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26)
526화. 시한폭탄
사건의 발단은 간단했다.
주원이 떠난 후 아이들만 남게 된 연습실.
바로 연습이 시작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오늘도 아니고 방금 막 안면을 튼 금발의 남자아이가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눈치싸움을 하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노엘.”
결국 입을 연 건 레나였다.
고개를 살짝 돌리는 노엘을 향해 레나는 물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던 거야?”
보면 모르냐는 듯, 노엘은 짧게 답했다.
“연습.”
“그건 알아. 근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선생님이 부르셨어.”
꼴깍.
연두는 침을 삼켰다.
무슨 대화인지는 1도 알 수 없었지만 왜인지 집중해야 할 거 같은 분위기였다.
둘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할머니가?”
“응. 여기서 연습하고 있으라고 하셨어. 그리고 너희가 왔고.”
“그렇구나.”
더 설명할 것도 없었다. 노엘은 지시에 따라 연습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연습할 줄 몰랐나?
그렇게 생각하며 레나는 노엘을 향해 말했다.
“우리 그럼 연습한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마음대로.”
“…”
레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레나는 노엘이 초면이 아니었다.
꽤나 오래전부터 알게 된 사이니까.
‘달라진 게 없네.’
오랜만에 보는 건데도 노엘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특히나 저 말투.
딱히 민유리처럼 신경을 긁는 말투도 아니고, 묻는 말에 대답 자체는 성실하게 한다.
단지 대화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 뿐.
무언가에 빗대자면 마치 로봇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할까.
‘피아노만 있으면 다른 사람이 되지만.’
괜히 할머니의 제자가 아니었다.
노엘은 실력에 있어서는 또래 중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그럼에도 환상의 짝꿍 후보에서 제외한 이유가 있었다.
‘대화가 안 돼.’
노엘과는 오래 대화를 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뛰어난 피아니스트라도 소통이 어렵다면 환상의 짝꿍이 될 수 없었다.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노엘이 남자라는 점이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레나가 생각하는 환상의 짝꿍은 부모님이었다.
이은경과 하파엘.
눈여겨봐야 할 점은 두 사람이 음악적 교감을 넘어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다.
단순한 레나의 논리구조였다.
남녀가 환상의 짝꿍이 되면 결혼을 해야 하는구나 하고.
레나는 아직 신부가 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
‘노엘은 내 스타일이 아니야.’
잘생기긴 했다.
그냥도 아니고 아주 많이.
가끔 감탄이 나올 때도 있었지만, 노엘은 레나의 스타일에 부합하지 않았다.
이유가 뭐냐고?
‘다정하지 않아.’
언젠가 엄마 아빠처럼 결혼하게 된다면 어떤 사람과 결혼하게 될까.
레나의 이상형은 확고했다.
까다로운 조건이 있는 건 아니었다.
크게 말하면 단 두 가지.
그중 첫째가 다정함이었다.
벌써 노엘은 탈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노엘의 말투는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두 번째도 비슷했다.
외모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다정함을 포기하고서라도 노엘에게 반해버리고 말았을 거다.
두 번째 조건은 바로 ‘웃는 게 예쁜 사람’이었다.
외모에 속하는 조건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웃는 게 예쁜 사람.
더 정확히는 웃는 걸 보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노엘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노엘의 웃는 모습을 본 적 없으니까.
웃는 얼굴을 본 적 없으니 판단도 불가능하다.
종합하자면, 다정하고 웃는 게 예쁜 사람.
그런 사람을 레나는 한 명 알고 있었다.
누군지는 비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미래의 남편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었다.
그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좋았다.
따라서 상관없었다.
‘.. 찾았으니까.’
이제는 찾았다.
함께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벅차오르는 환상의 짝꿍을.
그건 다름 아닌 연두였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노엘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그리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
노엘이 그런 것처럼 레나도 사무적인 말투로 대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일도 거의 없었다.
비즈니스 관계.
여덟 살 사이에 쓰기에는 표현이 우습긴 하지만 딱 그 정도의 관계였다.
그렇게 대화를 멈춘 둘.
레나가 자리를 잡으며 이야기했다.
“연습해도 상관없대. 그러니까 노엘은 신경 안 서도 돼!”
“.. 정말?”
“응.”
각각 다른 반응이었다.
연두는 안도하는 표정이고 유리는 괜히 툴툴대듯 뭐라 구시렁거렸다.
아까의 언쟁으로 인한 앙금이 아직 남아있는 유리였다.
“…”
시은이도 마냥 태연하지는 못했다.
늘 그렇듯 초면인 사람 앞에서 노래한다는 것 자체가 낯 뜨거운 일이었으니까.
그 긴장감을 시은이는 특유의 목풀기로 승화했다.
푸르르르.
쿡쿡 웃는 연두와 레나.
그런 와중에도 노엘은 미동조차 없다.
그렇게 어딘가 묘한 분위기 속에서, 단비음악대와 유리의 연습이 시작됐다.
***
연습은 순탄치 않았다.
괜히 첫 연습이 끝나고 났을 때 연두와 시은이의 표정이 어두웠던 게 아니었다.
처진 목소리로 레나는 말했다.
“.. 다시 해 보자.”
“으응.”
사실 다들 느끼고 있었다.
마치 고장 난 톱니바퀴처럼 어딘가 어긋나고 있다는 건.
좀처럼 나가지 못하는 진도. 몇 번이고 같은 곡의 어정쩡한 연습이 반복됐다.
이대로라면 버스킹은 불가능하다.
퀄리티는 물론이고, 소피아의 허락을 받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점점 침체되는 분위기.
따분한 표정으로 유리는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다시 연습이 시작됐다.
또 불협화음이 연습실 내에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딴. 따란.
전혀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들었다.
모두 당황해서 연주를 멈췄다.
그 속에서 노엘의 손끝이 내는 선율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레나도 흠칫했다.
‘.. 뭐지?’
노엘답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연습에 훼방을 놓는 건.
친절한 편은 아니긴 했지만, 대놓고 시비를 거는 타입 역시 아니었으니까.
“뭐 하는 거야, 노엘?”
“연습.”
아까와 같은 대답이지만 왜인지 다른 느낌이었다.
독일어로 레나는 재차 물었다.
“연습을 한다고?”
“응.”
“계속 가만히 있다가 이렇게 갑자기? 지금 너는 꼭 우리 연습을 방해하려는 거 같아.”
“맞아.”
“.. 뭐?”
“방해하는 거 맞아.”
레나는 귀를 의심했다.
너무 태연히 인정하는 노엘의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속에서 들려왔다.
차가우면서도 비수같이 날아와 박히는 노엘의 목소리가.
“들어주기 힘들었거든. 너희가 내는 소리.”
툭.
건반에서 손을 뗀 노엘은 건조하게 한 마디를 더 뱉었다.
“음악이 아닌 공해는 적당히 해 줬으면 좋겠는데.”
“..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심한 건 너희 연주고.”
처음이었다.
노엘과 이런 식으로 날 선 대화를 주고받는 건.
그런데 반박할 수 없었다. 분명히 연주를 방해받은 입장인데 화를 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틀린 말이 없었으니까.
‘전부 맞아.’
레나도 알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결코 할머니의 기준을 통과할 수 없을 거라는 걸.
“특히 너.”
노엘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허공에 뻗은 손가락은 유리를 가리켰다.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할 거면 가능한 한 빨리 빠지는 게 이로울 거 같은데.”
“…?”
마이웨이였다.
상대가 알아들을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노엘은 일방통행을 계속했다.
애초에 딱히 전하려고 하는 말도 아닌 듯했다.
“얘네는 네 연주를 위한 도구가 아니야. 너는 주인공이 아니고.”
핵심을 관통하는 말이었다.
팀 연습에 있어서 유리는 협조적이라기보다는 이기적이었다.
실력이 아닌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야, 이레나.”
“.. 응.”
“얘 나 보고 뭐라는 거야?”
레나는 고민했다.
노엘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러나 곧 마음을 정했다.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어떻게든 버스킹을 하고 싶었다.
눈에 보이는 문제점을 외면하고서라도 무대를 하고 싶었다.
허나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런 연주로 제대로 된 버스킹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전에 할머니의 기준 안에 들 수 없었다.
“야! 얘가 뭐라고 한 거냐고!”
“…”
결국 레나는 마음을 정했다.
이윽고 들려오는 이야기에 유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날카롭게 노엘을 바라보며 유리는 입을 뗐다.
“너.. 너 말 다 했어?”
그 말에 답한 건 레나였다.
“노엘만의 생각이 아니야.”
“..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이대로면 우리는 버스킹 못 해, 절대로.”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분위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연두와 시은이도 상황을 파악한 상태였으니까.
“.. 하.”
숨을 뱉으며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연두였다.
“.. 너도야?”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유, 유리야…”
부정이 아니었다.
실은 유리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연습에 진심으로 임하지 않았다는 걸.
습관처럼 엇박자를 탔다.
“그래, 어디 잘해 봐. 방해되는 나 같은 거 빼고 한번 잘해 보라고.”
또 한 번 방어기제가 발동됐다.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공격적으로 표출된 거다.
그렇게 유리는 문을 향해 달려갔다.
쾅!
언젠가는 폭발했을 시한폭탄이 터진 연습실이었다.
***
유리는 달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복도를 따라 하염없이 달렸다.
머릿속에 스치는 장면들.
숨이 턱 막혔던 노엘의 말과 어쩔 줄 몰라 하는 연두의 표정, 그리고 마지막에 마주친 아저씨의 모습까지.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아까 시장에 있을 때만 해도 즐거웠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이런 걸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털썩.
한참이나 달린 끝에 유리는 주저앉았다.
눈물이 떨어졌다.
혼자 엇박자를 탄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유독 괴로웠다.
주저앉은 채로 손을 위로 올렸다.
스윽.
아직 꽂혀있는 나비 모양의 머리핀이 만져진다.
마음이 이상하다.
콩쿠르 때와는 달랐다.
‘.. 아파.’
심장이 아렸다.
잘못한 건 매한가지인데 왜 이렇게 아픈 기분이 드는 걸까.
돌아가기가 무서웠다.
다시 아저씨의, 애들의, 연두의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고개를 더욱 깊숙이 파묻었다.
도망이었다.
연습실에서 도망쳐왔고, 지금도 유리는 계속해서 도망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스윽.
인기척이었다.
흠칫 어깨를 들썩인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익숙한 시선과.
***
뒤늦게 달려 나온 연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다.
예상과는 달랐다.
레나와 싸운 게 아닐까 했는데, 유리와 노엘 사이에 마찰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결과 유리가 연습실을 뛰쳐나간 거고.
“연두 아버님~”
아무것도 모르는 하파엘이 가까이 다가왔다.
“준비 끝났는데……”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윽고 이야기를 들은 하파엘은 난처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렇군요. 유리랑 노엘이 다퉜다는 거죠?”
“네.”
“그럼 유리를 찾아야겠네요.”
그 말대로였다.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같이 찾아요.”
“아뇨, 아이들 데리고 있어 주세요. 제가 데려올게요.”
자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다 유리를 찾겠다고 나섰다가는 상황이 더 복잡해질 수 있었으니까.
“.. 아빠. 연두도 같이 찾을래요.”
“연두야.”
나는 미소를 띠며 얘기했다.
“이번에는 아빠한테 맡겨줘. 유리 꼭 데리고 올 테니까.”
다행히 더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표정에서 불안감이 묻어나긴 했지만.
그걸 없애주는 건 내 몫이었다.
“알겠습니다. 데리고 있을게요!”
“네.”
나는 발길을 돌렸다. 유리는 어디로 갔을까.
콩쿠르 때를 생각하면 그렇게 멀리 갔을 거 같지는 않았다.
어딘가에 주저앉아 있지 않을까.
그 예상은 적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주저앉아 있는 유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나 고개를 파묻고 있다.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유리를 부르려는 참이었다.
‘.. 어?’
그림자가 드리웠다.
자연히 나는 입을 다물고 동작을 멈췄다.
주저앉은 유리의 앞에 선 사람, 누군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은주아.
유리의 엄마였다.
아까는 안 보였는데 어떻게 알고 온 거지.
혹시 듣고 있었던 건가?
‘차라리 다행이야.’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나보다는 엄마가 이야기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 터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틀림없이 은주아는 딸을 좋게 타이를 거라고.
스윽.
고개를 드는 유리가 보인다.
그걸로 충분하다.
딱히 내가 있을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기에 걸음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연두가 아니라서 실망했니?”
생각지 못한 물음.
그 뒤에는 이어졌다.
발걸음을 멈추고 듣게 만드는 딸을 향한 은주아의 이야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