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04)
504화. 조금 머러요
“.. 같이 간다면?”
“응?”
“단둘이 가는 게 아니라, 연두.. 그리고 시은이랑 같이 간다면?”
“…!”
사레라도 들린 듯 레나가 격하게 몸을 들썩였다.
동시에 떠올랐다.
얼마 전에 교장실에서 지구본을 보며 나눴던 이야기가.
‘연두랑 시은이는 제일 가 보고 싶은 나라가 있니?’
교장선생님의 물음에 연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독일이라고.
소시지 얘기를 잔뜩 한 참이긴 했지만, 그것도 충분히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레나가 한국이 좋은 가장 큰 이유로 한식을 꼽는 것처럼.
‘독일 빼고는?’
그 물음에 연두는 모이또라 대답했지만 모이또는 갈 수 없었다.
그런 나라는 없으니까.
결국 연두가 가장 가고 싶어하는 나라는 독일인 셈이었다.
‘시은이도 가 보고 싶다고 했고.’
사실상 레나는 한국보다 독일이 더 익숙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았다.
대부분 음식이라는 건 안 비밀이지만.
그러나 독일은 아니었다.
독일에 관해서는 웬만한 질문은 어렵지 않게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따라서 레나는 결심했다.
언젠가 친구들과 함께 독일에 가게 된다면 꼭 가이드를 해 줄 거라고.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먼 미래라 생각했다.
독일은 멀어도 너무 멀었고, 고집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런 면에 있어서는 의외로 선이 확실한 레나였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아빠가 먼저 얘기를 꺼낸 거다.
흥분의 도가니였다.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레나의 마음속은 이미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까스로 레나는 입을 뗐다.
“.. 연두랑 시은이랑 같이?”
그때였다.
돌연 하파엘은 태세를 전환했다.
“아니다, 아니야!”
“.. 응?”
“생각해 보니 이건 아닌 거 같구나. 없던 일로 하자, 레나.”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뭐라 말도 못하고 얼어붙은 레나.
한편 이은경은 그런 둘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갑자기 한국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 왜 업던 일로 해? 응?”
“아빠는 슬푸구나.”
“머가?”
“이렇게 해야.. 레나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이렇게까지 해야 딸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게.
대충 그런 서운함을 전하려는 거 같다.
남편은 계속해서 어눌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레나 말이 맞단다.”
“.. 응?”
“사랑.. 사랑이란 멀리 있어도 사랑해야 사랑. 그 말 맞아.”
“아, 아빠! 그건……”
“그러니까.. 멀리 떨어져도 사랑하자, 레나.”
이은경은 결국 못 참고 웃어버렸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저 사람, 진짜 서운해하는 게 아니다.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장난치고 있는 것 뿐이지.
그 증거로 계속 웃음을 참고 있는 남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한편 레나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이다.
그럴 만도 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는데.
그게 물거품이 될 위기였으니까.
‘.. 안 돼!’
어떻게든 아빠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나 단칼에 거절해 놓고,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꾸는 건 어떤 말을 해도 이상했으니까.
결국 레나는 선택했다.
“아빠. 레나가 잘모탰서요.”
핑계 없이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하기로.
그에 더해 특수한 상황 속에서만 나오는 존댓말까지.
잠시 흔들릴 뻔 했지만 하파엘은 태도를 유지했다.
“아니야, 레나. 사과를 바드려 한 말이 아니란다.”
“아빠…”
레나는 필살기를 사용했다.
“사랑해요..”
“…”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그 말처럼 주도권과 별개로 정해져 있던 결과였다.
넘어가기 직전.
“정말이니, 레나?”
“응.”
“하하, 기쁘구나! 그럼 아빠랑 단둘이 독일 갈까?”
“…”
침묵이 이어졌다.
큰일이다. 이번에는 진짜 상처를 받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타이밍에 이은경이 끼어들었다.
“으휴. 그러니까 왜 또 괜히 물어보고 그래.”
“여보…”
위로해 달라는 듯한 표정에 실소를 뱉으며 이은경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진심이야?”
“뭐가?”
“연두랑 시은이 독일에 데려가겠다는 거.”
그렇게 묻긴 했지만 이은경은 알고 있었다.
아예 없는 말을 꺼낼 남편은 아니라는 걸.
“아, 생각해 봤는데 괜찮지 않을까 해서. 이번에는 일정이 그렇게 빠듯한 것도 아니니까.”
레나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진짜였어!
그 사실 하나만으로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이은경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독일이야. 알지?”
“당연하지. 내가 태어난 나라인데.”
해맑다.
가끔 너무 해맑아서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마음을 가다듬고 덧붙였다.
“내가 같이 못 간다는 것도 알지?”
“그건 조금, 아니 많이 슬프지만 어쩔 수 없지. 당신은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 국보니까.”
“풋. 국보는 무슨.”
능청스러움에 웃음이 나왔다.
사실 자국 내에서의 인지도로 보자면 국보는 그녀보다는 하파엘이 더 가까웠다.
음악가로서의 평가보다는 국가의 차이긴 했지만.
끝으로 그녀는 물었다.
“안 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도 알지?”
아까 말했듯 가까운 국가도 아니고 독일이다.
여러모로 부담이 큰 만큼, 성사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하파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레나도 그건 알고 있지?”
“.. 응!”
“그래. 그럼 뭐, 한 번 물어보는 수밖에. 하하!”
여전히 해맑은 하파엘.
아직은 성사될지 미지수인 연시레의 독일행이었다.
***
선화초등학교 음악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간질거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바로 레나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옆에 있는 두 친구에게 얘기하고 싶었다.
‘얘드라! 우리 같이 독일에 갈 수도 있서!’
하지만 꾹 참았다.
아빠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얘기했으니까.
‘아빠가 따로 얘기할 때까지는 말하지 말아주렴. 못 가게 됐을 때 실망이 클 수도 있으니까.’
그 말 때문이었다. 레나는 착한 아이였다.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약속은 꼭 지키는 편이었다.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나, 잠시 생각이 흐트러졌을 때였다.
“레나야!”
불쑥 연두가 무언가를 내밀며 말했다.
“헤헤.. 이거 머거!”
그건 바로 소시지였다.
“소시지?”
“응! 시은이랑 지우는 하나 줬어! 레나도 머거!”
“고마워! 독일에 가면……”
레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깜빡 잊고 독일에 가는 걸 전제로 두고 이야기할 뻔 했다.
독일에 가면 맛있는 소시지를 잔뜩 먹을 수 있다고.
“으응? 독일..?”
아리송한 물음에 레나는 굉장히 어색하게 고개를 휘저었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바로 납득하는 연두와 달리 시은이의 표정에는 의뭉스러움이 떠올랐다.
평소의 레나와는 느낌이 달랐으니까.
굳이 캐묻지는 않았지만.
끙.
조심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레나는 저만치 책상으로 다가갔다.
지우와 유준이오빠가 있는 책상이었다.
“콧구멍!”
“.. 코, 콧구멍?”
“응! 이 길이가 콧구멍인 거야! 그러니까.. 콧구멍 더하기 137……”
또 콧구멍이다.
요즘 시간이 남을 때마다 유준이오빠는 지우에게 수학을 알려주고 있었다.
항상 콧구멍이 등장하긴 했지만.
‘콧구멍이 없으면 문제를 풀 수 없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 세 자리 숫자와 도형들이었으니까.
어느새 연두와 시은이도 다가와 관전했다.
이윽고 들려오는 탄성.
“우, 우와..”
지우가 낸 소리였다.
신기했다.
항상 이런 이상한 설명으로 유준이오빠는 지우에게 수학을 알려주곤 했다.
놀랍게도 지우는 곧잘 이해했고.
“이해한 거야?”
“으, 응!”
지우는 해맑게 웃었다.
어려워서 끙끙 앓다가도 유준이오빠 설명만 들으면 쉽게 풀리곤 했으니까.
그럼 집에 가서 엄마의 칭찬도 들을 수 있었고.
요즘 들어.. 수학이 조금은 재밌어진 기분이었다.
“고, 고마워…”
“언제든지 물어봐도 되는 거야!”
수학에 있어서만큼은 해결사가 된 유준이였다.
그때였다.
선재가 등장한 건.
“Yo~ 유준~! 나왔어, 러쉬베놈의 신곡~! 정말로 고독하구만? 체킷!”
질린다는 듯 유준이는 손을 내밀며 TV에서 본 멘트를 외쳤다.
“멈춰!”
사실 그다지 효용이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선재는 멈추지 않았다.
“기억나? 우리가 함께……”
“으악! 나 힙합 그만둔 거야!”
“.. 고독하구만.”
아직도 힙합 듀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선재였다.
그렇게 떠나가는 둘.
남겨진 네 아이는 약속이라도 한 듯 쿡쿡 웃음지었다.
***
요즘 내 일과는 간단했다.
연두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면 우선 그림을 그린다.
꼭 일이 있어야 그림을 그리는 건 아니었다.
조금 더 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따로 그림 연습을 하곤 했다.
연두부콘을 완성한 후라 좀 더 연습시간을 길게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영이가 아니었다.
한 번 펜슬을 잡으면 쉽게 놓는 타입은 아니지만, 한 번씩 집중력이 끊기는 타이밍이 존재한다.
그럴 때면 깔끔히 내려놓고 유투브에 들어갔다.
-마술사 이윤결
요즘 연두튜브 다음으로 많이 들어가는 채널이다.
벌써 꽤 여러 마술을 마스터했다.
대부분 거창한 장비가 필요하지 않은 간단한 마술이긴 했지만.
‘한 번 보여줘야겠어.’
이 정도면 간이 마술쇼 정도는 펼칠 수 있을 거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물론 관객은 연두이고.
유투브 편집은 보통 늦은 시간에 진행했다.
왜인지 그게 집중이 더 잘 됐다.
대충 이 정도였다.
시간이 남아도는 건 아니었지만 바빴던 때에 비하면 비교적 한가한 나날이었다.
이제 또 바빠지겠지.
따라서 요즘 생긴 고민거리가 있었다.
‘어디가 좋을까.’
연두와 함께 어딘가 다녀오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갈 만한 곳은 많지만, 한 가지 조금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다.
그게 뭐냐고?
지금껏 가 보지 않은 장소.
달리 말하면 조금 새로운 곳에 가 보고 싶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걸 보고, 새로운 걸 먹고, 새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장소 어디 없을까?
‘제주도.’
내가 떠올린 건 제주도였다.
흔하다 생각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와 연두에게는 특별한 장소였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으니까.
‘이 기회에 비행기도 타 보고.’
연두도 그렇지만 나 역시 비행기를 타 본 경험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새롭지 않은가.
사실 이렇게 고민하긴 해도, 연두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어디든 즐거울 건 분명하고.
‘기왕이면 더 좋은 곳에 가고 싶은 거지.’
아무튼 지금까지의 1순위는 제주도였다.
해외는 안 가냐고?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 부담돼.’
해외는 달리 말하면 타국이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데다가, 아무리 새로운 게 좋다고 해도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새로울 터였다.
그런 환경은 아무래도 거부감이 있었다.
조금은 불안하기도 하고.
‘가이드가 있으면 모를까.’
적어도 지금 생각하기에 그런 사람은 떠오르지 않는다.
영어를 배워야 하나?
아무튼 해외에 가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조금 힘들 거 같다는 생각이었다.
‘패키지여행도 그렇고.’
보통 낯선 사람들과 함께한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연두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터였다.
그것만으로도 꽤나 부담이 되는 데다가, 나 역시 낯을 가리는 편이라 선택지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해외여행은 나중을 기약할 생각이었다.
드르륵.
그때 울리는 진동음.
‘.. 응?’
조금 의외의 인물이 떠올라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나의 아버지 하파엘이었다.
번호를 교환하긴 했지만, 이렇게 연락이 온 건 처음이었다.
‘보통 연락은 이은경과 주고받으니까.’
무슨 일이지.
호기심이 동한 나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연두 아버님!”
“네, 안녕하세요.”
텐션 높은 한국어 인사말에 나도 밝게 인사를 받았다.
그러자 들려오는 말.
“할 말 있어서 전화했어요. 괜찮습니까, 통화?”
“네.”
“다행이에요!”
꽤나 유창한 한국말.
아직 살짝 어색하긴 하지만 처음에 비하면 엄청 늘은 게 느껴진다.
“다름 아니라……”
오호라.
이런 고급 표현까지.
어쩌다 보니, 나는 그의 한국어 실력에 집중하며 귀를 기울였다.
“요즘 바쁜가요?”
조금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대답했다.
“아니요.”
“오! 안 바쁜가요?”
“하하, 네. 최근에 일이 끝난 뒤로는 쉬고 있거든요.”
“그럼요…”
말끝을 늘인 그는 대뜸 물었다.
“같이 어디 좀 갈 수 있나요?”
“네? 어디를요?”
“음.. 그러니까.. 놀러요. 저랑 레나랑 같이. 시은이는 아직 못, 아니 안 정해졌어요.”
“아하.”
그제야 나는 이해했다.
아무래도 하파엘 역시 나랑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나쁠 거 없지.’
휴가가 겹친다면 함께 가서 나쁠 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답했다.
“좋죠. 생각해 두신 곳이 있으세요?”
“네.”
없다고 대답했으면 제주도를 얘기해보려 했는데 생각해 둔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특별한 장소였으면 좋겠는데.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조금 머러요.”
바라던 바다.
멀다는 건 적어도 익숙한 장소는 아니라는 거잖아.
“하하, 괜찮아요. 멀어도 차 타고 가면 금방인데요.”
“차 타고 못 가요.”
“…?”
차 타고 못 간다고?
순간 소름이 돋았다.
하파엘, 나랑 같은 곳을 생각한 거구나!
‘제주도.’
확실했다.
차 타고 못 가는 곳이라면 선택지는 제주도뿐이었다.
그렇게 확신한 나는 말했다.
“괜찮아요. 요즘 뭐, 비행기 타면 금방인데요. 하하.”
비행기 한 번도 안 타 본 사람이 뱉는 말이라기엔 조금 우습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제주도는 비행기 타면 30분도 채 안 걸리지 않는가.
‘.. 아닌가?’
그렇다고 들었는데.
어쨌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정말요?”
왜인지 그렇게 되물은 하파엘은 말을 이었다.
“정말 비행기 타면 머러도 괜찮아요?”
이상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그 느낌의 정체는, 이어지는 하파엘의 말에서 알 수 있었다.
“독일, 갈 수 있어요?”
“…?”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물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