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39)
539화. 우리 집 누렁이 츄르를 좋아해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첫 해외여행이었다.
관광지들을 둘러본 것도 좋았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건 장소보다도 감정일 거 같았다.
그리고 조금은 달라진 관계들 정도일까.
아마 나만 이런 건 아니겠지.
‘드디어 돌아왔구나.’
장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한국 땅을 밟았다.
기분이 묘했다.
본국으로 돌아온 건데 꼭 해외 땅이라도 밟는 기분이다.
독일인 다 됐네, 아주.
톡.
마찬가지인지 신기한 듯 땅바닥을 밟는 연두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러고선 고개를 들더니 말한다.
“아빠.. 여기 한국이죠..?”
“그럼 한국이지 독일이겠니?”
내가 한 말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대신 답한 건 유리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세상 다정하게 연두랑 기대서 자 놓고는 금세 또 새침한 말투로 돌아왔다.
‘아, 참.’
시은이랑 레나는 완전히 어색함이 사라졌다.
어떻게 아냐고?
뒤에서 계속 수다 소리와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려왔거든.
거의 교차편집 느낌이었다.
연두랑 유리가 깨어있으면 시은이랑 레나는 잠들어있고, 반대로 연유가 잠들면 시레는 깨어있고.
덕분에 귀가 심심할 틈은 없었다.
‘내 얘기도 했던 거 같은데.’
착각이 아니라면 시레의 대화 중에 내 얘기가 나왔던 거 같다.
워낙 소리가 작아서 제대로 못 들었지만.
설마 뒷담은 아니겠지?
‘에이, 좋은 얘기일 거야.’
독일 여행을 돌이켜보면 딱히 밉보일 만한 짓을 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레나가 한 말도 있지 않은가.
내가 웃는 모습이 좋다고.
“.. 크흠.”
괜히 헛기침을 뱉었다.
철판을 깔아보려 했는데 아무래도 내 입으로 말하려니 낯간지럽다.
아무튼.. 그런 얘기를 해준 레나니까.
‘좋은 얘기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각자 타고 온 차량이 있으니 공항에서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잠깐만. 준비 좀 하고.
“아. 오. 우. 으.”
뒤돌아본 채로 큼지막하게 입을 벌려 경직된 안면근육을 풀었다.
갑자기 왜 그런 짓을 하냐고?
우습긴 하지만 레나와의 인사를 위해서였다.
‘됐어, 이 정도면.’
과분한 칭찬을 받긴 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웃음에 자신 있는 편은 아니었다.
애당초 웃음이 많은 편도 아니고.
늘 볼 때마다 녹아내리는 연두의 웃음에 비하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때 묻은 웃음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연습하는 것부터 순수하지는 않은 거지.
그래도.. 칭찬해줬으니까.
“즐거웠어, 레나야. 조심히 들어가.”
가능한 한 밝은 웃음을 얼굴에 띠고서 레나를 향해 인사했다.
그런데 뭐지?
내 인사를 받은 레나가 뒷걸음질 친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나를 피해서 도달한 곳은 하파엘, 그러니까 아빠의 옆이었다.
“…”
아빠 옷자락을 잡은 손.
반쯤 감춘 레나의 얼굴은 왜인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생각한 웃음이 아니었나?’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 웃음에 대한 의심이었다.
괜히 의식한 걸까 하고.
인위적으로 조성한 웃음이다 보니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장점마저 잃어버렸다던가.
두 번째 생각은 아까 결론지은 일이었다.
‘진짜 뒷담이었다면?’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거다.
그로 인해 시은이와 레나가 공통주제로 티키와 타카를 주고받으며 친목을 다진 거고.
그 과정에서 어색함은 깡그리 사라지고.
‘.. 좋은 건가?’
나로 인해 어색함이 사라졌다면 좋은 일……
아니, 이건 아니잖아.
자기희생도 정도껏 해야지 미움받고 싶지는 않단 말이다.
그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였다.
“.. 아저시도요.”
“응?”
“아저시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뭐지?
그 말과 함께 레나는 아빠 뒤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이었다.
‘뭐, 됐나.’
잘은 모르겠지만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그걸로 안심이었다.
왜인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있는 하파엘과도 인사를 주고받았다.
“덕분에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네, 저도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그때는 제가 주선해 보겠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은주아와도 인사를 주고받았다.
남은 건 한 명이었다.
터벅. 터벅.
천천히 걸어갔다.
멀리서 인사말을 툭 던지기보다는 가까이서 눈을 보며 인사하고 싶었다.
반응은 예상이 가긴 하지만.
슥.
유리의 앞에 쪼그려 앉은 채로 시선을 맞췄다.
“유리야.”
“.. 왜, 왜요.”
“고마워. 유리 덕분에 더 즐거운 여행이었어.”
짐짓 놀란 듯 어깨를 들썩인다.
이렇게 가까이 와서 인사를 건넨 것,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말해주고 싶었다.
‘유리의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표정에 가식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가까이 오지도, 시선을 맞추지도 않았을 거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진심이었다.
“다음에도 꼭 같이 놀자.”
얼마간의 침묵.
그 침묵을 깬 건 유리의 대답이 아니었다.
눈앞이 휑하다.
‘.. 왜 이러는데.’
두 번째였다.
엄마아빠 뒤로 숨는 걸 목격하는 건.
아무리 나라도 계속 이러면 상처받는다고.
슬픈 작별 인사였다.
***
집 근처에 도착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시은이와 헤어져야 했다.
세연씨가 나와 있었다.
그런 엄마를 보지 못하고 있던 시은이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크게 몸을 들썩였다.
“시은아!”
“.. 엄마?”
“어떡해, 어떡해어떡해. 너무 보고 싶었어, 시은아…”
입가에 번지는 미소.
차가 멈추고 문을 열고 나간 시은이는 그대로 엄마 품에 안겨들었다.
눈시울이 빨개진 게 보인다.
‘당연한 거지.’
며칠을 떨어져 있던 건데.
독일에서 한 번도 울지 않은 게 용할 정도다.
영상통화의 역할이 크긴 했지만.
덜컥.
나도 연두랑 같이 차에서 내렸다.
“오랜만이에요.”
“그러니까요. 연두도 너무 오랜만이야… 재밌게 놀았지?”
“네!”
빙긋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별일은 없었죠?”
“걱정 마세요. 누렁이는 완전 건강하게 잘 있으니까. 아까도 갔다 왔거든요.”
“하하…”
뭔가 오해를 한 거 같은데.
“아뇨, 말구요.”
“.. 네?”
“누렁이 말고 세연씨요. 별일 없었냐구요.”
누렁이 안부는 알고 있었다.
전에 말했든 하루도 빠짐없이 세연씨가 인증샷과 함께 안부를 전해줬으니까.
그녀는 조금 당황한 듯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저야 물론이죠.”
옆에 있는 시은이를 격하게 껴안으며 덧붙인다.
“우리 시은이가 옆에 없었다는 것만 빼면요……”
“우으으…”
자주 보던 장면인데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네.
슬슬 헤어질 차례였다.
주차장도 아닌 만큼, 차를 오래 세워두기는 좀 그러니까.
“누렁이 잘 챙겨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뭘요.”
역으로 인사가 돌아왔다.
“저야말로 너무 고맙죠. 우리 시은이 잘 챙겨줘서.”
“하하, 그럼 쌤쌤인가요?”
“그러네요.”
장난스레 말을 주고받은 후, 시은이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즐거웠어, 시은아. 또 보자.”
“.. 네.”
마지막으로 연두랑 시은이도 꼬옥 끌어안으며 인사를 나눴다.
이후 멀어지는 둘.
그 모습을 보다가 차에 탑승했다.
‘기다려라, 누렁아.’
드디어 우리의 보금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초록연두구역에.
***
띠. 띠. 띠. 띠.
덜컥.
문이 열렸다.
손잡이를 돌리는 와중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하나였다.
우리 막내 누렁이.
‘반겨주려나.’
어쩌면 혼자 두고 며칠이나 있다가 왔다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오늘만큼은 다 받아줄 생각이다.
성질을 내도, 땡깡을 부려도, 할퀴거나 물어도.
‘대신.. 나한테만 해라. 언니는 안 된다.’
연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누렁이 생각 때문인지 조마조마한 얼굴로 손을 꼭 모으고 있다.
어느새 내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궁금하거든.’
담아두고 싶었다.
오랜만의 재회에 누렁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천천히 손잡이를 돌렸다.
끼익.
신발장에 들어서자마자 누렁이가 시선에 들어왔다.
코앞에 있는 건 아니었다.
저만치 떨어져서 벽으로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다.
“.. 냐아?”
자그마한 울음소리.
이윽고 한차례 눈동자가 수축하더니 용수철처럼 펑 하고 튀어 오른다.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와 연두는 얼어붙은 채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통! 통!
탱탱볼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향한 곳은 우리의 발밑이었다.
마구 얼굴을 비빈다.
연두의 발치에 갔다가, 내 발치로 옮겨갔다가.
“.. 누렁아.”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찡한 감정이 마음속에 차오른다.
많이 보고 싶었구나.
다시 한번 누렁이가 가족이라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다.
‘짜식. 평소에는 그렇게 시크하면서.’
말 그대로였다.
평소 누렁이는 세상만사 하나도 관심 없어 보이는 시크의 결정체였다.
관심 있는 건 오직 사료와 간식뿐.
‘참, 언니 무릎베개에도 환장하긴 하지.’
눕기만 하면 두 시간은 기본이니까.
어쨌든간에 그런 녀석이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정신없이 얼굴을 부비다가 배를 보이고 드러눕고선 몸을 이리저리 돌린다.
관심을 달라는 제스처다.
“.. 누렁아.”
그런 누렁이의 모습에 뒤늦게 연두가 반응했다.
목소리가 떨린다.
고개를 돌려 보니 이미 늦은 상태다.
새하얀 볼을 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
톡. 톡.
말없이 등을 토닥여줬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다.
독일에서 틈만 나면 연두를 센치해지게 만든 유일한 존재가 누렁이였으니까.
감정이 복받칠 만도 하지.
풀썩.
주저앉듯 바닥에 앉은 연두는 누렁이를 끌어안으며 얘기했다.
“언니가 미안해.. 이제 혼자 안 둘께.. 간식도 많이 줄께……”
큰일이다.
앞으로 장거리 여행은 쉽지 않겠군.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두의 혼잣말에는 누렁이를 향한 애틋함이 잔뜩 묻어났다.
미소를 머금은 채로 정지 버튼을 눌렀다.
‘좀 그렇잖아.’
계속 찍고 있기는 좀 그랬다.
이미 담으려던 장면은 충분히 담기도 했고.
누렁이는 우리를 가족으로 생각한다.
그걸 확신하게 된 것만으로도 촬영 버튼을 누른 가치는 톡톡히 하고도 남았다.
포옥.
나도 팔을 한껏 뻗어 연두와 누렁이를 품에 안았다.
그대로 흘러갔다.
감정이 잦아들 때까지. 꽤나 긴 시간이.
“.. 흣.”
자그마한 웃음이 연두의 입에서 새어 나오고 나서야 나는 손을 뗐다.
연두가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아빠아…”
오랜만이다.
이렇게 끝을 늘이듯 발음하며 나를 부르는 건.
나도 그대로 돌려줬다.
“연두야아…”
“헤헤, 아빠아…”
“연두야아……”
뭐냐, 이 이중 주접은.
되게 우스워 보인다는 걸 아는데도 누구 하나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았다.
서로 부를 때마다 간질거리는 기분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누렁이도 동참했다.
“냐아아……”
잘 모르겠다.
참여하고 싶은 건지, 왜 둘만 달달하냐고 투정을 부리는 건지.
어느 쪽이든 좋았다.
한동안 우리는 그렇게 셋이서 주접을 주고받았다.
***
오랜만에 간식을 가득 챙겨줬다.
세연씨가 주긴 했겠지만 우리가 주는 게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으니까.
츄르는 언제 줘도 순삭이기도 하고.
“우리 집 고양이 츄르를 좋아해~”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렸다.
그런 내 모습이 웃겼는지 연두가 쿡쿡 웃음소리를 낸다.
이윽고 덧붙인다.
“우리 집 고양이 츄르를 좋아해! 우리 집 고양이 뱃살이 짱 많아..!”
심지어 추가된 부분도 있다.
근데 뭐지? 이거 좀 괜찮은데?
내가 할 때는 병맛이었는데 연두가 부르는 걸 보니 오묘하게 중독성이 있다.
자꾸 입에 맴도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거 음악계 진출이라도 해야 하나.’
물론 장난이다.
이런 유치뽕짝한 가사가 음악으로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동요면 몰라도.
그런 생각을 하며 장난스레 말했다.
“연두야.”
“네, 아빠.”
“연두부송 다음으로 만든 자작곡은 없어?”
“아직이요…”
“그럼 방금 그거 어때? 우리 집 고양이 츄르를 좋아해~ 우리 집 누렁이 뱃살이 짱많아~”
그러자 연두가 눈을 번쩍 뜨고선 달려간다.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아무래도 내 말로 인해 머릿속에 영감이라는 게 찾아온 모양이다.
따라갈까 하다가 그만뒀다.
‘괜히 방해하면 안 되니까.’
어쩌면 명곡의 탄생을 방해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곡이 다 완성되면 들어볼 수 있으니 그걸로 족했다.
“좋아.”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두도 일을 시작했으니 나도 슬슬 일을 시작해 볼까.
사실 슬슬이 아니었다.
‘당장 해야 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애써 댓글창을 외면하고 있지만 더 미뤘다가는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른다.
댓글창이 전부 다 히읗으로 뒤덮여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럼 나는 환공포증에 걸리겠지.
‘무시무시한 일이군.’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아 곧장 방으로 향했다.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공간과 감각이다.
타닥. 탁.
편집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다행히 나를 금의환향하게 해줄 카메라는 분실하지 않고 잘 가져온 상태였다.
바로 여기, 내 어깨에.
“.. 어?”
순간 소름이 돋았다.
카메라가 없다.
다행히 그 기분 나쁜 감각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까 내려뒀잖아, 멍충아.’
누렁이 반응을 찍겠다고 촬영하다가 바닥에 내려둔 게 떠올랐다.
후다닥 거실로 달려갔다.
다행히도 카메라는 바닥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쪽. 쪽.
카메라에게 의사는 묻지 않고 뽀뽀세례를 날렸다.
내 보물.
방으로 가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카메라만 있다면 편집자로서의 ‘초록’에게 두려울 건 없었다.
‘역작을 만들어주지.’
독일 시리즈.
제1탄을 제작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