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09)
509화. 배우보다 더 배우
“이제부터 아빠가 마술을 보여줄게.”
이주원의 마술쇼 개막이었다.
참고로 아까 시점부터 카메라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선보일 건 동전 마술이다.
동전 하나만 있으면 되는 데다가, 간단한 눈속임으로 호응을 끌어내기도 좋은 마술이었다.
‘이미 입증됐지.’
콩쿠르 때 남학생이 선보인 동전 마술.
호응은 엄청났다.
당시에는 나도 감이 오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트릭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외에도 동전을 활용한 마술은 많았다.
“아빠.. 마술 할 줄 아라요?”
아직은 아까의 서운함이 전부 가시지는 않은 듯하다.
그런 목소리였다.
“그럼, 알지.”
불과 얼마 전까지는 몰랐지만 연두를 위해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이제 보여줄 차례다.
스윽.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들었다.
“.. 어.”
전에 봤던 탓일까.
동전을 보여준 것만으로 연두의 표정에 미묘한 설렘이 떠오른다.
이제 그걸 써먹을 차례였다.
“자, 이 동전이 보이시나요?”
경박한 말투는 포기했다.
아무리 연습해도 이윤결처럼 하기는 어려울 거 같았으니까.
그러나 멘트만으로도 어느 정도 비슷한 분위기는 낼 수 있었다.
“네에..”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무것도 보여준 게 없는데도 반쯤 현혹된 듯한 연두의 표정을 보니.
마술사의 위엄이 떨어질 수 있으니 간신히 참아냈다.
동전 마술.
사실 대단할 건 없었다.
이렇다 할 준비물 없이 동전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사라지게 하거나 나타나게 하는 것 정도니까.
동전을 숨기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처음에는 어려웠다.
생각대로 동전이 잘 숨겨지지 않았고 어딘가 미숙했다.
그럴 걸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이 이윤결이 제안한 게 바로 거울 연습법이었다.
역시나 거창한 건 아니다.
말 그대로 거울을 보면서 연습하는 것 뿐이다.
단, 이윤결은 말했다.
‘여러분, 잘 들어요! 거울을 보는 자신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져야 해요! 내가 나를 속일 수 있을 정도로! 그래야 다른 사람도 속일 수 있어요. 얼 유 오케이?’
사실 우스운 얘기였다.
대놓고 속일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요지는 따로 있었다.
‘거울을 보는 게 관객의 시점이니까.’
적어도 시각적인 요소에 있어서는 나도 나 자신을 교란시키는 게 가능하다.
상당한 연습 끝에 그걸 깨달았다.
따라서 나는 연두를 100% 속일 자신이 있었다.
“자, 동전을 한 번 옮겨 볼까요?”
숨죽인 채로 고개를 끄덕이는 연두를 보며 나는 손을 움직였다.
왼쪽 손에 있는 동전을 오른쪽으로.
여기가 핵심이다.
‘실은 옮기지 않지.’
전문용어로는 썸 팜(Thumb palm).
엄지만을 활용하여 동전을 숨기는, 비교적 가장 완벽하게 손을 펼 수 있는 기술.
연두의 눈빛을 보고 나는 성공을 직감했다.
“자, 동전은 어디 있을까요?”
“저기요..”
“맞습니다. 동전은 오른쪽에 있죠. 방금 이동했으니까요.”
사실 원래는 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왼쪽 손 펴 보라고 하면 틀림없이 걸리거든.
숙련된 마술사라면 임기응변으로 넘길지 모르지만 나는 어버버하다가 동전을 떨어트리고 말겠지.
그럼 왜 말했냐고?
연두의 눈빛에서 일말의 의심도 없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후후.”
마술사에게는 이만한 관객이 없었다.
트릭을 의심하려 하지도 않고 마술을 마치 마법처럼 생각하는 순진한 공주님이니 말이다.
차라리 마법을 보여준다고 할 걸 그랬나.
스륵.
자연스럽게 동전이 있는 왼손을 내리며 나는 말했다.
“그럼 여기 있는 동전을 사라지게 해 볼까요?”
“어, 어떻게요..?”
“이렇게.”
후우.
입김을 불며 오른손을 편다.
당연히 손을 활짝 펴도 동전은 보이지 않는다.
왼쪽 손에 있거든.
동공지진이 일어난 연두.
생각 이상의 반응이다.
아마 뒤에 기대고 앉아있지 않았다면 한참 뒤로 물러났을지도 모른다.
누가 보면 내가 홍해라도 가른 줄 알겠네.
“자, 여기서 질문! 사라진 동전은 어디에 있을까요?”
아직 끝이 아니었다.
하이라이트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질문은 했지만 생각할 틈은 주지 않고 연두에게 다가간다.
스윽.
떨궜던 왼손을 흠칫하는 연두의 귓가에 가져간다.
“하하, 공주님 귀 속에 있었네요.”
“…!”
이번에는 놀란 수준이 아니었다.
경악 그 자체였다.
크기상 귀 속에 들어갈 수 없어서인지 몇 번이나 귀를 만지며 동전을 바라본다.
‘미치겠네.’
한편 나는 온 힘을 다해 웃음을 참고 있었다.
너무 순수한 거 아니냐고.
마술을 보여주는 입장에서 이토록 재미있을 수가 없다.
그 타이밍에 나는 팬서비스 차원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며 한 마디를 던졌다.
마술사다운 말투로.
“어떤가요? 여러분도 귓속, 확인해보셨나요?”
말하고 보니 뭔가 오싹하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연두는 나를 정말 대단한 마술사, 아니 마법사라도 된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아차 하고 고개를 휙휙 젓는다.
아무래도 공주님이 아직은 풀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아까 유독 짓궂긴 했지.
가장 뒤로 미뤄뒀던 건데 아무래도 앞당겨야겠어.
***
카드 마술.
사실 원리는 더 간단하다.
손재주와 숙련도가 필요한 동전 마술과 달리 정해진 과정만 그대로 따라가면 되니까.
그 과정을 충실하게 밟은 뒤 마지막 단계.
역시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이었다.
‘하트 5.’
연두가 고른 카드였다.
이미 알아냈지만 바로 얘기하지는 않았다.
얻어낼 게 있었으니까.
“흐음. 알 수 없네요..”
난처하다는 뉘앙스의 내 혼잣말에 연두가 반응했다.
“.. 왜여?”
“아직 연두는 아빠한테 삐져있죠?”
맞나 보다.
굉장히 찔리는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기세를 몰아 나는 말했다.
“아쉽지만 그럼 맞출 수 없어요.”
“연두가 삐저 있어서요..?”
“네. 그럼 연두의 마음을 읽을 수 없거든요. 그런데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연두의 눈에 호기심이 떠오른다.
“.. 방법이 뭔데여?”
“연두가 삐진 걸 풀고 아빠한테 사랑이 담긴 뽀뽀를 해 주면 돼요.”
“사, 사랑이 담긴 뽀뽀?”
“네.”
갈등에 빠진 연두.
평소라면 바로 뽀뽀해 줬겠지만 아까의 일도 있으니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동시에 궁금하겠지.
뽀뽀를 해 주면 정말 내가 연두가 고른 카드를 맞출 수 있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목소리.
“해 줄께요. 뽀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나는 능청스레 말을 받았다.
“.. 그냥 뽀뽀인가요?”
추하다.
그렇지만 완벽한 마술을 위해 반드시 밟아야 하는 과정이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연두는 자그맣게 말했다.
“사랑이 담긴 뽀뽀…”
“명심해야 돼요. 사랑이 담긴 뽀뽀가 아니라면 효력이 없으니까요.”
“네에..”
소리없는 웃음을 지으며 나는 볼을 내밀었다.
이윽고 느껴지는 감촉.
쪽.
성공이다.
잠깐이지만 마술을 배우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물론 내 마술 스승님은 이윤결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이윤결이라면 결코 여기서 마술을 끝내지 않았을 거다.
“흐음..”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향해 연두가 물었다.
“왜여..?”
“모르겠군요. 사랑이 조금 덜 들어간 거 같은데요?”
아까보다 더 추하다.
그러자 들려오는 연두의 혼잣말이 웃음포인트였다.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린다.
“다, 담았는데..”
“네?”
“사랑.. 담았는데……”
진짜 의식하고 한 뽀뽀였던 모양이다.
간신히 웃음을 참아내며 말했다.
“조금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한 번 더 뽀뽀를 받아야겠어요. 물론 사랑이 담긴 뽀뽀를.”
“하, 한 번 더요..?”
“그렇습니다.”
이젠 그냥 내 놓으라는 식이다.
빨리 줘, 뽀뽀.
잠깐 망설이다가 연두는 눈을 꼭 감고 두 번째 뽀뽀를 해 줬다.
저절로 또 내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흐음. 뭐지?”
“이상하군요. 아직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닌가……”
3절에 4절을 거듭하고 5절까지 불렀다가,
“.. 아빠!”
“억!”
“이제 못 담아여! 사랑 진짜진짜 많이 담았어요!”
발끈 연두를 보고 나서야 멈췄다.
확실히 심하긴 했다.
애국가도 4절까지 있는데 5절까지 했으니 욕심이 과했지.
생각해 보니 다섯번째 뽀뽀까지 받았으면 나 역시 치사량이었을지도 모른다.
과부하로 인해 잊어먹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빨리 말하자.
“하트.”
“.. 네?”
“하트 5. 그게 연두가 고른 카드죠?”
아직 카드는 연두에게 있었다.
흠칫 몸을 떤 연두가 카드를 손에 들고서 바라본다.
이변은 없었다.
“맞아요.. 하트 5.”
“정말 다 풀렸나 보네요. 삐진 거.”
“…”
“그리고 연두는 아빠를 정말 사랑하나 보군요.”
마술을 빙자하니 가능한 멘트였다.
앞서 한 말들이 있으니 카드를 맞췄다는 건 나를 향한 연두의 애정을 확인한 것과 같았다.
이래서야 아직 삐졌어도 삐진 티도 못 내겠네.
“우으..”
볼멘소리와 함께 수줍은 표정으로 연두는 말했다.
“아빠는..”
“네?”
“아빠는.. 진짜진짜 치사 빤스에요…”
이렇게 끝이 났다.
이주원의 첫 마술쇼, 아니 마술을 빙자한 사심 채우기가.
***
독일 여행.
나도 연두도 해외에 나가는 건 처음이다.
그렇다면 여행을 가기 전에 반드시 해 둬야 할 준비가 있었다.
오늘이 그 날이었다.
스르륵.
“어서 오세요! 어? 어어??”
나와 연두를 번갈아 보고선 휘둥그레지는 남자의 눈.
그는 사진사였다.
[명품 사진관]이 곳을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여권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해외에 나가기 위해서 여권은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뭐, 뭐야!”
“연두다!”
“헐.. 연두가 왜 여기 있어?”
“초록님 대박…”
“팬이에요!”
우리를 알아보는 손님들도 있었다.
사진사도 말만 안 했지 알아본 건 매한가지인 거 같고.
대충 고개를 숙여 반응한 뒤, 얼어붙은 사진사를 향해 말했다.
“안녕하세요. 여권사진을 찍으러 왔는데요.”
“안녕하세여..”
연두도 함께 인사한다.
그것만으로 꺅꺅 소리로 가득 찬 사진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진사는 내부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래서.. 여권 사진을 찍으러 오셨다고요.”
“네, 맞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예쁘게 찍어드릴게요.”
왜인지 열의에 찬 표정.
좋은 일이었다.
여권사진이 꼭 예쁠 필요가 있나 싶긴 하지만 잘 나와서 나쁠 건 없으니까.
순번은 나부터였다.
“머리를 좀 올려주시겠어요?”
“머리요?”
“앞머리요. 여권사진은 눈썹이 전부 보여야 하거든요.”
“아.”
본의 아니게 처음인 티를 내버렸다.
그런데 난감하다.
이 놈의 앞머리가 올리면 자꾸 내려가고 올리면 자꾸 내려간다.
이게 중력의 무서움인가.
그때였다.
와다다.
어느새 내 앞까지 달려온 연두가 손을 내민다.
슥. 슥.
앞에는 거울이 있었다.
가르마를 타고 자연스럽게 갈라진 앞머리.
눈썹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헤헤.”
배시시 웃고서 연두는 말한다.
“이제 눈썹 보여요..”
그 말대로였다.
눈썹이 보여야 한다고 꼭 앞머리를 올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괜히 횡설수설해 버렸네.
그 사이 연두는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잘생겨따…”
“…”
기분 좋은 칭찬이다.
그런데 손님들과 사진사님이 굉장히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어서인지 상당히 민망하다.
“와, 진짜..”
“이 케미를 내가 영접하게 되다니.”
“내가 오늘 찍으러 오자고 했지! 그렇게 안 간다더니.”
애써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고마워, 연두야.”
“네에.”
그렇게 뒤로 물러나는 연두.
그대로 머리를 유지한 나는 사진사를 보며 물었다.
“이렇게 찍어도 괜찮을까요?”
멍 때리던 그는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눈썹만 제대로 보이면 되거든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넵!”
자세를 잡으며 그는 질문했다.
“그런데 여권사진은 처음이신가요?”
역시 눈치챘구나.
처음이 아니라기엔 너무 어색한 행동의 연속이긴 했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따님도요?”
“네.”
놀란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의외네요. 연두랑 초록님은 당연히 해외에 나가보셨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하..”
“그럼 찍겠습니다!”
그는 능숙했다.
하라는 대로만 하니 어느새 촬영은 끝나있었다.
다음은 연두였다.
슥. 슥.
아까의 보답으로 예쁘게 머리를 정리해줬다.
아차, 눈썹이 보여야지.
머리를 좌우로 가르니 연하면서도 촘촘한 가느다란 눈썹이 드러난다.
새삼 느낀다.
어떻게 눈썹까지 이렇게 예쁜 건지.
“됐다.”
“연두 앉아요..?”
“응. 머리 망가지지 않게 살살 걸어가서 앉아, 연두야.”
그 말대로 연두는 살금살금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이후 정면을 응시한다.
카메라에 눈을 가져다 댄 사진사는 왜인지 일어서서 훅훅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자세를 취했다.
“그럼 찍을게?”
“네에.”
“살짝 웃어볼까, 연두야? 하나, 두울, 셋!”
찰칵!
한참 이어지는 셔터음.
나보다 훨씬 촬영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자, 끝났습니다! 바로 뽑아드릴게요!”
“네!”
나는 연두와 나란히 앉아 여권사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10분가량이 흘렀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진사는 웃으며 봉투 두 개를 가져왔다.
“이건 아버님 거, 그리고 이건 연두 거.”
“감사합니다.”
“지금 열어서 보시겠어요?”
굳이 권유하는 게 자신이 있는 거 같았다.
그럼 어울려줘야지.
봉투를 열어 사진을 본 내 입에서 자연스레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더 커다란 손님들의 감탄사에 묻혀버리긴 했지만.
“와..”
괜한 자신감이 아니었구나.
나도 나지만 연두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연두 생각은 또 다른 거 같지만.
“우아.. 아빠 진짜 머찌다…”
“하하..”
다시 한 번 감사인사를 건넸다.
“잘 찍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그는 조금 주춤하다가 이야기했다.
“저기..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부탁이요?”
“네. 연두랑 초록님 사진 따로 한 장만 뽑아서 사진관에 걸어둬도 될지……”
그런 거였나.
연두와 눈을 맞춘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끝이 아니었다.
여학생 손님들도 목소리를 냈다.
“저기요, 아저씨.”
다행히 나를 부르는 건 아니었다.
사진사가 대답했다.
“네.”
“연두랑 초록님 사진 저희한테 파시면 안 돼요?”
난처한 듯 그는 대답했다.
“파는 건 말도 안 되고요.”
“…”
“드리는 거야 가능한데 그것도 당사자인 연두랑 초록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하죠.”
희망이 생긴 건지 여학생 둘이 동시에 나를 바라본다.
“제발요…”
솔직히 민망했다.
그래도 이렇게나 갖고 싶어한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연두는?”
“연두도 괜찮아요!”
쾌재를 부르는 여학생들.
그렇게 사진관을 나서는데 들려오는 목소리.
“초록님! 연두야!”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여학생 두 명이 주먹을 불끈 쥐고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절대 연두해!”
이제는 익숙해진 장면이었다.
***
3년차 배우 인소희.
그녀는 지금 한껏 들떠있는 상태였다.
짧지 않은 단역생활을 거쳐 이번에 따낸 꽤나 비중 있는 조연 역할.
그것도 모자라서.. 무려 해외촬영을 가는 중이다.
“으하하!”
촬영을 하러 해외를 간다.
어떤 이에게는 당연할지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아니었다.
차 안에서 그녀는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그러고선 소리쳤다.
“나도 이제 배우다! 배우라고! 호호호! 명품조연 인소희!”
운전대를 잡은 매니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기지 않는다.
정말 같은 사람인 걸까.
이 사람과 바깥에 나가기만 하면 얌전하고 말도 잘 안 하는 그 사람이.
“해외촬영! 해외촬영에 필요한 배우 인소희!”
한 마디로 그녀를 정의하자면 또라이였다.
나쁜 사람은 아니다.
단지 엄청난 기분파에 상황에 따라서는 감당이 안 되는 텐션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그랬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
그녀는 그 무시무시한 배우병 말기에 걸려있었다.
“오빠!”
“.. 응?”
“어때요? 저 지금 배우같아요? 진짜 배우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그 뭐라 그러지? 아! 배우 포스! 그런 아우롸를 풍긴다는데. 저는 어때요?”
기가 찬다.
좀 정상적으로라도 앉아있다가 물어보던지.
방금까지 그 모습들을 보여줘놓고 이렇게 물어보면 뭐라 대답하냐고.
매니저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 배우같다.”
“와핫! 진짜요? 오빠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나 진짜 배우가 됐나 봐. 어쩜 좋아…”
“생각할수록 너는 배역을 잘못 받았어.”
“.. 네? 그게 무슨.”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어떻게 따낸 역할인데.
심지어 지금도 그 역할을 위해 촬영하러 공항에 가고 있는데.
“요조숙녀라니. 그게 말이니 방구니?”
“엥?”
“너는 도라이 역할을 했어야 해. 그것도 상도라이. 그래. 달그대에서 전지연이 맡은 그런 역할! 내가 볼 때 전지연보다 너가 더 연기 잘했을지도 몰라. 얼굴만 빼면.”
“오, 오빠!!”
그제야 말뜻을 알아챈 인소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렇다.
둘은 아무렇지 않게 일침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러니까 빨리 그 배우병 좀 고쳐. 이사님이 따끔하게 얘기하라더라. 그렇게 까불대다 사고 한 번 크게 친다고.”
“우으…”
볼멘소리를 내며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밖에서는 말도 잘 안 하잖아요. 제작발표회 때도 그랬고.”
“그건 그렇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끝까지 조심하란 얘기야. 한 순간이라도 방심했다가는 큰일나니까.”
“네에…”
잔뜩 풀 죽은 모습.
그 모습이 괜히 안쓰러워져 매니저는 말했다.
“그렇다고 너무 풀 죽지는 말고.”
“.. 네?”
“이번에 좋은 역할 맡은 건 사실이니까. 연기에 대한 시청자들 반응도 좋고. 잘만 마무리하면 다음번에는 더 좋은 역할도 꿰찰 수 있을 거야.”
그 말을 한 게 화근이었다.
“그쵸! 주연 딱 기다려! 내가 간다! 오래 걸릴 거 같지? 천만에! 1년 안에 갈 거야! 그리고 천만 관객……”
순식간에 바뀐 태도.
천만으로 라임까지 맞추는 걸 보며 매니저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윽고 도착한 공항.
“…”
고요했다.
미친 텐션도 더는 찾을 수 없었다.
정차한 뒤에 이번에 큰 마음먹고 장만한 명품백을 들고서 인소희는 차 문을 나갔다.
휑하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배우니까.’
배우는 어디에 있든 배우다워야 했다.
차 안에서만 빼고.
또각. 또각.
발걸음은 우아하게.
그렇게 인소희는 공항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문제는 그때 발생했다.
“.. 뭐, 뭐야?”
순간적으로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공항 안의 인파 때문이었다.
웅성. 웅성.
얼핏 보기에도 적지 않은 한 무리의 인파.
인소희는 침을 꼴깍 삼켰다.
‘설마……’
아무게에도 얘기 안 한 사실이지만 인소희도 해외에 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여권사진도 아직 따끈따끈했다.
그 사실은 인소희로 하여금 크나큰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 열심히 한 보람이 있구나.’
최근에 본 기사가 있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 7인.
그 명단에 인소희가 있었다.
딱히 공신력 있는 언론은 아니었지만 며칠을 행복에 젖어들게 만든 기사였다.
그 행복이 또 찾아왔다.
문제는 그렇게 생각한 게 그녀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요즘 팬클럽도 생기고 인기가 좀 붙긴 했던데.. 이 정도였나?”
매니저오빠의 말로 인소희는 100% 확신했다.
팬들이 틀림없다고.
‘어디 숨어있다가 이제 나타났니. 길 지나다닐 때는 못 알아보다가.’
이런 츤데레같은 팬들!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선 가방을 고쳐 매고 도도한 발걸음으로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팬들과 마주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