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659)
659화. 돼지저금통
도시적이고 세련된 느낌의 남자아이.
그냥 노엘이었다.
한 번 머릿속에 그리고 나니 다른 누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응, 레나야.”
“알려줘서 고마워.”
“응, 응.”
“연두한테도 전해줄게. 저녁에 또 전화하자.”
그렇게 앵무새처럼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준석과 눈이 마주쳤다.
스피커폰이 아니라 대화 내용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을 거다.
‘관여할 생각은 없었는데.’
귀 기울여 듣긴 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말이라도 꺼내지 않고서는 입이 간지러워 못 견딜 거 같았으니까.
“.. 사장님.”
결국 입을 뗐다.
내 표정이 진지했던 건지 오준석이 말을 받는다.
“네, 초록님.”
“다른 게 아니라.. 말씀하신 느낌의 모델에 관한 얘기인데요.”
“아, 네.”
“제 주위에 그런 아이들이 있는 거 같아서요.”
흠칫 놀란 그가 얘기한다.
“정말요?”
“네. 한 명은 사장님도 아실 수도 있는데……”
먼저 선동이 얘기를 꺼냈다.
연두튜브에 여러 번 출연한 적이 있기에 오준석이 알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손뼉을 탁 치며 그는 외마디 소리를 뱉었다.
“아!”
“알고 계신가요?”
“물론이죠. 왜 선동이를 생각 못 했을까요.”
상기된 표정을 보니 그리고 있던 모델의 이미지에 잘 부합하는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
내가 보기에도 선동이만 한 아이가 없으니까.
‘호흡을 맞추기도 편하지.’
일주일간의 서울 생활로 나름 연시레와 친분도 가지고 있는 선동이였다.
더할 나위가 없다.
아마 사장님도 그 부분까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모델 섭외가 가능할까요?”
확답을 줄 수는 없었다.
“저도 사장님 말씀을 듣고 막 떠올린 거라서요. 선동이랑 부모님께 의사를 물어봐야 할 거 같아요. 만약 원하신다면 그건 제가 대신 물어봐 드릴 수 있고요.”
“아,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네.”
의외로 선동이에 관한 건 얘기가 빨리 끝났다.
하기야 그렇겠지.
내가 대표님이라도 굳이 선동이를 두고 멀리서 모델을 찾지는 않을 거 같다.
‘내 입장에서도 편하고.’
어디까지나 내가 사진작가를 맡을 경우이긴 하지만 말이다.
생판 모르는 아이를 컨트롤하는 것보다는, 선동이를 비롯한 주변 아이들을 케어하는 게 편한 건 당연했다.
아, 민우만 빼고.
어쨌거나 이제 다음 화제로 넘어갈 차례였다.
“그리고 또 다른 아이 말인데요.”
“.. 또 있나요?”
“네. 방금 레나랑 통화하다가 떠오른 아이거든요. 사장님이 말씀하신 이미지에 부합하는 거 같아서요.”
부합하는 걸 넘어서 일치한다.
마치 도시적이고 세련된 느낌의 남자아이와 노엘이 동의어인 느낌이다.
그래도 기대치를 올려둘 필요는 없겠지.
‘확실하지도 않고.’
선동이도 확정은 아니다.
그런데 노엘은 걸리는 부분이 훨씬 더 많았다.
“.. 그 아이가 누군가요?”
“노엘이라는 아이예요.”
“노엘이요?”
연두튜브에 직접 등장시킨 적은 없기에 오준석이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그가 재차 물었다.
“이름이 노엘인 건가요?”
“네.”
간단히 설명을 덧붙였다.
“노엘은 레나 친구거든요. 레나랑 다르게 혼혈이 아니라 독일인이긴 하지만.”
“아.”
벌써부터 놀란 눈치다.
하기야 내가 말하는 아이의 국적이 독일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 못 했을 테니.
동시에 호기심 어린 표정이다.
“이번에 한국에 놀러 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저도 독일에 갔을 때 본 게 전부라 말씀드리는 게 맞나 싶긴 했는데, 그래도 이미지에 너무 잘 부합하는 거 같아서요.”
“혹시 사진이 있을까요?”
“아마 있을 거예요. 잠시만요.”
찾아보면 있을 터였다.
초상권과 그 밖의 것들을 고려해 연두튜브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금방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슥.
“이 아이가 노엘이에요.”
화면을 향하는 시선.
그와 동시에 오준석의 입이 벌어졌다.
“…”
실소가 나왔다.
홀린 듯 바라보는 게 처음에 내가 노엘을 봤을 때의 반응과 비슷했으니까.
허나 사진은 실제로 보는 것에 비할 바는 못 됐다.
“.. 초록님.”
“네.”
“섭외가 가능할까요?”
세상 진지한 물음.
사진 한 장만으로 완전히 꽂혀버린 거 같았다.
“글쎄요. 얘기는 해 볼 수 있겠지만 가능성이 크지는 않을 거 같아요. 노엘이 하고 싶어 할지도 의문이고.”
그런 성격으로 보였다.
피아노 외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무신경한 성격.
따라서 미지수였다.
다른 조건들이 충족되더라도 노엘 본인이 모델을 하고 싶어 할지.
“그렇군요. 그래도 꼭 좀 말씀 부탁드릴게요. 너무 부탁만 드리는 거 같아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근데 말씀 안 드린 게 있는데……”
“뭔가요?”
사실상 가장 큰 문제였다.
“노엘은 다리가 불편해요.”
“아.”
다시 사진을 본 그는 납득했다.
그야, 사진 속 노엘은 휠체어에 앉아있었으니까.
들려오는 오준석의 말.
“.. 어쩔 수 없겠죠.”
체념하는 듯한 말이었다.
역시 그런가.
헌데 내 생각과는 꽤나 다른 뉘앙스의 말이 이어졌다.
“아이한테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촬영을 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네?”
“근데 노엘이 할 의사가 있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다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모델을 할 수 없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확실히 그랬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노엘의 의사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얘기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 밖에도 여러 이야기를 나눈 뒤에 오준석은 스튜디오를 나섰다.
할 일이 생겼군.
이틀 뒤였다. 노엘이 한국에 도착하는 날은.
***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자마자 연두에게 소식을 전해줬다.
모델 얘기가 아니었다.
내가 전해준 건, 노엘이 한국에 놀러 온다는 소식이었다.
“.. 진짜여?”
생각 이상으로 연두는 좋아했다.
“노엘이랑 약속했어요! 한국 놀러 오면 맛있는 거 사 주기로..!”
“흐음…”
괜히 나는 입을 뗐다.
“그래서 좋아하는 거 맞아, 연두야?”
“.. 으응?”
“노엘이 멋있어서 좋아하는 거 아니야?”
“맞아여!”
이럴 수가.
이렇게 쿨하게 인정해버릴 줄은 몰랐다.
“노엘은 엄청 멋있어여!”
“그럼 선동이는?”
“선동이오빠도요!”
그럼 그렇지.
하마터면 멋있다는 연두의 말에 질투심이 들 뻔했다.
노엘은 그런 아이니까.
그런데 선동이도 멋있다는 걸 보니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근데 멋있는 건 맞지.’
귀여운 면이 더 크지만 선동이도 내 기준에서 무척 멋있는 아이였다.
가장 크게 느낀 건 그때였다.
집에 돌아가기 전, 선동이가 마지막으로 뱉었던 말.
‘의사. 의사가 될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시간이 지나 다시 시골에 갔을 때.
다리가 불편하신 선동이 아버님과, 빼곡히 채워진 문제집들을 보고 생각했다.
멋있는 아이구나 하고.
신이 난 연두를 향해 확인차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민우는?”
“…”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들려온다.
“민우는.. 귀여워여!”
“푸흣.”
멋있다는 말은 안 하네.
이런 걸 보면 진짜 거짓말은 못 하는 연두이다.
그럼 아빠는?
그렇게까지 물으면 너무 속 보일 거 같아 애써 목구멍으로 삼켜냈다.
“연두야.”
“네에.”
“이제 열어야겠네, 돼지저금통.”
연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노엘이 놀러 오면 돼지저금통을 열기로 했는데 그때가 됐으니까.
금세 달려가 가져온 돼지저금통.
“.. 여기여!”
아주 꽉꽉 채웠다.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연두가 말한다.
“아빠..”
“응, 연두야.”
“꺼낼 수 있죠? 마법으로……”
역시 기억하는구나.
가위로 돼지저금통 열면 아파한다는 연두의 말에 뻥(?)을 좀 쳤지.
준비는 완벽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사 뒀거든. 똑같은 모델.
“그럼. 대신 연두는 뒤에 보고 있어야 해.”
“뒤에요?”
“응. 그래야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고개를 돌리는 연두.
“돌아보면 안 된다?”
“.. 네에.”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나는 등 뒤에 숨겨둔 가위를 들었다.
천천히 잘랐다.
정수리에 난 구멍부터 시작해서 돼지의 몸통을.
짜랑. 짜랑.
쏟아지는 동전.
전부 꺼낸 뒤에 나는 미리 준비한 새 돼지저금통을 책상 위에 올려뒀다.
꼭 그때 같다.
마이크래프트를 할 때 연두 눈을 감게 하고 양을 죽였던 기억.
‘.. 어쩔 수 없어.’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동심을 파괴하고 상처를 주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깔끔하게 뒤처리를 한 후에 얘기했다.
“됐어, 연두야.”
스윽.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이는 건 말끔한 새 돼지저금통과 동전들뿐이었다.
“우아..”
“이거면 연두가 노엘한테 사 주고 싶은 거 잔뜩 사 줄 수 있을 거야.”
“네, 아빠..!”
안겨드는 연두.
괜스레 죄책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
“도착했습니다.”
자동차가 멈췄다.
일반 가정집이라 하기에는 그 크기가 다소 웅장한 고급빌라 앞이었다.
운전기사가 내려서 문을 열어줬다.
“이쪽으로 내리시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한 신세연은 말했다.
“기사님.”
“네.”
“혹시 잠깐만 시은이 좀 데리고 있어 주실 수 있나요?”
“알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시은아.”
그럴게 시은이를 두고 신세연은 혼자 집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찾은 본가.
이제는 한 달간 매일 와야 하는 장소였다.
“왔니?”
“.. 엄마.”
딸을 맞이하는 거치고는 다소 까칠한 인사였다.
고개를 까딱하며 재차 묻는다.
“시은이는?”
“기사님이랑 같이 있어.”
“왜 데리고 안 들어오고.”
“할 말 있어서.”
세연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를 대하는 것치고는 무척이나 딱딱한 말투였다.
“시은이 데리고 있는 동안, 쓸데없는 얘기는 안 해 줬으면 좋겠어.”
“쓸데없는 얘기?”
“응.”
“.. 허.”
헛웃음을 내뱉은 윤인주는 말했다.
“얘 좀 봐라? 꼭 내가 손녀한테 못 할 말이라도 한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부탁이야.”
“그러니까 뭘 걱정하는 건데? 엄마가 시은이한테 못 할 말이 뭐길래?”
“… 아빠 얘기.”
“뭐?”
“하지 말아줘. 시은이한테 상처야.”
“…”
윤인주가 미간을 찡그렸다.
“시은이 데려올게.”
돌아서는 신세연.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인주가 입을 뗐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니?”
“.. 뭐?”
“사춘기 온 애처럼 언제까지 그렇게 겉돌 거냐고. 거지 같은 집에서, 거지 같은 회사 아득바득 다니면서. 반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는 생각 안 들어?”
다소 격한 표현이 쏟아졌다.
“적당히 하고 집에 들어와. 너 곧 서른이야.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정신 차리기에는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거 명심해. 내가 너라면 시은이를 생각해서라도……”
“…… 이러는 거야.”
“뭐?”
“시은이를 생각해서 이러는 거라고. 그리고 나도…”
고개를 돌린 세연은 깨문 입술을 지그시 떼며 얘기했다.
“이제 엄마처럼은 절대 안 살아.”
“뭐, 뭐?”
기가 찬다는 표정.
그런 윤인주를 뒤로하고 세연은 문을 나섰다.
금세 번지는 미소.
“들어가자, 시은아.”
“응.”
“감사합니다, 기사님.”
시은이의 손을 잡고 세연은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시은이를 본 윤인주.
“아유, 이게 얼마 만이야. 우리 공주님!”
“안녕하세요.”
“할머니 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요.”
만날 때마다 빚는 마찰에도 불구하고, 세연이 시은이를 본가에 맡기기로 한 이유는 하나였다.
윤인주는 손녀바보였다.
딸인 자신을 대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날 정도로.
“저녁에 데리러 올게, 시은아.”
“응, 엄마.”
그런 세연을 향해 윤인주가 말했다.
“오늘은 안 와도 돼. 시은이는 우리 집에서 재우면 되니까.”
“.. 데리러 올 거야.”
“하여튼 고집은.”
그래도 시은이 앞이라 그런지 한층 풀어진 말투였다.
집을 나서는 신세연.
“우리 아가, 밥 먹었어?”
말 한마디에 곧바로 준비되는 음식.
진수성찬이었다.
안 그래도 큰 식탁을 반찬들이 가득 채웠으니까.
레나의 대저택을 보고도, 시은이가 그다지 놀라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식사가 시작됐다.
식사 내내 윤인주는 방긋방긋 웃으며 반찬들을 시은이 접시 위에 놓아줬다.
그러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먹고 싶거나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할머니한테 말만 해. 알겠지?”
“네.”
무언가 떠오른 듯 시은이가 입을 뗐다.
“할아버지는요?”
“외출하셔서 이따가 들어오실 거야.”
“아, 네.”
식사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둘뿐이었다.
한동안 손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윤인주가 넌지시 입을 뗐다.
“근데 시은아.”
“네.”
“할머니가 궁금한 게 있는데……”
시은이가 숟가락을 내려놨다.
배가 다 차서였다.
애초에 다 먹을 수 있는 양의 음식이 아니었으니까.
“뭔데요?”
좀 전에 있었던 딸과의 대화.
확실히 굳이 사위였던 남자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궁금한 게 있었다.
“요즘 말이야.”
“네.”
“세연이.. 아니, 엄마가 만나는 사람이 있니?”
그건 다름 아닌, 딸의 남자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