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62)
562화. 간질간질
눈앞에 서 있는 건 두 명이었다.
연두와 시은이.
고독과 상실의 감정에 잔뜩 몰입하고 있던 성우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내가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알았어?”
그 말에 연두와 시은이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입을 뗀 건 시은이였다.
“그냥 복도 걸어가다 보니까 보이던데.”
“…!”
흠칫 들썩이는 어깨.
사실 그랬다.
모두를 피해서 도망친다는 곳이 학교 바깥도 아닌 교내였다.
심지어 위층도 아닌 1층 복도 끄트머리.
“크흠.. 그랬구나.”
괜히 멋쩍어진 성우는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사실 폼 잡을 때가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 성우는 앞에 있는 두 아이는커녕 반에 있는 어떤 친구도 볼 낯이 없었으니까.
입 밖에는 짤막한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 미안해.”
그 말의 무게감 때문일까.
그나마 억눌려있던 서러운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형이 올 줄 알았어.”
“성우야..”
“보러 온다고 했거든. 그래서 멋진 모습 보여주려 했는데……”
알고 있었다.
이런 건 핑계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차라리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쏘아붙이길 바라고 뱉은 말일지도 모른다.
시은이가 물었다.
“그런데?”
“안 왔어. 전화도 안 받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지 않는 건 둘째 치더라도 연락이 되지 않는 이유가 뭔지.
생각 끝에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귀찮았던 거겠지.”
형이 다니는 기숙사학교는 멀었다.
오가기도 벅찬 거리.
그런지라 형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얼굴을 보는 빈도가 급격하게 줄었다.
집에 있을 때도 바쁘긴 했지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형이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거리가 멀어졌다.
그럼에도 형은 여전히 성우에게는 가깝고 커다란 존재였다.
동경의 대상이자 꿈이었다.
‘.. 형은 아니었던 거야.’
그 괴리감이 성우를 힘들게 만들었다.
마음을 지탱하고 있던 가장 커다란 기둥이 무너져내린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모든 게 소용없게 느껴졌다.
회장이 된 것도 형처럼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으니까.
“김성우.”
낮은 목소리.
시은이의 음성에 성우는 마음의 각오를 했다.
징징거릴 만큼 징징거렸으니 이제는 어떤 말을 들어도 감내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다른 물음이 들려왔다.
“너는 형을 왜 좋아해?”
“.. 뭐?”
“형을 왜 좋아하냐고.”
그렇게 물은 시은이는 고개를 돌려 연두를 바라봤다.
맞닿은 시선.
다소 수줍은 얼굴로 시은이는 다시 정면을 보며 얘기했다.
“나는 연두를 좋아해. 왜냐하면.. 연두는 착하고, 따뜻하고, 피아노를 잘 치고, 웃는 게 예쁘고, 솔직하고, 나를 좋아해 주니까.”
“…!”
갑작스러운 애정 공세에 연두의 얼굴도 덩달아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다.
사실 이것도 짧은 편이었다.
연두를 좋아하는 이유라면 얼마든지 더 댈 수 있지만, 그러기에는 쑥스럽기도 하고 시간도 촉박했으니까.
다시 한번 시은이는 성우를 향해 물었다.
“너는 형을 왜 좋아해?”
“나는……”
마구 떠오른다.
내가 귀찮아졌을 거라는 생각 뒤에 숨겨놓은 수많은 이유들이.
형을 좋아하는 이유.
“멋있고, 잘생겼고, 똑똑하고, 착하고, 거짓말을 안 하고, 나랑 잘 놀아주고, 나를 좋아하고, 그리고……”
울컥.
처음이었다.
말하는 도중에 목이 잠기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뒤로 갈수록 나열하는 이유에는 성우가 속해있었다.
‘.. 맞아.’
일방향이 아니었다.
성우가 형을 좋아하는 만큼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한 나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형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한 거다.
다시금 들려오는 시은이의 목소리.
“다행이네. 너희 형이 너를 귀찮아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근거는 충분했다.
방금 성우가 나열한 말 하나하나가 그 근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연두도 덧붙였다.
“맞아!”
“.. 어?”
“성우가 귀찮아서 아니야. 우영이오빠도 안 온다고 했는데 왔어. 연두도 우영이오빠 좋아하고, 우영이오빠도 연두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사정이 있을 거란 의미였다.
자기 일도 아닌데 확신하듯 말하는 연두를 보니 괜스레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다른 의미로 위로가 되는 두 친구였다.
‘그래. 주저앉아있을 수는 없지.’
지금껏 읽은 수많은 위인전.
누구나 시련은 있었다.
그 시련에 무너지느냐 딛고 일어나서 더 강해지느냐가 관건이었다.
당연히 택해야 할 쪽은 후자였다.
‘형도 그러길 바랄 테고.’
자신이 오지 않는다고 동생이 주저앉아있길 바라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생각이 정리됐다.
아직도 연두는 혼자서 계속 열을 올리고 있었다.
“성우 형이 못 오면 연두가 말해줄게! 성우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그리고……”
“푸흣.”
갑자기 웃는 성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연두.
성우는 말했다.
“고마워, 둘 다.”
알 거 같았다.
왜 진정한 친구를 사귀라는 건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자그마한 손이 눈앞에 드리웠다.
잡고 일어나려는데,
“.. 어?”
외마디 소리를 뱉은 성우가 덧붙였다.
“서연두. 너 손, 다친 거야…?”
***
우영은 복도에 기대어 서 있었다.
땅콩을 따라왔다.
혼자 가게 내버려 뒀다가 미아가 되어버리면 곤란하니까.
‘바로 데려가려 했는데.’
들려오는 대화를 듣고 잠깐은 그대로 두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에 기대어있었다.
대화는 계속 들려왔다.
땅콩 친구 시은이가 말할 때는 코웃음이 나왔다.
‘쬐그만 게 뭘 안다고.’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우영은 변화하고 있었다.
특히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최근 들어 그동안은 느끼지 못한 감정을 경험할 때가 많았다.
저번에도 그렇고.
‘연두가 오늘처럼 널 오랜만에 봤는데 이름을 까먹었다고 생각해 봐. 어떨 거 같아?’
‘아니면 내가 우영이 너를 ‘작화 동료 1’로 저장했다거나.’
사실 별거 아닌 이야기였다.
애초에 스스로는 인행심 팀원 은서린을 ‘팀원 1’로 저장했으니 할 말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단지 상상한 것만으로 울컥하고, 황당하고, 기분이 나쁘고,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딱 한 가지만 바뀌면 아무렇지 않았다.
연두가 다른 사람으로, 그리고 주원이형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면 말이다.
차이는 간단했다.
……기대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온 우영이였다.
기댄 건 오직 미술뿐.
미술은 그 대상이기에, 학창 시절 그림을 망쳐놓은 녀석의 머리통을 붓으로 난타한 건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또 한 번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다.
슬픔을 비롯한 여러 감정을 느끼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우영의 감정은 무뎌져 있었다.
누군가 상처 주는 말을 해도 그게 어떠한 감정으로 이어지는 회로 자체가 막혀있다고 해야 할까.
사실 장례식 때도 그랬다.
억지로 눌러둔 감정을 분출하게 만든 건 연두의 한 마디였다.
‘약속해써요..’
‘.. 약속?’
‘우영이오빠가 정말 슬퍼하는 걸 보면.. 연두가 꼬옥 안아주기로.. 할머니가 연두 안아준 것처럼……’
돌이켜보면 언제나 감정이 일을 할 때면 연두와 주원이 연관되어 있었다.
비록 본인은 아직 그걸 자각 못 하고 있지만.
우영의 감정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긴 시간에 거쳐 무뎌졌을 뿐, 회생의 여지는 충분했다.
그 대상이 바로 연두와 주원이었다.
“우영이오빠도 안 온다고 했는데 왔어. 연두도 우영이오빠 좋아하고, 우영이오빠도 연두 좋아하니까.”
갑작스레 땅콩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
또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드는 건.
자기도 모르게 우영은 심장 부근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간질간질.
누군가 간지럼을 태우는 것처럼 마음 깊숙한 곳이 간질거린다.
그래, 이건 기쁨이다.
우영이 그런 생각들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는 사실은 자각 못 한 부분이었지만.
그때였다.
“서연두. 너 손, 다친 거야…?”
“…!”
본능적으로 발이 나갔다.
한달음에 다가간 우영은 연두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뭐야, 너 다쳤어? 아까 넘어질 때 다친 거야? 그런 거면 얘기를……”
“…”
눈만 깜빡이는 연두.
자세히 본 연두의 손에는 보일 듯 말 듯 자그마한 생채기가 나 있었다.
그제야 이성이 돌아온 우영은 손을 놓아줬다.
“하, 하나도 안 아픈데……”
“아픈 게 중요해?”
괜히 언성을 높인 우영은 덧붙였다.
“너 그런 거 치료 안 하고 놔두면 파상풍 걸린다, 파상풍.”
“.. 파사풍?”
“그래. 잘못되면……”
당황한 나머지 손을 잘라야 할지도 모른다고 덧붙이려다가, 아무래도 그건 아닌 거 같아 입을 다물었다.
여덟 살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아니, 애초에 왜 이렇게 흥분한 건지부터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저 상처 같지도 않은 상처 때문에.
‘.. 아냐. 확인하니까 안 거잖아.’
커다란 상처였으면 큰일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다급하게 행동한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우영이 감정에 이어 합리화라는 녀석을 배우고 있는 와중,
“.. 풋.”
고개를 돌리니 보인 건 웃음이 터진 시은이였다.
“뭐냐, 꼬맹이? 너 지금 나 비웃은 거야?”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누가 봐도 비웃은 건데.”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니긴……”
더 따지려다 말고 우영은 뒷골을 부여잡았다.
의미 없는 일이다.
그렇게 판단한 우영은 성우를 보며 말했다.
“해결됐으면 빨리 일어나. 이제 이어달리기 시작한다는 거 같으니까.”
“아, 네!”
성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그렇게 수습하고 돌아서려는 우영의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
“우영이오빠.”
연두가 아니었다.
다소 어색하게 들리는 호칭에 우영이도 어색하게 말을 받았다.
“왜.”
“성우 오빠 고등학생이래요.”
“근데.”
서늘한 목소리로 시은이는 말했다.
“아니겠지만.. 혹시 귀찮아서 안 온 거면요.”
“.. 응.”
“오빠가 혼내주세요.”
생각지 못한 부탁에 우영이 반응했다.
“내가 왜?”
“오빠는 성인이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려는데 옆에서 연두가 맞장구쳤다.
“맞아요! 혼내주세요..!”
“뭐?”
“귀찮아서 동생 보러 안 오는 오빠는 나빠여! 그러니까 혼나야 해요..!”
난감한 상황이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인 데다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혼내란 말인가.
그렇다고 딱 잘라 거절하기에는 애들 눈빛이 너무 간절하고.
결국 우영은 적당히 대답했다.
“뭐, 봐서. 어린애 혼내서 뭐 하나 싶긴 한데.”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특히나 요즘 어른이 됐다는 사실에 몰입하고 있는 우영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허나 실언이었다.
그 표현을 반박하듯, 촌철살인 같은 한 마디가 성우의 입에서 튀어나왔으니까.
“우리 형 키 187인데.”
“…”
어린 애라 부르기에는 너무 큰 키였다.
***
“주원이형!”
뒤를 돌아본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우영이가 서 있었다.
뒤에는 연두와 시은이, 그리고 성우도 있었고.
“하아, 다행이다. 어디 갔었던 거야?”
“학교 안이요.”
“아빠한테 말도 없이 사라지면 어떡해, 연두야.”
그러자 내 품에 안긴 연두는 말했다.
“같이 가자고 했는데……”
또 나야?
멀어지는 성우를 가리키며 몇 번이나 나를 불렀다는 모양이다.
현우 우는 걸 구경… 아니, 보느라 못 들었나.
‘한 번씩 감각기관이 마비될 때가 있는 거 같단 말이지.’
아무튼 다행이었다.
연두도 연두지만 시은이와 성우도 다친 곳 없이 무사하게 돌아와서.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들려오는 목소리.
“형. 땅콩이 아까 넘어질 때 좀 다친 거 같던데.”
“.. 뭐? 어디! 어디 다쳤어?”
호들갑을 떠는 내 귓가에 들려오는 웃음.
“.. 흣.”
셋이 동시에 웃고 있다.
벙찐 나는 연두의 손바닥을 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상처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의 생채기다.
“그래도 치료는 해야 해.”
“치료요..?”
“응. 소독하고 약 발라야지. 파상풍이라도 걸리면……”
왠지 모르게 또 주위에서 웃음이 터진다.
뭐지, 대체.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어머. 귀여운 상처네?”
보건 선생님이 약통에서 약을 꺼냈다.
그 유명한 빨간약이었다.
손을 내밀고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부들부들 떠는 연두.
“자, 됐어요!”
“.. 으응?”
“안 아팠지? 금방 사라질 상처니까 걱정하지 마.”
“고, 고맙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향해 걸어오는 연두.
뻘하게 웃음이 터졌다.
이렇게 안 아플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눈치다.
한편 우리와 함께 자리로 돌아온 성우도 친구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지게 만들어서. 이제부터는 더 열심히 할게.”
진정성 있는 사과.
이후 직접적인 마찰이 있었던 재호에게도 다가가 말했다.
“미안해, 재호야.”
“김성우..”
다행히 이번에는 불안한 예감이 빗나갔다.
“괜찮아! 우린 친구니까!”
의외로 쿨한 재호였다.
펑펑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장난기 가득하던 얼굴로 돌아왔다.
실실 웃으며 얘기한다.
“그럼 약속 지키는 거지?”
“.. 응?”
“회장도 계주도 나 하라는 거. 으하하! 이제부터 내가 5반 회장이다.”
“그, 그건 안 돼!”
“에엥? 그런 게 어딨어!”
역시 이것도 그대로군.
재호의 땡깡은 주위 친구들에 의해 무마됐다.
“맞아, 그건 안 되지!”
“인정. 정재호가 회장 되면 우리 반 망함.”
“계주도 안 돼. 정재호 나보다 느린데 계주하면 우리 진다고.”
“계주 이기면 봐줄게, 김성우!”
이걸 어쩐다.
또 재호 울음보가 터지려는 분위기다.
그거만 빼고 보면 혼란스러웠던 분위기가 나름 훈훈하게 잘 정리된 거 같았다.
“자, 다들 모여주세요! 지금부터 이어달리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
함성소리 속에 교사는 덧붙였다.
“먼저 각 반의 여학생 대표! 여자 계주는 조끼를 입고 앞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운동회의 꽃, 이어달리기.
남학생과 여학생 중 선공을 펼치는 건 여자 계주였다.
시은이와 월이 출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