오직 연두만이 이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해는 가.’
어느 정도는 유리의 마음이 이해는 갔다.
아직 어리기도 하고, 피아니스트로서 이은경을 동경하는 건 몇 번이고 느꼈으니 말이다.
좀 전에 유리가 연두를 향해 뱉은 말.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한 피아니스트인지 알고 있냐고 물어보는 거야!’
확실히 그 말이 조금은 맞을지 몰랐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가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는지 연두는 잘 알지 못했으니까.
피아노에 대한 기본 상식도 비교적 부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콩쿠르 우승의 무게감은 모를지라도, 연두는 이은경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서 세상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선생님처럼 멋진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그 말이 증명했다. 이상적인 피아니스트의 모습을 연두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걸.
이어지는 유리의 말.
‘여기에서요.’
유리는 이 자리에서 이은경에게 그간의 변화를 보여주고 싶어 했다.
성장한 모습을.
그건 전혀 나쁜 게 아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콩쿨장 내 관객들을 바라보며 이은경은 말했다.
“주아야.”
“응.”
“관객분들 다 나가고 여기 잠깐만 써도 될까?”
환해지는 유리의 얼굴.
은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뭐, 상관없지. 내가 주최자니까.”
“그래.”
“봐주려고? 유리 연주?”
“응, 들어보고 싶어서.”
나를 향해서도 이은경은 양해를 구했다.
“괜찮으면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일정이 있으면 먼저 돌아가셔도 되고요.”
“아.”
대답하려는 찰나.
연두가 내 옷깃을 잡고서 자그맣게 속삭였다.
“듣고 시퍼요..”
“응?”
“유리 피아노. 들어보고 시퍼요..”
솔직히 조금 망설여진 건 사실이다.
실력 차이는 당연히 존재할 텐데, 그로 인해 연두가 기가 죽지는 않을까 걱정됐으니까.
허나 연두가 듣고 싶어 한다면 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시은이도 괜찮아?”
“.. 네.”
그리 내키지는 않는 표정이지만 어쨌거나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와중에 레나는 대놓고 중얼거린다.
“치, 나는 별로 듣기 시른데..”
발끈한 유리가 말한다.
“그럼 너는 듣지 마!”
“시러. 들을 거야.”
“듣기 싫다며!”
또 투닥이다가 유리가 고개를 홱 돌리며 얘기했다.
“나도 듣기 싫거든? 너 바이올린 켜는 거.”
눈도 깜빡 안 하고 레나는 대답한다.
“너한테 안 들려줘.”
“내가 안 듣는 거야!”
“듣고 싶다고 해도 너 앞에서는 안 할 거야.”
“악! 그러니까 내가……”
결국 이번에는 은주아가 중재에 나섰다.
이건 뭐 동건이와 주연이를 가뿐히 뛰어넘는 심화 버전이다.
케미라 하기에는 너무 앙숙이고.
“한 번 더 싸우기만 해. 유리도 레나도.”
따끔한 한마디가 떨어지고 나서야 두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관객이 전부 나가고 텅 빈 콩쿨장 내부.
“그럼 쳐 볼래?”
유리는 망설임 없이 무대로 올라갔다.
그 모습에서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게 비슷한 경험이 있어 보인다.
하기야 유치부도 콩쿠르가 있다고 들었으니, 딱히 그렇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스윽.
피아노 앞에 앉은 유리.
한차례 숨을 들이쉰 후에 곧바로 연주를 시작한다.
딴. 따란. 딴.
“..!”
처음 몇 음을 듣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이게 뭐지.
도입부를 듣자마자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피아노 맞아?’
내가 아는 피아노 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톡톡 튀고 아름다운 음색의 서주였다.
충격적이었다.
이런 걸 고작 여섯 살 여자아이가 연주하고 있다는 게.
옆을 돌아보니 연두는 물론이고 시은이마저 입이 살짝 벌어져 있다.
‘괜히 평가한 건 아니구나.’
그게 옳다는 건 아니지만, 괜히 언니오빠들의 연주에 합격 불합격을 매긴 게 아니었다.
이어지는 연주.
어떤 곡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곡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랬다.
기교의 집합체.
사실 기교는 과하면 독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노래만 생각해봐도 그랬다.
적절한 기교는 듣는 맛을 더하지만, 과할 경우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일 텐데.’
피아노도 그럴 터였다.
실제로 유리가 연주하는 곡은 그야말로 기교로 점철된 음악이었다.
그렇다면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일반적일 텐데,
‘신기해.’
음 하나하나가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어느 하나도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 듣는 즐거움을 더하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과장이 아니라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없을 거 같았다.
오늘 콩쿠르에서 전체 대상을 차지한 여학생의 연주와 비교해도.
“레나야.”
문득 궁금해졌다.
이 곡의 이름이 무엇일지.
바이올린을 치는 만큼, 레나는 알고 있을 거 같았다.
“혹시 이 음악 이름이 뭔지 알아?”
역시나 고개를 끄덕인다.
“Chopin’s prächtige Variante.”
“…”
또 독일어가 튀어나왔다는 게 문제지만.
다행히 옆에서 은주아가 웃으며 해석해줬다.
“쇼팽 화려한 변주곡이에요. 12번째 작품이고요.”
“아, 감사합니다.”
화려한 변주곡.
정말이지 요즘 말로 닉값을 제대로 하는 곡이다.
거장이라는 거 외에 쇼팽에 대해 전혀 모르긴 하지만, 그 이름값에 걸맞은 대단한 음악가였다는 거 하나만큼은 이제 확실히 알 거 같다.
유리는 마지막까지 훌륭하게 연주를 끝마쳤다.
짝. 짝.
옆에서 들려오는 박수소리.
연두가 무대를 보며 힘껏 박수를 치고 있었다.
연주를 들으며 기가 죽지 않을까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잘 들었어, 연두야?”
“네에.”
벅차오르는 표정으로 연두는 말했다.
“진짜 조아써요.. 예쁜 연주여써요…”
“하하, 그래.”
스스로도 만족스러웠는지 유리는 가벼운 표정과 발걸음으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뭐, 그럴 만한 연주긴 했지.
이은경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정말 많이 늘었네.”
입가에 환히 번지는 웃음.
끝내지 않고 이은경은 말을 이었다.
“서주 부분의 아름다움도 그렇고 쇼팽 특유의 서정성도 잘 드러난 연주였어.”
“헤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유리는 음악 지능이 뛰어나구나. 음악적으로 살려야 할 부분을 잘 알고 연주하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 감사합니다.”
100% 이해는 안 가지만 칭찬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연두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 모습을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짓는 유리를 보니, 어쩌면 해피엔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톡.
유리가 엄마를 지나서 나와 연두의 앞으로 걸어와 멈춘다.
시선은 연두를 향한다.
그런 채로 유리는 한 마디를 뱉었다.
“네 연주도 들어보고 싶은데.”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완전히 해피엔딩이 되기는 그른 거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