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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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화. 어색한 사이
비행기 기내.
비행을 시작한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다.
‘슬슬 힘드네.’
우려하던 멀미도 없었고 좌석도 편안했다.
하지만 따분했다.
벨트를 맨 채로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 답답한 기분도 들고.
잠이 오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식사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앞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승무원이 한 칸씩 다가오며 기내식 주문을 받고 있었다.
좋은 타이밍이다.
기내식.
비행기에 있어서 가장 궁금했던 요소 중 하나였다.
고개를 돌렸다.
아직 연두는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놀랍게도 유리의 어깨를 벤 채로.
유리는 딱딱하게 굳어있다.
잠들어 있지도 않은데 밀어내지 않는 게 의외다.
“유리야.”
흠칫 놀란 유리가 몸을 떨었다.
그 들썩임 때문인지 연두의 고개는 자연스레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이 와중에도 안 깨는 게 진짜 대단하단 말이지.
“왜, 왜요?”
어깨를 내준 걸 들키고 싶지 않은 걸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응하는 모습이 귀엽다.
이럴 때는 모른 척해 주는 게 예의지.
“연두 좀 깨워줄래?”
“깨우라고요?”
“응.”
승무원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내식 주문을 받고 있는 거 같거든.”
“아.”
그제야 납득한 듯 유리는 연두를 향해 말했다.
“야.”
“…”
“일어나.”
“…”
“일어나라구.”
실소가 나왔다.
저 정도로 단잠에서 깨어날 연두가 아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유리야.”
“네.”
“연두는 한 번 잠들면 깊게 잠들어서 그 정도로는 안 깨.”
“.. 그럼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흔들어서 깨우거나 아니면 간지럽히기.”
그 말에 유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듯.
“아저씨가 깨우면 되잖아요.”
“난 팔이 안 닿아서.”
“으..”
결국 유리가 선택한 방법은 전자였다.
“야, 일어나!”
연두를 잡고 흔든다.
그렇게 흔들리던 연두의 고개는 또다시 유리의 몸에 정착했다.
이번에는 어깨가 아닌 가슴팍이었다.
포옥.
놀라서 멈춘 유리.
다행히 효과가 없지는 않았는지 연두가 미세하게 눈을 떴다.
그러고선 중얼거린다.
“.. 유, 유리야.”
나는 알 수 있다.
아직 연두는 잠이 깨지 않은 몽롱한 상태라는 걸.
“빨리 일어나.”
“우으..”
“지금 안 일어나면 너 밥 못 먹는데. 뭐, 더 자든가.”
“…!”
신기했다.
반쯤 풀려있던 눈이 그 말 하나로 단숨에 생기가 돈다는 게.
빙긋 웃으며 나도 덧붙였다.
“그래. 밥 먹을 시간이야, 연두야.”
“.. 밥!”
완전히 일어났다.
그에 따라 나는 바로 메뉴판을 펼쳤다.
전채요리는 공통.
‘새우가 들어간 마카로니 샐러드인가.’
뭔지 몰라도 맛있을 거 같다.
메인 요리는 두 가지 중 선택이었다.
1. 채소, 매콤한 닭 넓적다리 살과 쌀밥
2. 으깬 감자와 적양배추를 곁들인 소고기 목살 브루기뇽
디저트는 또 공통이다.
바닐라 소스를 곁들인 치즈 케이크.
따라서 선택해야 할 건 메인 요리뿐이었다.
“밥! 밥 먹을래요!”
뒤에서 들려오는 레나의 목소리.
밥을 사랑하는 걸 보면 영락없는 토종 한국인이다.
“연두는 뭐 먹을래?”
물어보긴 했으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매콤한.
이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 1번은 연두가 먹기 어려웠다.
“2번이여..!”
“그래. 그럼 아빠는 1번으로.”
유리도 2번이었다.
어느새 우리의 앞까지 다가온 승무원.
“식사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1번 메뉴랑……”
능숙하게 주문을 마쳤다.
아마 그 능숙함에 누구도 비행기를 처음 타 보는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거다.
그 전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겠지만.
“음료는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음료요?”
“네.”
음료도 있었나?
허둥지둥 다시 메뉴판을 바라봤다.
결국은 드러나고 마는 미숙함이었다.
***
부푼 마음으로 기내식을 기다리는 연두.
그런데 이상했다.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자꾸만 눈앞이 헤롱거렸다.
잠에서 덜 깬 것도 아닌데.
휙. 휙.
고개를 젓던 연두는 그만 유리와 부딪히고 말았다.
콩.
“악!”
비명을 지른 유리가 말했다.
“뭐야!”
“미, 미안. 앞이 빙글빙글 돌아서……”
“빙글빙글 돈다고?”
“으응.”
전과 비슷했다.
아빠와 한강에 가서 실수로 엄청 맛없는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을 때.
그때도 이렇게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으니까.
그런 연두를 향해 유리는 물이 가득 담긴 컵을 내밀었다.
“마셔.”
“응?”
“물 많이 마시면 괜찮아지니까 마시라구.”
실제로 그랬다.
비행 중 어지럼증의 특효약은 수분 보충이었다.
여러 번 비행기를 타 본 터라 유리는 그 해결책을 알고 있었던 거고.
“고마워..”
홀짝. 홀짝.
소극적인 움직임에 유리는 말했다.
“입만 대지 말고 남기지 말고 다 마셔.”
“으, 응!”
엄격한 유리의 말에 연두는 물 한 잔을 가득 들이켰다.
신기하게도 어지러움이 가라앉았다.
마침 등장한 식사.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각자의 앞에 놓였다.
주원이 말했다.
“지금은 괜찮은 거지, 연두야?”
“네, 아빠!”
음식을 보니 완전히 가라앉은 어지럼증.
본격적인 먹방이 시작됐다.
***
한편 뒷좌석에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어색함이었다.
주원은 물론이고 아무도 생각 못 했던 사실이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둘마저도.
‘.. 왜 어색한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번도 레나랑 있으면서 어색함을 느껴본 적 없었는데.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레나 또한 이 어색함의 이유가 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 이유는 앞에 있는 연두였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둘은 함께한 적은 많았지만, 연두 없이 둘만 있었던 적은 극히 드물었다.
그마저도 다른 친한 친구들이 함께였고.
이런 밀착된 곳에 나란히 앉아있으니 숨어있던 어색함이 모습을 드러낸 것뿐이었다.
실제로 몇 번이나 대화에 실패했다.
제대로 된 대화 말이다.
처음 이륙할 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어색함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목소리를 냈지만,
‘레나야.’
‘시은……’
그마저도 타이밍이 겹쳐 더 어색한 기류를 만들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찾아온 식사 시간.
“맛있게 드세요.”
식사가 시작됐다.
한편 그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은주아였다.
그녀는 굳이 생각한 걸 돌려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얘들아.”
동시에 바라보는 둘을 향해 돌직구를 꽂았다.
“너희 둘, 혹시 어색하니?”
“…!”
동공 지진.
생각만 하던 걸 제삼자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반응한 건 레나였다.
“아, 아니에요! 우리 안 어색해요!”
옆에서 시은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걸 보며 은주아는 확신했다.
어색한 거 맞구나.
“흐흥, 그래.”
다시 시작된 식사.
시은이는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어색함이 느껴지는 건 변수이긴 했지만 레나를 좋아하는 마음은 확실했다.
이 상태로 쭉 가고 싶지는 않았다.
“레나야.”
“시은…”
타이밍 한번 얄궂었다.
또다시 겹친 오디오.
그래도 이번에는 침묵이 이어지게 두지 않았다.
“한 번 마셔봐도 돼?”
“응?”
“레나 음료수.”
레나가 주문한 건 오렌지 주스였다.
망설임 없이 레나는 내밀었다.
“여기.”
“고마워.”
쪼옥.
“맛있다..”
한 번 마시고선 바로 돌려준다.
은주아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
어색함이 가득 느껴지는 장면이었지만 그 모습이 되레 귀여웠다.
떨쳐내려고 서로 애쓰는 모습이 말이다.
슥.
주스를 다시 건네받은 레나는 괜히 한 모금 들이켜고서 말했다.
“나도 먹어봐도 돼? 시은이 주스.”
“응.”
기다렸다는 듯 시은이도 주스를 내민다.
쪼옥.
같은 빨대라는 건 둘 다 뒤늦게 깨달았다.
왜인지 좋아지는 기분.
거리낌 없이 입을 대고 마시는 건 진짜 친구끼리만 하는 거라 생각하니 조금은 어색함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옅게 웃으며 시은이가 말했다.
“레나야.”
“응, 시은아.”
“독일 얘기 해 줄래? 우리가 가게 될 곳.”
아는 분야가 나오니 레나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응! 얘기해 줄께! 궁금한 거 있스면……”
이렇게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지는 두 아이였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비행기는 시커먼 하늘을 비행했다.
창밖을 봐도 온통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암흑이었다.
‘… 다 잠들었나.’
그런 생각과 함께 몸을 뒤척이는데 들려오는 목소리.
뒤에 있는 은주아였다.
“안 주무세요?”
“잠이 안 와서요. 유리 어머님은요?”
“저도요. 이제 다 잠들었으니 저도 눈 좀 붙여야죠.”
시은이랑 레나는 잠이 든 모양이다.
그녀는 덧붙였다.
“애기들이 너무 귀여워서 지켜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구요.”
“하하, 그렇죠.”
시은이와 레나의 귀여움에 대해선 아주 잘 알고 있지.
아마 부모 다음일 거다.
그때 은주아는 불쑥 고개를 내밀더니 말했다.
“근데 알고 계셨어요?”
놀란 나는 조금 흠칫하며 되물었다.
“뭘요?”
“시은이랑 레나. 둘만 있으면 어색하다는 거요.”
“.. 네?”
“역시 모르셨나 보네. 그럴 만도 하죠. 저도 놀랐으니까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은이랑 레나가 어사(어색한 사이)였다니.
은주아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근데 서로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예쁘더라구요.”
“그랬군요.”
“유리도 좀 말랑말랑하고 귀염성이 있으면 좋을 텐데. 이번 여행을 계기로 친구들한테 좀 배웠으면 좋겠어요.”
“하하.. 그런가요?”
자연히 떠올랐다.
지금껏 비행기에서 본 장면들이.
내가 보지 못한 장면들을 은주아가 봤듯이, 나도 그녀가 보지 못한 장면들을 봤다.
그렇기에 자연히 말이 나갔다.
“저는 유리 되게 귀엽다고 생각하는데.”
“에이, 정말요?”
“유리한테도 한 말인데.. 저는 거짓말 안 해요.”
장난스런 대화도 오갔다.
이후에도 나는 그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어느 순간,
“…”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뭐야, 이 사람.
설마 대화하는 도중에 잠에 빠져든 건가.
‘평범하지는 않아.’
전에도 느낀 거지만 은주아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거 같았다.
가끔은 애 같기도 하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창가 쪽을 바라봤다.
“하하..”
언제 이렇게 된 거야.
연두와 유리가 머리를 서로 맞댄 채로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이거 완전 희귀한 장면 아닌가.
‘혼자 보기 아까운데.’
그 순간 떠오른 생각.
어차피 지금 눈을 감는다고 잠이 올 거 같지는 않다.
촬영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카메라 대신 나는 태블릿을 꺼내들었다.
‘그려 보자.’
오랜만에 든 욕구였다.
즉석에서 무언가를 그려 보자는 생각이 든 건.
바로 스케치를 시작했다.
스슥. 슥.
펜의 끝을 쥐고 그리는 얇은 실선들이 대략적인 구도를 만들어냈다.
러프 스케치였다.
이후 펜을 짧게 고쳐 쥐고선 본격적인 드로잉을 시작했다.
사각. 사각.
기분 좋은 소리. 새삼 신기하다.
실제 연필과 종이가 아닌데도 이런 질감과 촉감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게.
그림은 순조롭게 완성돼갔다.
그때였다.
부스럭.
웬 소리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다름 아닌 시은이였다.
되레 세상 당황한 표정의 시은이를 향해 말했다.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 시은아?”
“자다가 깼어요.”
“나 때문에 깬 건 아니지?”
다행히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전에 깨서 내가 그림 그리는 걸 구경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거의 완성된 상태.
소곤거리듯 시은이는 작게 말했다.
“아저씨.”
“응.”
“그 그림,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답하기 애매한 물음이었다.
“딱히 어떻게 하려던 건 아니고.. 그냥 그리고 싶어서 그렸던 건데.”
“올려주면 안 돼요?”
“응?”
“원스타그램에요.”
이건 또 뜻밖의 부탁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은이의 눈빛은 꽤나 간절해 보였다.
그다지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기에 나는 대답했다.
“그래. 비행기에서 내리면 올려줄게. 유리한테 허락은 받아야겠지만.”
시은이가 살짝 표정을 찡그린다.
그러고선 중얼거린다.
“민유리는 안 올려도 되는데……”
“응?”
“연두만 올려도 돼요.”
“그건 안 돼.”
“왜요?”
“유리까지 합쳐서 하나의 그림인 거니까.”
조금 불퉁한 표정이긴 하지만 어떤 말인지 납득은 한 거 같았다.
다시 나는 펜을 쥐었다.
그렇게 내가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시은이는 쭉 뒤에서 지켜봤다.
“어때? 괜찮은 거 같아?”
“네.”
짤막하게 시은이는 덧붙였다.
“진짜 예뻐요..”
뒤에 연두라는 말을 굳이 붙이긴 했지만.
마음에 쏙 드는 모양이다.
안 그랬다면 애초에 원스타그램에 올려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겠지.
‘오랜만인데.’
원스타에 그림을 업로드하는 건 오랜만이다.
그래도 나 역시 마음에 들었다.
즉석으로 그린 그림 치고는 꽤나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탄생했으니까.
‘보고 그린 장면이 워낙 예뻐서 그런가.’
물론 연두만을 칭하는 게 아니었다.
연두와 유리, 그리고 배경까지 모두 합쳐서 하나의 그림이었다.
갑자기 궁금하네.
유리가 이 그림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허락 안 해 주는 거 아니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어쩌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버럭 화를 낼지도 모르지.
뭐, 괜찮았다.
‘소장하기에도 충분히 가치가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태블릿을 품에 안은 채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지나갔다.
비행기 내에서의 하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