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627)
627화. 근황
작화팀 메일을 개설했다.
원래도 메일주소가 있긴 했지만 그건 내 개인 메일이었다.
이제는 필요했다.
팀 단위로 외주를 받고 외부와 소통할 창구가.
‘그런데.. 곤란하네.’
개설 후 며칠간 쌓인 메일함.
하나하나 넘기며 확인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심란해지는 기분이다.
왜냐고?
개인 메일함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안녕하세요, 게임회사 유존입니다!
-초록님께 제안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초록님. 드리고 싶은 제안이 있어서 메일 보냅니다.
워낙 다양한 분야의 작화에 참여해서 그런지 제안을 해 오는 회사도 무척 다양했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바뀐 게 없어.’
대부분의 회사가 여전히 팀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로 의뢰해 오고 있었다.
제목에든, 내용에든.
작화팀 ‘스튜디오 초록’의 메일이라는 걸 명시해 뒀는데도 말이다.
왜일까. 이유를 생각해보니 답은 금방 나왔다.
‘믿을 수 없는 거야.’
화제성과 별개로 ‘스튜디오 초록’은 팀으로서 아직 보여준 게 없었다.
증명한 건 더더욱 없고.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나는 다르다.
나름 몇 년간 쌓아올린 것들이 있고, 그건 내 가치와 직결되는 요소였다.
허나 그게 팀으로서의 가치와 직결되지는 않는다.
‘내가 아니니까.’
작화가 이주원과 작화팀 ‘스튜디오 초록’은 엄연히 다르다.
그래서겠지.
팀 메일임에도 불구하고 팀이 아닌 개인 단위로 외주를 의뢰해 오는 건.
원래는 메일함을 팀원들에게 모두 공유할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다만, 지금 이 시점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런 메일들을 보게 된다면 팀원들의 사기가 꺾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괜찮아.’
당연한 얘기지만 개인 외주를 받을 생각은 없다.
그럴 여유도 없고.
지금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 증명한다.’
결국은 팀으로서 보여준 게 없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결과로 증명하면 된다.
팀으로서의 가치도 결코 밀리지 않는다는 걸.
아니, 그 이상이라는 걸.
달칵.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메일함을 닫았다.
기대가 됐다.
며칠이 지난 뒤 열어봤을 때,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져있을 메일함이.
***
서도연과 한경우.
둘은 나란히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는 직장동료가 된 둘이지만, 지금 향하는 건 스튜디오가 아니었다.
한경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너는 안 간다고 할 줄 알았는데.”
“왜?”
“딱히 보고 싶은 애가 있지는 않을 거 같아서.”
말 그대로였다.
지금 향하는 곳은 동기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 뭐, 그렇지.”
도연은 그리 친화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우영처럼 스스로 고립시키는 편은 아니었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누군가와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그나마 가깝게 지낸 게 한경우였다.
그것도 먼저 다가오는 경우 특유의 스스럼없는 성격 탓이긴 했지만.
“그럼 왜 가기로 했는데?”
지금도 그랬다.
묻는 말에 무미건조하게 대답만 하는데도 지치는 기색이 없다.
서도연은 작게 대답했다.
“교수님이 부르셨으니까.”
“.. 하핫.”
“왜 웃냐?”
“역시 그렇구나 해서. 어떻게 보면 동창회같은 거잖아. 네가 그런 귀찮은 장소에 가기로 한 거면, 이유는 교수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
“… 역시 재수없어.”
띠용 눈이 동그래진 한경우가 묻는다.
“갑자기?”
“다 알면서 물어본 거잖아.”
“그건 맞는데……”
꼭 가야 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교수님도 시간이 되는 사람에 한해서 오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도연이 가기로 한 이유는 방금 말한 그대로였다.
‘한 번 찾아뵐 생각이었으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도연을 무척 아껴준 교수 유호걸이었다.
졸업했다고 해서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사실을 잊을 정도로 도연이 경우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앞에 경우가 있긴 하지만.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는 경우를 향해 도연이 물었다.
“너는?”
“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딱히 보고 싶은 애 없는 건.”
“푸하핫!”
난데없이 웃음을 터트린 경우가 말한다.
“야, 서도연. 내가 넌 줄 아냐? 나 인싸 중의 인싸 한경우야. 동기 중에 안 친한 애가 없었다고.”
“…”
“빨리 보고 싶다.. 재이도, 종호도, 은아도……”
이미 도연은 반쯤 흘려듣고 있었다.
그때였다.
“.. 아! 상영이도!”
도연의 어깨가 꿈틀했다.
이름을 듣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오는 이름이 나왔으니까.
박상영.
긴 악연이었다. 공모전 때 초록님 그림을 떨어트릴 뻔 했던 장본인이기도 하고.
고개를 돌리니 경우가 익살스럽게 웃고 있다.
“.. 죽는다.”
“하하, 미안. 근데 걔는 좀 변했으려나?”
“관심없어.”
“오늘 올 지 안 올 지 궁금하네.”
“관심없다니까.”
한경우가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걱정 마라, 서도연.”
“무슨 걱정.”
“전처럼 박상영이 또 꺼드럭대면 이 오빠가 바로 컷해줄게.”
“오빠? 뒤질래?”
“… 취소.”
둘만 있으면 표현이 격해지는 도연이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레스토랑.
교수님이 쏘는 자리였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기다란 테이블.
미리 와 있는 친구들이 보인다.
‘.. 조은아, 한재이, 박종호, 최도랑……’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앞서 한경우가 언급한 동기들은 대부분 온 거 같았다.
막상 당사자인 경우는 조금도 관심없어 보이지만.
‘이럴 줄 알았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한경우는 동기들과의 재회에 관심이 없다는 걸.
원래부터 그런 녀석이었다.
모두와 친한 듯 하지만, 실상은 두터운 벽을 치고 있는 녀석.
‘나한테도 마찬가지고.’
속을 알면서도 알 수 없다고 해야 하나.
그때였다.
어딘가를 본 도연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 왔네.’
반갑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박상영.
상견례라도 온 듯 차려입은 복장이 눈에 띈다.
동기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을 찡그리는 게 너무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도연의 입장에서는 며칠도 아니고 4년간 이어진 악연이었으니.
‘됐어. 신경 쓸 필요 없어.’
졸업까지 한 마당에 신경쓰는 거 자체가 손해였다.
앞으로 볼 사이도 아니고.
교수님이 안 보이는 걸 보니, 아직 오지 않으신 거 같았다.
“가자, 서도연.”
“응.”
둘은 나란히 테이블로 향했다.
“어! 도연이 왔다!”
“경우도 왔네?”
“꺄, 도연아..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뭐야뭐야. 왜 같이 와?”
“둘이 설마.. 그렇고 그런 사이?”
적당하게 반응하며 도연은 자리에 앉았다.
역시 좋아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어느새 한경우도 빈자리에 앉아서 소리내어 웃으며 말한다.
“푸하하! 내가 서도연이랑?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뭐야.. 강하게 부정하니까 더 의심되는데?”
“사귈 거면 진작에 사귀었지. 내가 쟤랑 붙어다닌 시간이 4년인데.”
그 말에 도연이 황당한 듯 대꾸한다.
“사귈 마음 있었으면 사귈 수 있었다는 것처럼 말한다?”
“엥? 아니야?”
“.. 뭐?”
“하..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 했는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
그 속에서 경우는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좋다고 하면 너도 나 좋아할 거잖아.”
“…?”
그 한 마디에 테이블은 난리가 났다.
“꺄아!”
“와.. 미친놈인가?”
“뭐야, 방금? 무슨 드라마 남주 빙의했냐, 킥킥.”
“역시 홍원대 원조 개또라이.”
“원조가 한경우면 다음은 누군데.”
“선우영이지, 뭐.”
바로 수긍한다.
졸업한 선배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우영이었다.
뒤늦게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하는 한경우.
“아, 서도연 표정 봐. 개웃기네.”
“야, 한경우.”
오싹함에 고개를 돌리니 눈에 들어온다.
살의가 담긴 눈빛이.
“미, 미안..”
“한 번 더 하면 죽는다.”
“.. 응.”
경우의 목숨을 건 희생으로 분위기는 잔뜩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때였다.
가만히 앉아있던 박상영이 입을 연 건.
“오랜만이다, 서도연.”
***
“오랜만이다, 서도연.”
“.. 어, 그래.”
전이라면 무시했을 테지만 가벼운 인사였기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기도 했고.
뭐라 더 이야기하려던 상영의 말은 교수님의 등장에 가로막혔다.
“오, 교수님 오셨다!”
다들 일어서서 교수님을 반겼다.
“허허, 다들 오랜만이구나.”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래, 도연이 왔구나. 잘하고 있지?”
인자한 웃음.
특히나 아꼈던 제자인 만큼 도연을 바라보는 눈빛은 유독 애틋했다.
뒤이어 한경우도 그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래, 경우.”
제자들과 한 명 한 명 인사를 주고받은 뒤 식사가 시작됐다.
좋은 분위기였다.
의외로 박상영도 튀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그런 와중에 들려오는 목소리.
“자, 그럼 나는 이쯤에서 빠지는 걸로.”
“네?”
“너희들을 위해 만든 자리니까. 내가 가고 나서도 시키고 싶은 건 마음껏 시켜도 되니까 눈치보지 말고 시키고.”
갑작스러운 유호걸의 말에 제자들이 말했다.
“아니에요, 교수님.”
“힝.. 슬프게 왜 혼자 가세요…”
“같이 얘기 나누고 싶은데……”
유호걸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고맙구나. 그런데 오늘은 내가 저녁에 일이 있어서. 다음에 또 얘기 나누자꾸나.”
“아..”
일이 있다는데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자들의 편한 시간을 위해 일부러 자리를 피해주는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 유호걸이 자리를 떴다.
“역시……”
가장 먼저 입을 뗀 건 박상영이었다.
“교수님이 눈치가 빠르셔.”
“응?”
“우리 불편해하는 거 알고 빠져주신 거잖아. 전부터 교수님이 이래서 좋았다니까.”
순간 정적이 일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그걸 입으로 뱉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항상 그랬다.
박상영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뱉는 사람이었다.
매번 그로 인해 곤혹을 겪으면서도.
‘사실도 아니고.’
일부러 피해주시는 거라는 건 모두가 느낀 거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교수님을 불편해했다는 건.
그래서일까. 테이블에는 묘하게 불편한 기운이 맴돌았다.
“하하, 좋아! 그럼 우리 근황 토크나 해 볼까?”
한 줄기 빛 같은 누군가의 말에 다들 호응했다.
“좋지, 좋지!”
“어떻게.. 은아부터 시계방향으로 고?”
“고고!”
그렇게 근황토크가 시작됐다.
“나는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외국으로 가게 될 거 같아.”
“외국이면.. 유학?”
“응. 우연찮게 좋은 기회가 생겨서.”
“오오! 어디로 가는데?”
“싱가폴 쪽으로..”
“이야, 싱가폴 좋지! 축하해! 열심히 하더니……”
훈훈한 분위기였다.
어떤 답이 나와도 다들 응원해주는 분위기.
“나는 천천히 알아보고 있어. 취업할 만 한 곳.”
“그렇구나.”
“뭐, 급할 필요는 없지.”
루트는 무척 다양했다.
유학을 가거나, 취준을 하거나, 대학원을 가거나.
어느새 박상영의 차례였다.
“상영이는?”
기다렸다는 듯 박상영은 입을 열었다.
“뭐, 별 거 없긴 한데.”
“좋아. 다음~”
“.. 어?”
상영의 굳은 표정을 보고 종호는 킥킥 웃으며 얘기했다.
“장난이고, 어떻게 지내는데?”
조금 석이 나간 건지 상영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선택지는 많았는데 유독 나를 원하는 곳이 있더라고.”
“아, 진짜? 어딘데?”
“어딘지 말하긴 좀 그렇고, 이름만 들으면 다 알 법한 학원인데. 원하는 대로 조건은 맞춰줄 테니까 꼭 와 달라고 하길래 고민하다가 결정했어. 뭐, 어떻게 하는지 보고 이직할지 말지 정하려고. 갈 데는 많으니까.”
상영은 스스로의 말이 무척이나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복장도 맞춰입고 왔고.
문제는 본인만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다.
‘이름 들으면 알 법한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구나.’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상영과 달라서 입 밖에 생각을 뱉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어디든 천적은 있는 법이다.
“이야, 상영이 진짜 열심히 했나 보네. 교수님 아픈 손가락 중 하나였는데.”
“..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잘 돼서 좋다는 거지, 짜샤.”
경우와 도연은 누군가 뭘 하든 말든 딱히 관여하는 편이 아니었다.
자신과 관련된 게 아니라면.
그러나 같은 학번인 한종호는 달랐다.
“어딘데 그래? 나 좀 꽂아주면 안 되냐, 상영아? 나 아직 취업 못했는데……”
한종호는 명실상부 박상영의 천적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시비를 거는 건 아니고, 상영의 말에서 느껴지는 허점을 교묘하게 긁는 타입이다.
그걸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지금도 박상영 전용 레이더가 발동한 모양이었다.
“.. 어? 지금은 좀 힘들지.”
“왜?”
“나도 들어온지 얼마 안 됐는데. 나중에 좀 더 자리잡고 얘기해 줄게.”
“오케이. 약속한 거다?”
“.. 어.”
“나이스! 취업 걱정은 굳었다!”
이런 타입이었다.
치고 빠지는 게 기가 막힌다.
그럴 때마다 상영은 어딘가 찜찜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얼마 후에 찾아온 도연의 차례.
“나는.. 작화팀에 들어갔어.”
“작화팀?”
뜻밖의 이야기에 동기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럴 만도 했다.
과 내에서 도연의 진로는 어느 정도 정해진 느낌이었으니까.
“작화팀에 들어갔다구?”
“대학원은?”
“교수님 밑으로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결국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했다.
“어느 작화팀에 들어갔는데?”
과 수석인 서도연이다.
그런 인재가 들어간 작화팀이 과연 어디일지 궁금한 건 당연했다.
그 속에서 도연은 입을 열었다.
“스튜디오 초록.”
***
일자리를 숨길 이유는 없었다.
상영처럼 찜찜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하기 부끄러운 직장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 반대였다.
‘.. 신기해.’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일류 대학인 홍원대 미대에 다니는 걸 밝힐 때도 이렇다 할 감흥은 없었는데.
스튜디오 초록.
그 어감이 주는 묘한 짜릿함이 있었다.
짤막하게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초록님이 만든 작화팀이야.”
“뭐어!?”
“초, 초록님이면.. 그 연두튜브 초록님 말하는 거야? 연두 아빠?”
“대박이다…”
“나 뉴스에서 봤어! 얼마 전에 실검 뜨고 난리였잖아.”
“거기에 도연이 네가 들어가다니…”
“그럼 지금 프로미스 앨범 작업하고 있는 거야? 뭔가 재밌을 거 같다…”
“연두는 실제로 봤어?”
“왜 대학원 안 갔나 했는데.. 초록님 작화팀이면 갈 만 하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진짜 가족같은 분위기일 거 같다고 해야 하나?”
“부럽다… 어때, 도연아?”
생각 이상으로 쏠리는 과한 관심에 도연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가리켰다.
“쟤도야.”
“응?”
“한경우 쟤도 같이 들어갔어.”
꿀꺽.
모른 척 앉아있던 경우가 침을 삼켰다.
“진짜?”
“아, 그래서 같이 온 거구나?”
“뭐야.. 수석이랑 차석이랑 나란히.. 치사하다, 치사해!”
“초록님, 실력 보네…”
“킥킥, 뭘 당연한 걸 그렇게 서운한 듯이 얘기하고 있냐.”
포커스 전환에 성공한 도연.
그 탓에 질문은 분산됐다.
“조건은? 조건은 어때?”
대체로 적당히 넘기는 도연과 달리 경우의 답변은 시원시원했다.
능청스러운 대답.
“내규상 기밀이긴 한데.. 상상을 초월한다. 흐흐.”
“와…”
“역시 초록님.. 진짜 최고의 사장님이다…”
이어지는 질문.
“인원은 몇 명인데?”
“아직은 소규모야. 나까지 포함해서 여섯명. 근데 좀 지나면 이 질문은 대답 못해주겠다.”
“.. 왜?”
“존X 커질 테니까. 그때 되면 한 명 한 명 세기 힘들 거 아냐.”
“킥킥, 자신감 보소.”
거의 기자회견을 방불케 하는 질의응답의 현장이었다.
단 한 명.
이 분위기에 끼지 못하고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 하.”
생각했던 그림이 아니었다.
사실 상영이 집에서 혼자 한 생각들은 망상에 가까웠다.
주목받는 자신.
그런 자신을 다시 봤다는 듯 바라보는 도연의 표정, 그 뒤에 펼쳐지는 러브라인.
머릿속으로 각본을 하나 짜고 온 상영이었다.
“근데.. 살짝 섣불렀던 거 아닌가?”
결국 박상영은 또 악수 중의 악수를 던졌다.
순식간에 향하는 시선.
늘 상영이 주목받는 방식이었다.
“뭔 소리야?”
“아니, 그냥. 교수님이 엄청 아꼈잖아. 대학원 갔으면 앞길은 보장됐을 텐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작화팀 합류를 결정지었을 때, 한경우 역시 똑같이 말하기도 했고.
차이는 타이밍이었다.
지금 상황에 해 봤자 아무런 영양가 없는, 의도가 뻔한 이야기였으니까.
“지금이야 잘 챙겨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혹시 작화팀이 잘 안 되면? 그런 상황에서도 잘 챙겨줄까? 막말로 진짜 안 돼서 사라지지 말란 법도 없고. 그때 되면 대학원은 가고 싶어도 못 갈 텐데..”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
그 분위기를 읽을 정도의 눈치가 상영에게는 없었다.
있었다면 진작에 멈췄을 테니.
나름대로 최대한 걱정하는 뉘앙스로 상영은 말을 이었다.
“혹시나 그렇게 되면 연락해. 그때쯤이면 나도 자리 좀 잡았을 테니까.”
“.. 하아.”
한종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늘 살살 긁어오긴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짜증이 솟구쳤다.
‘분위기 초 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역시 사람은 안 바뀐다.
졸업하고 꽤나 시간이 지났지만 박상영은 여전히 박상영이었다.
종호는 생각했다.
어차피 가라앉은 분위기, 이번에 작정하고 칼춤 한 번 춰 보자고.
“야, 박상……”
그러기 일보 직전이었다.
“걱정 고마워.”
도연의 말에 가로막혔다.
놀라서 얼굴을 보니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뭐지?
여기서 이렇게 반응할 서도연이 아닌데.
“근데 그런 걱정할 필요없을 거 같아.”
도연도 알고 있었다.
박상영은 예전 그대로고 의도도 투명하게 보였다.
그래서였다.
화를 낼 가치조차 없다는 생각이 든 건.
‘전에는 동기였지만.’
이제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
…… 타인이다.
인터넷에서 근거없이 떠들고 악플을 다는 사람과 1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사람에게 화를 내는 건 손해다.
이제는 짜증을 낼 일말의 가치조차 박상영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며칠 뒤에 인터넷 보면 알게 될 거거든.”
“.. 뭐?”
“괜한 걱정이란 거.”
서도연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을 끝맺었다.
“그러니까, 며칠 뒤에 잊지 말고 인터넷 꼭 보라고.”
도연답지 않았다.
아직 나오지 않은 결과를 확실한 듯 이야기하는 건.
오히려 그래서 더 임팩트가 컸다.
쥐 죽은 벙어리가 된 상영을 두고, 동기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뱉었다.
“뭐야..?”
“방금 말 왤케 멋있어, 도연이…”
“다른 게 걸크러쉬가 아니라고. 이게 걸크러쉬지.”
뒤늦게 멋쩍은 듯 포크를 드는 도연.
그런 도연을 경우는 씩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