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17)
517화. 현재
혼비백산 그 자체였다.
뒤로 자빠진 레나와 하얗게 질린 아이들의 표정.
유리는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다행히 그 전에 비밀장소 내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 레나?”
“하, 할아버지?”
서재 안에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레나의 할아버지 파비안이었다.
놀랄 만도 했다.
비밀 장소 속에 켜진 건 촛불 하나였고 백발의 노인이 책을 들고 앉아있으니.
아무리 할아버지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지.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니, 레나?”
그의 입장에서도 책을 읽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정신을 차린 레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호오, 그러니까 탐험을 나왔다고?”
“응.”
“엄마 아빠 몰래?”
“네.”
“그렇구나. 우선 다들 들어오렴.”
혼을 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들 들어오라 하는 거라고.
허나 쭈뼛대며 앉은 아이들을 향해 파비안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으하하하!”
호탕하게 한 번 웃고는 말했다.
“역시 혈기왕성하구나!”
그럴 만도 했다.
파비안에게 아이들의 이런 사소한 일탈은 별 문젯거리가 아니었으니까.
때마침 심심하기도 했고.
그 반응에 안심한 레나가 역으로 물었다.
“할아버지는?”
“응?
“할아버지는 왜 내 비밀장소에 있었어?”
“잠이 안 와서 책을 읽고 있었단다. 레나가 한국에 간 뒤로 레나가 보고 싶을 때마다 여기 들어오곤 했거든.”
그러다 습관이 됐다는 모양이다.
확실히 그랬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는 이 작은 방에서 책을 읽어주곤 했다.
자연히 이곳은 레나의 비밀장소가 되었고.
무언가 발견한 듯 연두가 말했다.
“레나 사진이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의 레나의 사진이었다.
절로 번지는 미소.
“진짜 귀엽다……”
“응.”
시은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사진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레나의 흔적이 숨어있었다.
보고 싶을 때마다 이곳에 왔다는 말에 레나는 감동한 듯 할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았다.
“기억나니, 레나?”
“응?”
“여기서 할아버지가 책 읽어줬던 거. 그럼 레나가 금방 잠이 들었는데.”
“기억나.”
“어때. 그때처럼 또 책을 읽어줄까?”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는 덧붙였다.
“너희들도 같이 듣지 않겠니?”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이 공간은 이야기를 듣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었으니까.
촛불 하나.
그 은은한 빛이 가득 채우는 공간 속에서 파비안은 책을 하나 꺼내 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빨강머리 앤.”
독일은 유명한 동화가 많았다.
브레멘 음악대부터 시작해서 신데렐라, 백설공주, 헨젤과 그레텔 등등.
하지만 레나는 독일의 동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 무서워.’
대체로 독일의 동화는 잔혹한 이야기를 조금씩 담고 있었다.
레나는 그게 싫었다.
전부 읽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스해지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빨강머리 앤.
다른 동화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동화였지만 결이 달랐다.
따뜻한 이야기였다.
특히나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듣는 빨강머리 앤은 언제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그래서 레나는 무척 좋아했다.
이 이야기를.
그리고 그걸 파비안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 동화를 읽어본 친구 있니?”
물음을 전달하는 레나의 말에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아이들.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잘 들어보렴.”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됐다.
파비안이 한 줄을 읽으면 레나가 한국말로 번역하는 구조였다.
한국어 버전으로도 수없이 읽은 책이었기에, 단순 번역이 아닌 정확한 문장을 레나는 읽을 수 있었다.
금방 아이들은 이야기에 몰입했다.
특히나 연두의 마음을 울리는 대사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등장했다.
“이제부터 발견할 일이 잔뜩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니까요. 뭐든지 미리 알고 있다면 시시하지 않겠어요? 그럼 상상할 수 없잖아요.”
연두의 생각을 대변하는 거 같았다.
매일이 즐거웠으니까.
몰랐던 것들을 아빠와 하나둘 경험하고,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을 상상하는 건.
또 빨강머리 앤은 이야기했다.
“저는 행복해지는 비결을 알아냈어요.”
연두는 귀를 기울였다.
지금껏 읽은 동화에 비하면 심오한 내용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몰입이 잘 됐다.
연두는 앤이 자신과 꽤 닮았다고 생각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는 거.’
그게 연두가 생각하는 행복이었다.
더 구체화한다면 그 대상은 아빠였고, 범위를 더 넓히면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연두는 행복을 그렇게 정의했다.
따라서 궁금했다.
빨강머리 앤이 알아냈다는 행복해지는 방법은 어떤 것일지.
“그건 바로.. 현재를 사는 거에요.”
다소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현재를 사는 거?
그 의미를 아직은 알기 힘들었다.
그런 연두의 귀에 행복에 가득 한 듯한 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레나의 목소리였지만 적어도 지금의 연두에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앤이었다.
“과거에 묶여서 평생을 후회하고 아파하며 산다거나 미래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최고의 행복을 찾아내는 거죠.”
쿵.
두근거리는 심장.
동시에 연두는 깨달았다. 아직 과거로 인해 아파하고 있었다는 걸.
가끔은 나쁜 꿈을 꾸기도 했다.
‘.. 싫어.’
이제는 싫었다.
앤처럼 더는 과거를 떠올리며 아파하고 싶지 않았다.
연두는 결심했다.
지금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행복해지겠다고.
***
“…?”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나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연두가 없었다.
아니, 연두만이 아니다.
‘시은이도 없잖아.’
정신이 혼미했다.
분명히 어제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바로 몸을 일으켰다.
별일 없을 거라 생각은 하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복도에서 마주쳤다.
“유리가 없어요!”
하얗게 질린 얼굴의 은주아를.
“.. 유리도 없다고요?”
“네. 설마……”
허겁지겁 1층으로 내려가니 마주친 건 하파엘이었다.
표정을 보고 직감했다.
레나 역시 예외는 아니라는 걸.
“레나가 업서졌습니다!”
이쯤 되니 진짜 심각해졌다.
아이들이 한 번에 사라지다니.
심지어 집주인이나 다름없는 하파엘도 이렇게 당황하는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집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
그러다 발견했다.
“혹시나 했더니……”
이런 장소가 있었다니.
무언가 떠오른 듯 앞장서는 하파엘을 따라가니 나온 방이었다.
문을 여니 아이들이 잠들어 있었다.
“휴..”
일차적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두 번째로는 의문이었다.
어떻게 한 명도 빠짐없이 여기서 자고 있는 거지?
의자에 앉아있던 파비안의 말을 듣고서야 그 의문이 풀렸다.
“.. 탐험이요?”
생각지도 못했다.
누군가 데려간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제 발로 걸어 나갔을 줄이야.
마침 할아버지가 책을 읽고 있었고 아이들은 이곳에서 잠든 모양이었다.
‘간 떨어질 뻔했잖아.’
탐험이 집 내부였기에 망정이지.
새삼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집 안에 있었는데도 이 정도로 찾아 헤맸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깨어났다.
“.. 아빠?”
이번에는 따끔하게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혼나야겠어, 연두.”
“왜여..?”
“아빠한테 말도 없이 나가면 어떡해. 없어진 줄 알고 걱정했잖아. 시은이도 그렇고.”
“잘못했어요…”
시은이도 면목이 없다는 표정이다.
뭐, 어쩔 수 없지.
밖에 나간 것도 아니니 잘못을 인정하는데도 혼을 낼 정도의 일은 아니다.
그런 나를 향해 연두는 말했다.
“그래도.. 알았어요.”
“응?”
“진짜로 행복해지는 방법이요.”
생긋 웃으며 덧붙인다.
“그러니까.. 연두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어요!”
아무래도 탐험을 통해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얻은 모양이었다.
***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노부부의 배웅을 받고 집을 나섰다.
드디어 출발이었다.
휘파람을 불며 운전을 시작한 하파엘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베를린에 갑니다!”
의외로 쿨하게 대답해준다.
베를린.
사실 독일의 수도라는 것 이외에는 그다지 정보가 없는 도시였다.
다른 도시도 매한가지이긴 하지만.
‘그나마 아는 건 현대미술로 유명하다는 것 정도인가.’
쿨한 도시 베를린.
현대미술과 디자인의 중심지로 각국의 예술가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그런 얘기를 전해들은 것도 벌써 10년은 흘렀다.
‘고등학교 때니까.’
10년은 뭐든 바뀌기 충분한 시간이다.
나만 해도 그사이에 몇 번의 격변이 있었으니 말이다.
베를린도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는 얘기였다.
“집에서 조금 멀긴 한데 베를린은 가야 해요. 독일에 오면 꼭 보고 가야 할 게 있으니까요.”
“그게 뭔데요?”
“베를린 장벽이요.”
바로 납득이 갔다.
베를린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게 바로 베를린 장벽이었으니까.
그런 와중 눈에 들어왔다.
왜인지 씰룩씰룩 움직이는 유리의 입꼬리가.
‘뭘 말하고 싶은 거 같은데.’
입이 간질거리는 표정이다.
아니나 다를까.
하파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지. 고르바초프 씨, 이 문을 여시오! 이 장벽을 허무시오!”
이제 보니 베를린 장벽에 대해 알고 있던 게 있었던 모양이다.
충분히 공감이 갔다.
우연히 나온 이야기에 이런 디테일을 알고 있다면 안 말하고는 못 배기는 게 사람이니까.
‘귀엽네.’
동시에 놀라웠다.
여덟 살 아이의 입에서 미국 대통령 이름이 나올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멘트까지 기억해서 이야기하다니.
바로 반박을 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아닌데.”
다름 아닌 레나였다.
“뭐?”
“부시 대통령 아니라고. 그 말 한 사람.”
“맞거든!”
“부시가 아니라 레이건 대통령이야.”
얘네 진짜 뭐지.
이 타이밍에 양심고백을 하겠다.
부시는 들어본 적은 있지만 레이건은 전혀 모른다.
생각해 보니 레나는 납득이 갔다.
‘독일 사람이니까.’
관련 일화에 대해 알고 있다고 봐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마저도 나이를 고려하면 대단하긴 하지만.
여하튼 불이 붙은 두 아이.
“맞거든!”
“아니거든!”
“맞다니까!”
“아니라니까!”
끝이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이 논쟁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팩트 체크.
‘잔인하긴 하지만.’
굳이 초록창에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곤란한 듯이 하파엘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저기, 유리야?”
“네?”
“한쪽 편을 드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렴. 그 말을 한 건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맞단다.”
“…”
충격받은 표정.
그래도 인정 못 하겠다는 듯이 유리는 엄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몇 초간 화면을 응시하더니 뱉은 말.
“흥!”
그 반응에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지 마세요!”
“하하, 미안. 근데 유리를 비웃은 건 아니야.”
“그, 그럼 뭔데요!”
“귀여워서 웃은 거야.”
진심이었다.
팩트 체크를 당한 뒤 보인 반응이 귀엽다고 생각해서 나온 웃음이었다.
들려오지 않는 대답.
왜인지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유리를 향해 덧붙였다.
“그리고 비웃기는커녕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 네?”
“이제 여덟 살인데 그런 것까지 아는 거 보면.”
옆에서 연두가 맞장구쳤다.
“맞아! 연두는 하나도 몰라!”
“푸흣.”
너무 솔직한 연두의 자기객관화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유리는 홱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다, 당연한 거죠!”
“…”
그렇구나.
나는 당연하지 않은 거구나.
왜인지 씁쓸해지는 기분 속에 자동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자동차가 멈춘 건.
“도착이에요!”
“내리면 되나요?”
“네.”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내리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구조물을 보고.
‘이게.. 베를린 장벽?’
생각 이상으로 웅장한 구조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