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63)
563화. 엄지 척
“먼저 각 반의 여학생 대표! 여자 계주는 조끼를 입고 앞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두는 후다닥 달려가 바구니에서 조끼를 꺼내왔다.
그러고선 손수 입혀준다.
“시은아, 팔 먼저 넣어..!”
“응!”
“월이도 여기……”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내가 옷을 입혀줄 때와 비슷한 멘트를 하는 걸 보고.
그렇게 흰 조끼를 입고 나란히 선 시은이와 월이.
‘든든하네.’
시은이의 달리기 실력은 익히 알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도 빨랐지만 밤마다의 연습으로 더더욱 빨라진 상태다.
마지막으로 잰 게 거의 9초에 가까운 기록이었으니까.
이어달리기는 1, 2학년 통합으로 진행된다.
잘 모르겠다.
한 학년의 격차가 어느 정도일지는.
그래도 감히 예상컨대, 시은이에게는 2학년에게도 어지간해서는 밀리지 않을 거 같다.
오히려 더 빠르면 모를까.
허나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
그게 뭐냐고?
월이가 시은이보다 빠르다는 것.
지금 시점은 모르겠지만 계주 결정전에서 시은이는 2등, 1등은 월이였다.
시골 출신의 힘일까.
생각해 보면 선동이도 달리기는 무진장 빠른 편이었지.
그런 만큼 시은이와 월이가 백팀의 막강한 전력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잘하고 와, 얘들아. 다치면 안 된다…?”
담임교사 김수희의 말을 시작으로 모두들 한 마디씩 응원의 말을 건넸다.
“꼭 이겨!”
“월이, 파이팅!”
“청팀 꼭 혼내줘! 우리가 열심히 응원할게..!”
남자아이들의 응원은 사뭇 달랐다.
“연시은! 남궁월! 연시은! 남궁월!”
“박살 내버려!”
“조폭마누라 출동!!”
절로 입이 벌어졌다.
조폭마누라.
이거 얼마 만에 들어보는 단어인지 모르겠다.
‘아직도 하는구나.’
나도 초등학교 때 이 단어로 좋아했던 여자애를 놀렸던 거 같은데.
물론 반성하고 있다.
아무튼 그런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이 남자애는 월이와 시은이 둘 중 하나를 좋아한다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반응한 건 월이였다.
“마!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내가 안 캤나?”
“우와악! 도망쳐!”
봐라.
격하게 반응해주니까 좋아 죽으려 하잖아.
이제 보니 시은이한테는 무서워서 장난 못 치는 거 같기도 하고.
“괜찮아, 월아?”
“개안타, 개안타.”
연두와 레나도 나란히 둘의 손을 꼭 잡고 말을 보탰다.
“시은아, 월아. 다치면 안 돼…”
“할 수 있서!”
“응!”
“걱정 붙들어 매라.”
그러자 어디선가 나타나 수줍은 듯 주먹을 내미는 한 아이.
다름 아닌 성우였다.
“.. 잘하고 와, 연시은.”
“응.”
부딪히는 주먹.
끝으로 나도 둘을 향해 얘기했다.
“파이팅!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바통 잘 넘겨받고, 넘겨주고.”
말 그대로였다.
내가 언급한 불상사만 안 생긴다면 우리 반 때문에 지는 일은 없을 테니.
연이어 대답하는 둘.
그나저나 세연씨는 아까부터 표정이 심각하다.
“어떡해.. 너무 떨려…”
비유가 좀 그렇긴 하지만 전쟁터에 자식을 보내는 부모 느낌이라 해야 하나.
시은이는 평온한데 혼자 잔뜩 긴장한 상태다.
그런 그녀가 마침내 입을 뗐다.
“괜찮으니까 떨지 마, 시은아.”
“안 떨어.”
“걱정도 하지 말고. 경쟁을 떠나서 열심히 하는 게 아름다운 거니까.”
“걱정도 안 해.”
“히잉.. 역시 우리 딸이야! 일로 와!”
얼굴을 마구 비빈다.
무표정의 시은이.
이제는 싫은 티도 안 내고 익숙하다는 듯 가만히 떨어지길 기다린다.
놓치기는 싫은 장면이라 바로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
기가 막히네.
연두부들 심장에 통증을 유발할 만한 사진이다.
너무 귀여워서.
그렇게 세연씨의 스킨쉽을 끝으로 월이와 시은이는 각자 위치를 향해 걸어 나갔다.
드디어 운동회의 꽃, 이어달리기의 시작이었다.
***
휘리릭!
휘슬 소리로 드디어 막을 올린 이어달리기.
첫 주자는 2학년이었다.
배치를 보니 2학년으로 시작해 1, 2학년이 교차해서 달리는 구조인 거 같다.
‘월이가 마지막 주자인가.’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보통 이어달리기는 첫 주자와 마지막 주자에 가장 빠른 사람을 배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니.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전자는 기선제압을 위해서다.
“와아아!”
“이영주! 이영주!”
“달려라 백팀! 달려라 백팀! 이 세상 끝까지!”
“우아악! 청팀!”
사실상 준비한 응원 구호가 의미가 없었다.
열광의 도가니.
두 주자를 에워싼 채로 모든 학생들이 응원과 환호성을 보내고 있다.
‘알 거 같네.’
다시금 알 거 같았다.
왜 이어달리기가 운동회의 꽃이라 불리는 건지.
텐션부터 비교가 안 된다.
타닷! 탓!
첫 주자여서 그런지 두 주자는 엎치락뒤치락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연두도 손을 꼭 모은 채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움직이는 입모양.
“오 필승 백군.. 오 필승 백군..!”
“푸흣.”
미치겠네.
혼자 꿋꿋이 준비해 온 멘트를 하는 걸 보고 뻘하게 웃음이 터졌다.
중간중간에 박자에 맞춰 박수도 친다.
“연두야.”
“네에.”
“내년에는 연두가 저기서 뛰는 거야. 약속한 거 기억하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연두는 말했다.
“진짜 떨릴 거 같아요…”
“그렇겠지. 그러니까 같이 응원하자. 오 필승 백군!”
“.. 네! 오 필승 백군!”
레나도 옆에서 눈을 못 떼고 구경하고 있다.
거의 동시에 도착한 첫 번째 주자.
어느새 바통은 두 번째 주자를 거쳐서 세 번째 주자에게로 넘어갔다.
‘엄청 빠르네.’
반 바퀴씩 달리다 보니 템포가 무척 빠르다.
장면이 휙휙 지나간다.
문제는 그런 와중에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거고.
선두주자는 청팀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퍽!
넘어져 버린 백팀 주자.
다행히 바통은 안 놓쳤고 바로 일어나서 달리긴 했지만 격차는 더 벌어져 버렸다.
암울한 상황이다.
주위에서는 포기한 듯한 말도 들려왔다.
“.. 졌네.”
“우리 이거 지면 못 이기는 거 아니야?”
“맞음. 남자 계주 이겨도 짐.”
“다른 거 다 이기면 되잖아.”
“그게 쉽냐, 멍충아?”
“하…”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들려오자 연두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럴 만도 하다.
생각지도 못한 최악의 전개가 펼쳐지고 있으니.
“파, 파이팅..!”
그런 상황에도 응원부장답게 응원멘트를 던지긴 했지만, 지고 있는 상황인지라 그다지 힘을 갖지는 못했다.
그렇다.
이 상황을 뒤집으려면 커다란 반전이 필요했다.
바로 지금 시점에.
툭.
바통을 먼저 건네받고 달리기 시작한 청팀 주자.
그때였다.
“.. 어?”
“시, 시은이다..!”
시은이였다.
한눈에 봐도 무서운 속도.
원형을 달리는 건 처음 봐서 감이 안 왔는데, 앞선 주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다.
빠른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나?
타다다!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다.
역전이 불가능할 거 같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는 걸 보나.
그래, 떠오른다.
이게 바로 이어달리기의 묘미였지.
“뭐, 뭐야!”
“왜 저렇게 빨라?”
“미쳤다! 발에 모터 달았나?”
초등학생이 쓰기에는 다소 고급스러운(?) 비유다.
반전된 분위기.
“연시은! 연시은! 연시은!”
“달려라 백팀!”
“우아아악! 백팀 파이팅!!”
체념하던 아이들도 다시 백팀과 시은이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 효과는 컸다.
거리가 짧아 완전히 역전하지는 못했지만, 거의 따라잡은 채로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줬다.
그럼에도 얼굴에는 아쉬움이 떠오른다.
“시, 시은아…”
허나 그럴 필요 없었다.
지금까지의 주자 중, 단연 1위로 꼽을 만한 임팩트였으니까.
시은이의 활약으로 이제는 다시 비등해진 승부.
“청팀! 청팀!”
“백팀 져라!”
“야! 너네 팀 응원만 하라고! 선생님이 다른 팀 비하하지 말라고 한 거 못 들었냐?”
응원도 다시 치열해졌다.
그에 호응하듯 각 주자들은 팽팽한 경기력을 선보인다.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승부.
월이가 서 있을 마지막 레인을 본 내 눈이 동그랗게 부풀었다.
‘.. 1학년 맞아?’
청팀의 마지막 주자로 보이는 월이 옆에 서 있는 여학생.
키가 장난이 아니다.
고학년이라 해도 믿을 법한 신장을 보유하고 있다.
‘연두랑 머리 하나는 차이 날 거 같은데.’
월이도 키는 작은 편이다.
연두랑 비슷한 정도.
크게 차이 나는 체격을 보자 괜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월아…”
어느새 연두도 내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아, 참.
아까 잊고 말 안 했구나.
‘마지막 주자를 빠른 사람으로 배치하는 이유.’
지극히 단순한 논리였다.
먼저 깔아둬야 할 건, 마지막 주자가 뛰어야 하는 거리가 가장 길다는 거다.
그래서 마지막 스퍼트를 통한 역전의 확률도 높았다.
‘그렇게 선정된 둘이라는 거지.’
이제 진검승부였다.
청팀 주자가 근소하게 먼저 바통을 넘겨주고, 곧이어 월이도 바통을 이어받았다.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한 두 주자.
“…?”
다시 한번 벌어지는 입.
뭐지, 이건.
‘.. 맞아?’
비현실적인 상황이다.
잠깐 사이에 격차가 말도 안 되게 벌어져 있었다.
선두를 달리는 건 월이였다.
“우와아!!!!”
“남궁월! 남궁월!”
“달려라 5반! 달려라 5반! 5반이 최고야!”
발이 안 보인다.
비등할 줄 알았던 승부는 월이의 스퍼트로 완전히 무게추가 기울었다.
남은 거리를 단숨에 주파한 뒤 결승선에 도달하는 월이.
촤락!
짜릿한 승리였다.
***
희비가 엇갈린 상황.
백팀 아이들은 첫 승리의 기쁨을 한껏 만끽했다.
특히나 시은이와 월이는 영웅 그 자체였다.
‘거의 진 경기를 승리로 견인한 주역이니까.’
그런데 왜인지 월이 표정이 좋지 않다.
결승선에 도달할 때만 해도 좋아서 폴짝폴짝 뛰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걱정이 된 나는 다가가 물었다.
“월아. 이겼는데 왜 표정이 안 좋아?”
“.. 아임니다.”
“괜찮으니까 얘기해도 돼.”
재차 물은 끝에 알 수 있었다.
이유는 청팀 주자였다.
잔뜩 기뻐하다가 뒤늦게 도착한 친구의 얼굴을 봤는데 너무 울적해 보였다는 거다.
하여튼… 착해도 너무 착하다니까.
스윽.
머리 위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월아.”
조금 놀란 듯 대답한다.
“.. 네.”
“그냥 기뻐해도 돼. 서로 반칙 없이 최선을 다했고 월이가 좀 더 빨랐던 것뿐이니까. 그걸로 월이가 미안해한다면 오히려 그 친구도 더 불편해할 거야.”
조금 빨랐던 게 아니긴 하지만 그거 말고 빈말을 한 건 없다.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아무리 어린 나이라고 해도 경쟁에서 승패가 갈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순수한 만큼 당연히 드는 감정일 테지만.’
최대한 그 마음의 짐을 덜어내 주고 싶었다.
효과가 있었던 걸까.
“고, 고맙심더..!”
꾸벅 인사하고는 달려간다.
되게 귀엽네.
연두만큼 조그마한 아이가 투박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걸 보니 웃음이 나온다.
물론 좋은 의미로 말이다.
“자, 여자 계주는 백팀의 승리입니다! 다음은 남자 계주, 조끼를 입고 준비해주세요!”
“네!”
“네, 선생님!”
이제는 남자 계주의 차례였다.
***
꼴깍.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
손에는 땀이 가득하다.
응원하는 친구들 속에 둘러싸인 채로 순서를 기다리는 성우의 현 상태였다.
‘.. 할 수 있어.’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전부 잊는다.
팀 승리를 망쳐버린 것도,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도.
그런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어준 친구들이 있으니까.
‘연시은.. 서연두…’
형은 결국 오지 않았다.
기대감이 없었던 건 아니다.
혹시나 늦게라도 도착하지 않을까, 연락이라도 하지 않을까.
“.. 괜찮아.”
바뀌지 않았다.
지금 성우가 그리는 형의 모습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분명히 웃어줬을 거다.
엄지를 척 올리며 힘내라고 이야기해줬을 거다.
‘형이 있어.’
비록 이 자리에는 없지만 마음속에는 그런 형이 선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심호흡을 했다.
이제는 달릴 준비가 됐다.
한편 그 시점.
걱정 가득한 얼굴로 앞을 응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주원이었다.
‘나 진짜 왜 이러냐.’
초등학교 운동회다.
그런데도 몰입감이 장난이 아니다.
특히나 앞선 상황들로 인해 걱정되는 우리 팀 주자가 있기도 하고.
“아빠, 떨려요..?”
이거 봐.
얼마나 티가 나면 연두가 먼저 이런 말을 하겠는가.
원래 내가 해야 할 말인데.
“하하, 아니야.”
“진짜여..?”
“그럼. 잘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연두도 그렇게 생각하지?”
동시에 덧붙였다.
“성우, 멋지게 잘 달릴 수 있을 거라고.”
그때였다.
연두가 대답하려는 찰나에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헉.. 헉.. 허억…”
앞쪽에서 나는 건 아니다.
애초에 이렇게 역동적으로 들리기에는 너무 먼 거리니까.
그렇다면,
슥.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 남자가 보인다.
그가 무릎을 짚고 일어선다.
“…?”
절로 올라가는 시선.
뭐지, 이 사람?
앳된 얼굴인데 키가 장난 아니게 크다.
‘180 후반은 될 거 같은데.’
괜히 기죽는 느낌.
비 오듯 땀을 흘리며 남자는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짙은 웃음과 함께 엄지를 척 올리며.
“.. 잘할 겁니다. 분명히.”
영문을 알 수 없는 한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