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47)
47화. 진단
사락.
나는 조심스레 첫 번째 페이지를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연두가 그린 그림이 들어가 있었다.
‘이때는 이렇게 그렸구나.’
얼마 지난 것도 아닌데, 지금 연두가 그리는 그림과 꽤 차이가 컸다.
나와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실력이 꽤 향상된 거 같았다.
“넘기면 되는 거지?”
“응.”
나는 다시 한 페이지를 넘겼다.
검사 결과에 대한 본격적인 서술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윤영이 입을 열었다.
“저번에 얘기했던 것처럼, 미술치료는 보통 성폭행이나 재난, 사건 사고의 후유증으로 힘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거든?”
“응, 기억나.”
“연두는 가정문제로 상처받은 아이에 속해. 직접적으로 물으면 대답하기 힘들 수 있고, 괜히 상처를 헤집는 게 될 수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내적인 부분을 표현하게 하기 위해 한 검사인 거지.”
알고 있었다. 나도 상처를 헤집고 싶지 않았기에 연두를 여기 데려왔던 거니까.
누나가 말한 대로 이 그림에는 들어있을 것이다.
연두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가정, 집, 부모의 모습이.
나는 천천히 검사지를 읽어 내려갔다.
‘연두에게 그리도록 한 건 집, 사람, 나무 그림이었지.’
검사지에는 집 그림에 대한 해석부터 순차적으로 나와 있었다.
-집 그림은 피검자의 자기 지각, 가정생활의 질, 또는 가정 내에서의 자신에 대한 지각을 반영한다. 집 그림은 피검자의 현실의 집, 과거의 집, 희망하는 집, 또는 이것들이 혼합된 형태일 수······
간단히 말해 가정에 대해 연두가 느끼는 심리를 집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것이었다.
그 가정의 모습이 현실일지, 과거일지, 연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형태일지는 모르지만.
그건 다음 내용을 읽어야 알 수 있는 문제였다.
-우선 집의 필수요소인 지붕, 벽, 문 등을 대부분 그렸다는 점에서 R/O 정신증의 가능성은 매우 낮게 판단된다.
이게 무슨 의미지?
처음 보는 용어에 불안해진 나는 곧바로 질문했다.
“누나. 이건 무슨 가능성이 낮게 판단된다는 거야?”
“아래 나와 있는데, 연두의 경우에는 지능지체 및 정신지체를 가리키는 거야.”
“그러니까 그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소리지?”
“응.”
“휴우우…”
절로 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역시 내 예상대로 연두는 지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다만, 지금까지의 환경 탓에 아는 게 많이 없었을 뿐이지.
특히 정신지체의 가능성이 낮다는 점도 너무 안심이 됐다.
나는 계속해서 검사지를 읽어 내려갔다.
‘지붕, 벽, 문, 창문······’
연두가 그린 하나하나의 요소에 관해 해석이 적혀 있었다.
차분하게 읽긴 했지만, 숨이 턱턱 막히는 몇몇 부분도 존재했다.
문을 가장 나중에 그렸다는 것에서 외부와 거리를 두려는 경향이 느껴진다는 것.
창문의 크기가 작고 닫혀 있다는 점에서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
수차례나 언급된 단어가 있었다.
‘외부.’
대체 연두가 두려워하는 외부란 뭘까?
모든 바깥 세계를 가리키는 단어는 아닐 터였다.
연두가 어린이집이나 시은이를 포함한 친구들을 두려워하지는 않을 테니까.
적어도 나는 그런 기색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면 생각나는 게 있었다.
“주원아.”
내 표정이 어두워진 걸 눈치챘는지 누나가 입을 열었다.
“우선 연두는 현재의 집과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집을 함께 그렸다고 할 수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연두한테 집에 누가 살고 있냐고 물었던 거 기억나?”
“응. 나랑 연두가 살고 있다고 대답했지.”
“그래. 그리고 앞으로 이 집에서 쭉 살고 싶냐는 질문에 연두는 바로 그렇다고 했고. 왜냐고 물으니까 아빠가 있어서라고 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윤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집안에 그리고 싶은 걸 그리라 했을 때도 연두는 바로 비밀상자를 그렸어. 주원이 네가 그린 연두 그림이 들어있는 비밀상자.”
“.. 그거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거야?”
“간단해. 연두는 집 그림을 그리면서 너를 계속 언급했어. 아빠에 대한 강한 심리적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거지.”
“그렇구나.”
머릿속에 연두의 얼굴이 떠오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연두를 만나고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는데.
나를 그만큼 의지가 되는 존재로 생각해 줬다는 사실에.
“다만, 주원이 너도 읽었겠지만 연두는 외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
“응. 근데 누나. 이 외부라는 건 정확하게 뭘 말하는 거야?”
사실 짐작은 갔지만, 누나의 입으로 확실하게 듣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는지.
“연두가 집 주위에 뭘 그렸는지 기억해?”
“응.”
처음에는 훌라후프 모양이라 생각했던 울타리가 떠올랐다.
최윤영이 말했다.
“너도 예측은 했겠지만, 울타리를 그리는 아이들은 방어기제를 드러내는 거야.”
“방어기제..”
“응. 중요한 건 무엇으로부터 가정을 보호하고 싶어서 울타리를 그렸는지 알아야 하는 거고.”
“연두는 나쁜 호랑이로부터 나랑 자기를 지켜주는 거라고 했어.”
“그래.”
누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알 거 같았다.
“사실 처음에 연두가 그린 호랑이 그림을 봤을 때도 생각한 건데. 이번에 연두가 그림을 그릴 때 더 확실해진 게 있어.”
“그게 뭔데..?”
“연두는 호랑이 그림을 그리라 했을 때 현저하게 그림 그리는 속도가 느려졌어. 그전까지는 엄청 빠르게 그림을 그렸는데.”
당시에 나도 똑같이 느꼈기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우개를 엄청나게 많이 사용했지. 그전까지는 거의 한 차례도 안 쓰던 지우개를.”
“지우개를 많이 쓰는 건 뭘 나타내는 건데..?”
“과도한 지우개 사용은 강박이나 불안, 불안정, 초조함 등의 상태를 드러내는 지표야. 연두의 경우에 호랑이를 그릴 때만 그랬다는 점에서 더 가능성이 높고.”
이쯤 되면 피할 수는 없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역시 호랑이는 외삼촌을 나타내는 거야..?”
최윤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아. 혹시 연두가 그린 호랑이 기억하고 있어? 연두가 지워버려서 볼 수는 없지만.”
“응. 전에도 그런 호랑이를 그렸으니까.”
“그 호랑이의 형태를 생각해 봐. 너도 그림을 그려서 알겠지만, 보통은 동물을 그릴 때 네 발로 서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게 일반적이지?”
무언가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면 연두가 그린 호랑이는 두 발로 서서 앞발을 들고 있는 형태였다.
조금 비약한다면 누군가를 위협하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연두는 호랑이를 나쁜 호랑이라고 표현하잖아.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그러니까 호랑이에 자기도 모르게 투영한 거지. 자기가 생각하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를.”
“…”
역시 연두의 안에서 외삼촌을 지우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완전히 지워낼 수 있는 걸까?
확신할 수 없는 현실에 마음이 아팠다.
***
나는 이어서 검사 결과지를 읽으며 누나의 설명을 들었다.
다행히 머릿속을 더 흔드는 심하게 부정적인 내용은 존재하지 않았다.
“너무 충격받지는 마. 지금 연두는 네가 있는 가정 안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고 있고, 그게 가장 중요한 거니까.”
“고마워. 그럼.. 치료는 어떻게 해야 돼?”
“어차피 선생님이랑 이제 얘기할 텐데. 연두가 받은 상처에 비해 겉으로 드러나는 증세가 없어서, 약물치료는 당장 할 필요 없을 거야.”
천만다행인 건, 누나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연두가 훨씬 안정적인 상태라는 점이었다.
받은 상처가 크기에 심리상태가 매우 불안정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엇보다도 안심이 되는 건 나였다. 일단 기회가 주어졌다는 거니까.
연두의 상처를 내가 품어줄 수 있는 기회가.
“다만, 연두를 너무 안에만 있게 하면 안 돼. 소위 말하는 과보호.”
“응.”
“너를 향한 의지가 심화되면 전적인 의존이 될 수 있거든. 그건 위험할 수 있어.”
“알겠어.”
이렇게 연두의 미술심리검사 결과 확인이 끝났다.
최윤영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유, 우리 주원이 기특해서 어떡해? 연두가 이렇게 빨리 마음을 연 걸 보면 내가 아는 주원이 맞구나?”
갑자기 내가 알던 누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연두 부모 자격으로 온 건데 예의를 갖추시죠, 선생님?”
“흐흐, 웃기시네. 내가 널 꼬꼬마 때부터 봤는데. 윤우랑 콧물 흘리면서 놀러 다니던 게 엊그제 같다, 야.”
“와.. 콧물? 그건 무슨 말도 안 되는 날조지? 내가 윤우 처음 만난 게 고등학교 때인데.”
“오호, 그렇구나. 그래서 고등학생답게 편의점에서······”
“알았어, 알았어. 내가 졌어.”
과거 얘기를 하면 이길 수가 없다.
누나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나중에 윤우랑 셋이 술이나 먹자. 그러고 보니 주원이 너랑은 술 한 번을 못 먹었네.”
“그래. 다음에 한 번 먹자.”
***
의사와의 면담까지 마치고 나는 신세연의 집으로 향했다.
연두는 달에 한 번씩 상담치료를 받는 게 좋겠다는 진단이 있었다.
‘뭐, 그 정도는.’
부담이 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연두가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있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진단을 거부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어쨌든 미술심리검사를 진행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부정적인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극복 가능성을 내비치는 결과였으니까.
게다가 연두가 정신이나 지능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도 확인했고.
당장 약물치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역시 다행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빠로서 무슨 상황이 닥쳐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언제든 연두의 편에 서서 지켜줄 생각이었다. 설사 그 과정에서 내가 크게 다치더라도 말이다.
이제 연두는 내게 그런 존재가 되었으니까.
터벅. 터벅.
여러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신세연의 집에 도착했다.
인터폰을 누르고 올라가서 벨을 누르자 그녀가 바로 문을 열어줬다.
“오셨어요? 들어오세요!”
“네?”
“들어와서 차 한잔하고 가시라구요..!”
“아, 네. 그럴까요?”
두 번째라 그런지, 집에 들이는 게 상당히 자연스럽다.
아니면 그동안 많이 친해져서 그런가?
“연두는 이 방에서 시은이랑 놀고 있어요.”
끼익.
그녀가 문을 열어줬다.
웅크리고 있던 연두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 아빠다아!!”
“하하, 그래. 아빠 왔어, 연두야.”
연두는 벌떡 일어나서 내게 달려왔다.
나는 연두를 안아주며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 뭐 하고 놀고 있었어?”
“시으니랑 그림 그려써요..! 예뿐 동물들 마니 그려써요!”
“그렇구나. 재밌었어?”
“네!”
시은이는 오늘도 저 표정이다. 왜 이렇게 빨리 왔냐는 표정.
차 먹고 갈 테니까 봐주라, 좀.
한편, 신세연은 나와 연두를 보며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안 그래도 애틋한데, 오늘따라 더 애틋해 보이셔서요. 연두 보는 눈빛이.”
“하하, 그랬나요?”
“네.”
주책이네.
혼자 연두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해서인지, 그게 눈빛에 묻어난 모양이다.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연두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때 연두가 말했다.
“아빠, 있자나요..”
“응, 연두야.”
“시으니랑 동물 그림 마니 그렸는데.. 못 그린 동물이 이써요..”
“못 그린 동물?”
“네.. 시으니가 조아하는 앵무새 그리려고 했눈데, 너무 어려어서…”
“그렇구나. 아빠가 한 번 봐도 돼?”
연두를 안은 채, 나는 시은이에게 다가갔다.
물이 끓는 동안 기다리려는 건지 신세연도 바닥에 앉았다.
나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확인했다.
‘한 종이에 그렸나 보네.’
큰 종이 하나가 동물들 그림으로 거의 메워져 있었다.
그림체로 연두와 시은이의 그림이 구분이 가능했다.
역동적인 느낌이 나는 연두의 그림. 차분한 느낌이 나는 시은이의 그림.
‘그림 실력은.’
단짝이라 그런지 별로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지 못한 동물이 앵무새라고 했지? 하긴, 색깔이 다채롭고 특이하게 생겨서 어려웠을 수 있다.
마침 종이에 빈 부분도 적당히 남아 있었다.
나는 시은이를 향해 말했다.
“시은아.”
“네.”
“동물 중에서 앵무새를 제일 좋아해?”
시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솔직히 말해서, 바닥에 놓인 크레파스를 보니 손이 근질근질했다.
연두도 내심 내가 앵무새를 그려줬으면 하는 거 같고.
나는 씩 웃음을 지으며 시은이에게 말했다.
“그럼.. 아저씨가 앵무새만 좀 그려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