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28)
528화. 캠프파이어
“.. 미안.”
누구도 예상 못 한 전개였다.
레나는 더더욱 그랬다.
좋은 인연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지만, 민유리를 오래 봐 온 입장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단어가 ‘사과’였으니까.
민유리가 사과를?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눈이 휘둥그레지기엔 충분했다.
“.. 뭐라고?”
도무지 믿기지 않아 한 번 더 물었다.
유리는 찡그리며 답했다.
“.. 들었잖아.”
확실히 듣긴 했다.
귀가 아니라 마음에서 혼동이 올 뿐.
선명히 들렸는데도 잘못 들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리의 사과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다시 한 번 들으면 확실해질 거 같았다.
“잘 못 들었서.”
“…… 다고.”
“뭐?”
“아, 미안하다고!! 됐냐?”
귀청이 떨어질 만한 소리.
사과하는 어조가 아니긴 했지만 그 덕에 확신할 수 있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는 걸.
‘.. 맙소사.’
정말 민유리가 사과를 한 거라니.
천재지변과도 같은 일이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천재지변과 달리 언젠가는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조차 한 적 없으니.
방금만 해도 민유리가 오면 매섭게 쏘아붙일 생각이었다.
왜 그렇게 제멋대로냐고.
“후흣.”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그런 레나의 모습에 유리는 화끈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 웃지 마라.”
“흣.”
“웃지 마라고.”
“프흣.”
“아, 진짜! 웃지 말라고!”
고의는 아니었다.
자꾸만 비집고 들어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쉬운 건 하나였다.
‘녹음을 했어야 하는데.’
그랬다면 기분이 안 좋아질 때마다 두고두고 들었을 텐데.
민유리의 사과.
결국 레나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미뉴리.”
“뭐.”
“한 번 더 해 주면 안 돼?”
“또 왜!”
“녹음해서 들으려구.”
그 당당함에 유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미쳤냐! 안 해!”
그렇게 마냥 해맑은 레나의 옆에는 하파엘이 누군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유리가 아니었다.
하파엘의 시선은 그 옆에 서 있는 이주원을 향하고 있었다.
‘연두 아버님…’
눈빛에는 왠지 모를 경의가 담겨있다.
‘.. 어떤 싸움을 하고 오신 겁니까.’
그렇다.
하파엘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이 문제를 이주원이 해결한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유리가 사과를 한 것도 그의 영향이라고.
물론 은주아는 좋은 부모이긴 하지만, 완고한 유리의 태도를 바꿀 수 있을 만한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럼 주원이라 확신하는 건 무슨 근거냐고?
‘눈에 보이니까.’
계속 지켜봤다.
비행기에서 혼자 떨어져서 탔을 때부터 쭉 관찰한 결과 알게 된 한 가지 사실.
유리는 주원씨를 좋아한다.
얼핏 보면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묻어나는 감정은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싫은 사람과는 말도 섞지 않을 유리니까.
‘.. 신기하단 말이지.’
하파엘이 생각하는 이주원.
장점이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대놓고 친절한 타입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특히나 아이들을 대할 때는 자주 어리숙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소위 말하는 ‘멘붕’ 상태라고 해야 하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어느 순간부터 눈에 보였다.
아이들이 그를 좋아하는 게.
딸인 연두는 물론이고 처음부터 느꼈던 시은이, 그리고 자신의 딸인 레나까지.
‘레나는 쉽게 마음을 주는 아이가 아니야.’
부모인 그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해맑은 모습에 오해할 수 있지만, 레나가 진심으로 마음을 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정 누군가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고.
그 대상을 지금 꼽으라면 가족을 제외하고 연두와 시은이, 줄리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 그리고 주원씨.’
그게 신기했다.
딱히 호감을 얻으려는 행동도 없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게.
이제는 우연이라 치부할 수 없었다.
비유가 적절치는 않지만 게임으로 치면 최종 보스인 유리마저 공략(?)당한 상태였으니까.
공략 조건이 뭐냐고?
‘생각할 것도 없지, 그건.’
유리가 사과를 했다.
아무리 일방적으로 잘못했다고 해도 사과는커녕 독기에 차서 더욱 가시를 드러내던 유리였다.
심지어 오늘은 그런 경우도 아니었다.
명백히 유리의 잘못이긴 했지만, 한국 표현으로 선빵을 친 건 노엘 아닌가.
‘그것도 강뻔치였고.’
강뻔치.
스트롱 펀치라는 뜻으로 최근에 한국에서 배운 말이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유리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억울할 법도 한 상황이라는 거다.
그런데도 먼저 사과해 왔다.
‘알려주세요, 주원씨!’
주원을 바라보는 하파엘의 눈이 점점 반짝였다.
알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비결을.
그 비결을 알아내서 딸인 레나에게 더욱더 사랑받고 싶은 하파엘의 순수한 학구열이었다.
한편 뒤늦게 그 부담스러운 눈빛을 마주한 주원.
‘.. 뭐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저 눈빛은 뭐란 말인가.
반응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모른 척 무시하기에는 너무 강렬하고.
고민하는 찰나에 들려오는 목소리.
“아주 칭찬해!”
다시 돌아보니 어느새 하파엘의 시선은 유리를 향하고 있었다.
언제 자신을 쳐다봤냐는 듯.
그보다 방금 들은 멘트는 분명히 아는 형아 강호등의 유행어인데.
“용기를 냈군요, 우리 유리!”
“.. 네?”
“사과하는 것도 커다란 용기니까요. 용기를 내서 한 발자국을 뻗은 유리가 아저씨는 자랑스러워요! 진심으로!”
어색한 한국말.
그러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주원씨의 영향이 클지 몰라도, 결국 사과를 결심하고 용기를 내 한 발자국 내디딘 건 유리였으니까.
그 용기있는 행동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이렇게 한 발자국씩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돌아봤을 때 놀라울 정도로 많은 걸음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니.
그런 하파엘의 말에 주원도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그래, 유리야. 아저씨도 자랑스럽다.”
괜히 유리는 삐죽거리며 볼멘소리를 뱉었다.
하파엘은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유리가 아닌 아이들 쪽이었다.
“어때요? 그럼 유리의 사과, 다들 받아줄 건가요?”
가장 먼저 대답한 건 레나였다.
“응! 특별히 받아줄께!”
어깨를 으쓱한다.
이미 민유리한테 사과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거 같은 레나였으니까.
가만히 넘어갈 유리가 아니긴 했지만.
“야! 누가 받아달래?”
“풋. 사과는 받아달라고 하는 거거든, 바보야?”
“나는 아니야!!”
뭐, 이 정도는 애교였다.
“자, 시은이는?”
다음 순번은 시은이.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저도요.”
이번에도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의 유리였지만 트집을 잡지는 못했다.
다음은 대망의 연두 차례.
지금까지와는 달리 유리도 긴장한 듯 침을 꼴깍 삼켰다.
말없이 연두는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포옥.
그러고선 냅다 양팔을 뻗어 유리를 끌어안았다.
“.. 유리야.”
커지는 유리의 동공.
고양이처럼 몇 번이나 수축했다 팽창했다를 반복했다.
이윽고 귓가에 들려오는 말.
“돌아와줘서 고마워. 그리고.. 용기 내 줘서. 헤헤.”
앞선 하파엘과 주원의 말을 인용한 듯한 말이었다.
잠시 후, 떨어지는 연두.
그 얼굴에는 세상 맑고 따뜻한, 때 묻지 않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얼마간 유리를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
이 미소였다.
지금 용기를 내지 않으면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미소.
그 미소가 또 한 번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리는 말했다.
“.. 딱히, 용기는 무슨.”
끝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자연히 모두의 시선은 마지막에 있는 노엘을 향했다.
비록 그 흐름이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나, 나 너한테는 사과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기대하지 말라구!”
안타깝게도 노엘로서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딱히 관심도 없어보이고.
상관없다는 듯, 유리는 열변을 토하긴 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끝이 났다.
처음으로 유리가 앞을 향해, 연두를 향해 한 발자국 내디딘 순간이.
***
“좋아! 화해도 했으니 이제 가 볼까요?”
이후 하파엘이 데려간 곳.
그가 준비한 건 식사일 거라 어림짐작하고 있었는데 예상을 빗나갔다.
아니, 아예 빗나갔다고 하기도 뭐하긴 한데.
‘.. 캠프파이어라니.’
언제 이걸 준비한 거지?
산과 맞닿은 성, 아니 저택의 뒤쪽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공터가 있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원통형의 검은색 화로 속에, 숯에 불을 붙인 건지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이런 장소도 있을 줄이야.’
하기야 없는 게 없는 집이긴 했다.
그래도 집 밖에 이런 숨겨진 장소가 있을 줄은 몰랐다.
한쪽에 우뚝 서 있는 커다란 나무 밑에는 나무로 만든 흔들그네도 있다.
자연히 벌어지는 연두의 입.
“우아..”
그럴 만도 했다.
감탄사 없이 보기에는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장면이었으니까.
그리고 화로 앞에는 선객이 있었다.
“어서 오게.”
백발의 노인.
하파엘의 아버지 파비안이었다.
자연스레 하파엘이 물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별로.”
“어머니는요?”
“곧 나올 거다. 다들 앉으라고 해라.”
점점 레나의 통역실력이 늘어간다.
기능이 추가됐다.
처음에는 단순히 통역을 할 뿐이었는데, 이제는 억양부터 목소리까지 흉내낸다.
연기력이 가미돼서인지 더 귀에 쏙쏙 들어온다.
“고마워, 레나야.”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며시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레나를 향해 덧붙였다.
“다행이다.”
“뭐가요?”
“엄청 답답했을 거 같거든. 레나가 없었으면.”
진심이었다.
하파엘이 가이드 역할을 해 주긴 해도 모든 말을 전달해줄 수는 없으니.
사소한 얘기까지 전해주는 레나의 존재가 크게 느껴졌다.
“헤헷.”
내 말에 뿌듯해진 건지 생긋 웃음짓는다.
역시 궁금하단 말이지.
시장에서 케밥집에 데려가기 전, 레나가 줄리에게 한 말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한 거냐고 물어보니 비밀이라고 했지.
비밀.
마법의 단어다.
그 단어만큼 사람을 궁금해 미치게 만드는 게 없으니까.
아무런 관심 없더라도 비밀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으면 궁금해지는 게 사람 마음 아닌가.
괜히 연두한테 미안해졌다.
평소에 시도 때도 없이 그 단어를 남발한 걸 생각하니.
‘말해줄 거 같지는 않아.’
정공법이 통할 거 같지는 않다.
그럼 물어봐야지.
레나는 몰라도 줄리는 물어보면 알려줄 거 같으니까.
‘후후.. 비밀 딱 대!’
생각해 보면 우스웠다.
스물여덟 먹고서 여덟 살 아이가 말한 비밀을 알아낼 생각에 이렇게 설레하고 있다는 게.
이런 걸 보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애어른인 모양이다.
뭐, 그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연두 아버님, 유리 어머님, 얘들아.”
하파엘이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앉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날씨는 서늘했다.
한국으로 치면 가을 정도인데 시간이 늦어서 좀 더 바람이 차가운 느낌이었다.
화로 앞에 앉으니 사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후아…”
가만 보면 연두는 이런 감탄사로 모든 걸 표현하는 거 같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안 추워, 연두야?”
“네에.”
손바닥을 펴서 화로 가까이에 댄 채로 연두는 덧붙였다.
“난로 앞에 있으니까 진짜 따뜻해여….”
“하하, 난로?”
“아니에요, 난로..?”
“정확히 말하면 화로이긴 한데, 지금은 우리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니까 난로라고 할 수도 있지.”
“화로…”
이렇게 모여앉으니 정말 캠프파이어 분위기가 물씬 난다.
뭔가 허전한 거 같긴 한데.
정체를 몰랐던 그 허전함은 곧이어 나타난 소피아의 등장에 한 번에 불식됐다.
그녀의 손에는 가득 들려있었다.
‘고기, 감자, 고구마……’
캠프파이어 하면 빠질 수 없는 음식들이었다.
보고만 있는 건 예의가 아니다.
벌떡 일어나서 나는 그녀에게 달려가 손에 든 것들을 건네받았다.
“고마워요.”
“뭘요. 더 가져올 건 없나요?”
“네. 다른 건 그이가 다 준비해 뒀거든요.”
커다란 박스가 놓여있던데 그게 파비안이 준비해 둔 건가.
이거 너무 죄송한데.
실례라는 생각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
‘어쩔 뻔했어.’
이런 준비를 해 주셨는데.
만약 유리가 토라진 채로 분위기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호흡곤란이 왔을지도 몰라.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봉투 안을 바라보는데,
‘.. 어?’
착시라는 생각이 들 만큼 유독 빛이 나는 녀석들이 봉투 속에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하파엘이 연두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연두가 좋아하는 소시지는 나중에 진짜 맛있게 먹자.’
‘진짜 맛있게요..?’
‘응, 진짜 맛있게.’
절로 번지는 미소.
그 말의 의미를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파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