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32)
532화. 화음
어느새 독일에서의 시간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단순히 귀국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버스킹.
그게 마지막 일정이었다.
버스킹이 성사된다면 일정을 소화하고 그다음 날에 출국할 예정이었다.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겠지.
소피아에게 허락을 받지 못하면 어떡하냐고?
그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이쯤 되면 한 가지 의문이 들지 모른다.
어른도 아니고 아이들인데, 연주 퀄리티와 별개로 대충 즐기자는 마음으로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허나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버스킹을 제안하면서 소피아가 했던 말이 그 근거였다.
‘의외로 독일의 거리는 냉정하니까.’
거리는 냉정하다.
그 의미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멈춰 서서 지켜볼 사람도 꽤나 있겠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 자리에 머물며 지켜볼 사람은 없을 터였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공연의 관객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버스킹도 공연이니까 말이다.
‘음악이어야 해.’
결국 음악이어야 했다.
사람들을 멈춰 세우고 지켜보게 만드는 건.
아마 소피아의 최종 심사는 그걸 충족시킬 최소한의 기준일 터였다.
처음에는 걱정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연습하는 과정은 몰라도 연습을 끝냈을 때 아이들의 표정을 봤으니까.
전과는 반대였다.
단순히 밝은 표정을 넘어 그 안에는 확신이 보였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넓은 저택의 미로 같은 구조에도 적응을 완료한 상태였다.
나도 연두도.
과장 조금 보태서 이제는 우리 집 같다.
‘.. 그랬으면 좋겠네.’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너무 갔잖아.
생각해 보니 그렇게 좋을 거 같지도 않다.
넓어도 너무 넓으니 연두를 찾으려면 집 안을 쭉 돌아야 할지도 모르고.
애당초 너무 오버스펙이다.
‘충분해.’
초록연두구역이면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더 좋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조금만 움직이면 연두를 볼 수 있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 함께 잠들 수 있는 침실이 있는 공간.
내게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더군다나 초록연두구역에는 수호신 역할을 맡고 있는 귀여운 누렁이도 있고.
‘.. 잘 있겠지?’
실은 알고 있었다.
세연씨가 매일같이 누렁이의 안부를 전해 주고 있으니까.
심지어 인증샷까지 찍어서 보내 가며.
‘고맙네.’
달리 부탁할 사람이 없었다.
집 근처에 살면서 누렁이를 챙겨줄 만한 사람은 그녀 말고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다행히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딸을 챙겨주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냐며.
그 덕에 나도 연두도 안심이었다.
“.. 아빠!”
나를 부르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연두가 생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네 타러 가요!”
“그럴까?”
저택 바깥에 있는 장소였다.
산과 마주하고 있는 캠프파이어를 했던 공터에 흔들그네가 있으니까.
가장 부러운 장소였다.
초록연두구역이 최고긴 하지만, 그런 마당이 있었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을 텐데.
빙긋 웃으며 연두와 함께 방을 나섰다.
“어, 줄리.”
그런 와중 마주쳤다.
캠프파이어 현장에서 무려 다섯 잔의 맥주를 해치웠던 줄리를.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띠며 인사해온다.
“안녕하세요..”
연두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참고로 나 역시 줄리와는 둘만의 연결고리가 존재했다.
얼마 전 마주쳤을 때였다.
‘갑자기 물어보는 게 조금 웃길 수 있는데……’
서론은 그 정도였다.
계속 물어보고 싶었던 거라 지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전에 레나가 케밥집 데려갔을 때 줄리가 했던 말이 뭔지 물어봐도 돼요?’
레나의 얼굴이 빨개졌던 그 말.
궁금해서 물어보지 않고는 못 배길 거 같았다.
줄리는 쿡쿡 웃으며 답했다.
‘많이 궁금하셨나 보네요.’
‘네.’
잴 것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 굳이 질문한 것부터 궁금증을 한껏 드러낸 셈이었으니까.
그것도 번역기까지 써 가며.
의외로 줄리는 쿨하게 답해줬다.
‘별거 아니에요. 레나가 케밥집에 데려가면서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던 거뿐이거든요.’
그 말은 간단했다.
레나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얼굴이 빨개졌다는 뜻이었다.
더욱 궁금해진 나를 향해 줄리는 말했다.
‘웃는 얼굴이 좋대요.’
‘네?’
‘그쪽이요.’
줄리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면서 케밥집으로 가자고 하더라구요. 아저씨는 맛있는 걸 먹을 때 진짜 행복하게 웃는다고.’
생각지도 못했다.
레나가 그런 말을 했을 거라고는.
케밥집에 데려간 것도 감동이었는데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니.
줄리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그래서 물어봤거든요. 레나한테.’
‘뭘요?’
‘케밥을 먹으면서 웃고 계시길래 슬쩍 물어봤죠. 저 웃음이 레나가 보고 싶었던 표정이냐고. 그러니까 수줍은지 대답 안 하더라구요.’
‘하하…’
내게는 꽤나 큰 반전이었다.
레나가 그런 말을 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으니까.
그런 나를 향해 줄리는 말했다.
‘그러니까 많이 웃어주세요. 레나가 저한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흔치 않거든요.’
거기까지가 나와 줄리가 나눈 대화였다.
나름 둘만의 대화였던 탓일까.
이렇게 복도에서 마주쳐도 왠지 모를 친밀감이 느껴진다.
“그럼 가 볼게요, 줄리.”
“네.”
웃으며 지나쳤다.
그렇게 연두의 손을 잡고 곧장 흔들그네가 있는 집 밖 공터로 향했다.
동시에 멈춘 발걸음.
툭.
그곳에서 또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
***
노엘은 공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집에서 연습실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었다.
그때였다.
인기척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온 건.
“.. 노엘?”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역시 그 아이였다.
아빠가 함께이긴 했지만.
“안녕, 노엘.”
인사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주원의 인사에 노엘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자 연두가 달려온다.
“노엘!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해맑은 표정.
그와 별개로 뭐라 말하는지는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노엘이란 단어 빼고는.
뒤따라온 남자가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서둘러 핸드폰을 꺼낸다.
이윽고 눈에 들어온 건 번역기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노엘?”
문법이 어색했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노엘은 대답했다.
“아무것도요.”
말 그대로였다.
이곳에서 노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기를 찾는 이유는, 아무 생각 안 하고 쉬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노엘의 말은 번역기를 통해 한국말로 번역됐다.
‘엄청 좋아하네.’
노엘은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좋은 뜻은 아니었다.
그저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에 하이파이브까지 하며 좋아하는 부녀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이번에는 연두가 번역기에 대고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심 심 하 지 않 아?”
주원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줄리와의 대화에서도 느낀 거지만 번역기 성능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파파고라는 이름값을 하는구먼.
“별로.”
단 두 글자.
그 단답에도 연두는 골똘히 고민한 뒤에 얘기했다.
“연 두 도 의 자 에 앉 아 도 돼?”
“마음대로.”
“고 마 워!”
자연히 셋이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딱히 상관은 없었다.
혼자가 익숙한 공간이긴 했지만, 딱히 누군가가 오는 것에 거부감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때부터 시작됐다.
옆에 앉은 연두의 엄청난 질문 공세와 잡담이.
대화에 있어서 노엘은 그리 협조적인 편이 아니었다.
질문에 답하는 법은 알았지만 역으로 질문하거나 깊은 이야기를 하는 등의 소통능력은 결여되어 있는 노엘이었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성향 탓에 피아노 스승인 소피아를 제외한 누구와도 그리 오랜 대화를 해 본 적 없으니.
‘.. 역시 신기하네.’
따라서 신기했다.
그런 무미건조한 자신의 반응에도 쉴 새 없이 떠들고 질문하는 이 애가.
심지어 지치는 기색도 없다.
생각해 보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눈.’
눈에는 많은 게 보인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향하는 수많은 눈을 보며 자연히 길러진 능력이 있었다.
노엘은 볼 수 있었다.
사람의 눈 속에 담긴 감정들을.
‘기쁨, 슬픔, 두려움, 놀람, 그리고… 동정.’
살면서 가장 많이 마주한 시선은 동정이었다.
또는 불쌍함, 안타까움.
처음 노엘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그런 표정을 짓곤 했다.
딱히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수없이 많이 봐서 익숙해진 것과 별개로 그 시선은 나쁜 게 아니었으니까.
다만, 이 애는 달랐다.
‘보이지 않았어.’
연습실에서 처음 봤을 때.
이 애의 눈에서는 그 어떤 동정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신기했다.
아무리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눈 안의 감정은 숨길 수 없었으니까.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마주쳤다.
연습실에서뿐만이 아니라 집 안에서도.
그럴 때마다 이 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 올 뿐이었다.
역시나 눈에서는 동정의 감정을 찾을 수 없었다.
문득 우스워졌다.
나를 불쌍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기해하고 있다는 게.
생각을 떨쳐낸 노엘은 입을 뗐다.
“연습은 잘 돼 가?”
첫 질문이라서일까.
조금 놀란 듯 연두의 눈망울이 잠시 커졌다가 원상복귀 됐다.
“응!”
“다행이네.”
“노엘도 보러 와! 우리 연습..!”
사실 후회했다.
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에 어울리지도 않게 나서서 다투기까지 했는지.
그런데 환한 웃음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잘한 걸지도.’
쉴 새 없이 오가는 번역기.
이후에도 꽤나 긴 시간 동안 두 아이는 말을 주고받았다.
모처럼, 노엘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
대망의 순간이 찾아왔다.
마지막 연습을 마치고 아이들이 한데 모인 가운데 연습실에 등장한 소피아.
노엘도 함께였다.
마침 나와 은주아, 그리고 하파엘도 연습실을 찾은 상태였다.
“어떻게.. 준비는 끝났니?”
소피아의 물음에 손녀인 레나가 긴장감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응.”
연습은 끝났다.
버스킹에 나가기로 한 건 내일이고, 지금은 완성되어 있어야 하는 시점이다.
개개인이 아닌 하나의 팀으로서 말이다.
‘내가 다 떨리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아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한지 알고 있으니.
부디 그 노력이 결실을 맺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럼 들어볼까?”
아이들이 자리를 잡았다.
사실상 지금 이 배치가 버스킹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었다.
살며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연주가 시작됐다.
비밀의 정원.
무조건 리스트에 포함될 거라 생각했던 곡이었다.
역시 이게 첫 번째인가.
피아노의 맑은 선율로 시작하는 연주, 무난하게 느껴지는 스타트였다.
‘많이 들어보기도 했고.’
그런데 연주가 진행되는 와중 나는 한 사실을 깨달았다.
피아노를 치는 건 연두뿐이었다.
유리는 건반 위에 손을 올리지도 않은 채로 가만히 있다.
‘또 문제가 있는 거 같지는 않은데.’
그런 표정은 아니었다.
단순히 파트 분배의 문제인 걸까.
사실 버스킹 무대에서 피아노가 두 개가 필요한 이유가 있을지 의문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유리가 소외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소피아가 한 말이겠거니 하고.
‘뭐, 괜찮겠지.’
둘 다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가만히 있던 유리가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툭.
사용하는 건 왼손뿐이었다.
그런데,
‘.. 뭐야, 이 소리는?’
방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소리였다.
절묘하게 겹치는 두 피아노의 선율이 어우러지며 화음을 냈다.
그 화음은 새로운 자극이 되어 다가왔다.
‘이런 게 가능했어?’
최소한의 연주였다.
안정적인 연두의 연주에 유리는 왼손만을 사용해 최소한의 음을 섞고 있었다.
적재적소에, 마치 추임새를 넣듯이.
“어제의 일들은 잊어~ 누구나 조금씩은 틀려~ ♪”
시은이의 목소리는 또 하나의 악기처럼 섞여들었고,
사락.
가사가 비는 타이밍은 레나가 활약하는 시간이었다.
테크닉이 돋보이는 연주.
하나의 곡에 들어가 장면이라기에는 그 가짓수가 너무 많았다.
상상 이상의 연주였다.
‘유리가 저런 역할을 할 줄이야.’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평소 유리의 스타일을 아는 만큼 저런 조력자의 역할을 맡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심지어 완벽하게 소화해낼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 못 했고.
입가에 씩 웃음이 번졌다.
‘.. 어울리잖아.’
오히려 더 돋보였다.
박자와 연주 패턴에 맞춰 들어가는 애드리브가 유리의 장점을 극대화해 주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문득 옆을 바라봤다.
은주아와 하파엘의 입가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미소가 드리우고 있었다.
이윽고 끝이 난 연주.
‘흠잡을 데 없었어.’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랬다.
원래 잘 알던 곡인 만큼 무난하게 호흡만 맞아도 성공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색다른 느낌을 줬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얘네 진짜 천재 아니냐고.
‘누가 짠 걸까.’
이 정도면 편곡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궁금했다.
누가 주도해서 이 곡을 이런 방식으로 연주할 생각을 한 건지.
그걸 해소하는 건 나중이었다.
지금은 소피아의 이야기를 들어야 될 때였으니까.
“더 들을 필요는 없겠구나.”
어찌 보면 안 좋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허나 걱정은 되지 않았다.
아까 은주아와 하파엘 뒤에 소피아가 짓고 있는 표정을 봤으니까.
따라서 감이 왔다.
이다음에 그녀가 어떤 말을 뱉을지도.
“너희의 소리로 거리를 사로잡고 오렴.”
단 한 곡만으로, 세계 최고 피아니스트의 인정을 받아낸 단비음악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