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675)
675화. 촬영감독 오선동
슥삭. 슥삭.
세상 야무진 설거지.
민홍임의 눈에 그렇게 비칠 정도면 말이 필요없었다.
연두가 설거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생각보다 더 오래전이었다.
‘.. 아빠, 힘들게따.’
식사가 끝날 때마다 혼자 설거지를 하는 아빠를 보며 생각했다.
생각만 한 건 아니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아빠 옆으로 다가갔다.
‘연두가 도와줄께여..!’
그러나 장벽에 부딪혔다.
접시는커녕 싱크대에도 손이 닿지 않았으니까.
망연자실한 표정의 연두를 향해 주원은 항상 웃으며 말하곤 했다.
‘괜찮아, 연두야.’
‘.. 으응?’
‘지금은 아빠가 할게. 나중에 연두가 싱크대에 손이 닿을 정도로 크면 그때 도와주면 돼. 알겠지?’
아쉽긴 했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두는 키가 크지 않아도 아빠를 도와줄 방법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척!
바로 키가 커지는 거다.
의자 위에 올라가면 일시적이지만 아빠랑 눈높이를 맞출 수 있었다.
설거지도 할 수 있게 됐고.
그 뒤로는, 연두는 꼭 아빠와 함께 설거지를 하곤 했다.
‘여기요, 아빠!’
‘오케이.’
역할 분담도 확실했다.
연두는 세제를 꼼꼼히 문지르는 역할, 주원은 접시를 건네받아 씻어내는 역할이었다.
지금은 아빠가 아닌 할머니가 옆에 있었다.
“…”
왜일까.
민홍임은 멍하니 선 채로 연두가 설거지하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슥.
자그맣게 연두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맞닿았다.
“.. 할머니.”
“어, 어?”
“여기.. 이거 좀 씻어주세여…”
그렇다.
물이 나오는 호스는 민홍임이 서 있는 오른쪽에 있었다.
연두 손이 닿지 않는 위치였다.
무엇보다도 연두는 지금껏 세제를 문지르는 역할밖에 한 적이 없기도 했고.
“그, 그래. 이리 줘.”
얼떨결에 민홍임은 그릇을 건네받았다.
평소라면 역정을 냈을지도 모른다.
방해만 된다거나, 혼자 하는 게 훨씬 편하다거나, 할 거면 혼자 다 하라거나, 할미를 시켜먹는다거나.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겹쳐보이는 장면이 있어서였다.
‘엄마, 여기. 좀 씻어주라. 히히.’
아플 정도로 그리운 얼굴.
씻겨내려가는 세제물 위에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민홍임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부서졌다.
착한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시키지 않아도 엄마를 도와주지 못해 안달인 아이였으니까.
설거지도 그중 하나였고.
“.. 할머니?”
정신을 차리니 보이는 건 아리송한 표정의 연두였다.
그제야 민홍임은 깨달았다.
아직도 아까 건네받은 접시를 들고 있다는 걸.
괜히 그 사실을 의식한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습관처럼 역정을 냈다.
“뭘 그렇게 봐, 요 가시나야. 할미가 설거지를 해야겠어?”
방금 아무렇지 않게 받아든 거 치고는 너무 정반대의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아니, 근데 이 녀석은 어디 갔어? 노인네가 설거지한다고 서 있는데……”
타깃은 다름 아닌 선동이였다.
그렇게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생각지 못한 장면이었다.
“아, 아.”
“…?”
“할머니가 고개를 돌렸습니다.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선동이의 목소리.
두 손에 들고 있는 건, 직사각형 모양의 연두색 카메라였다.
***
“후욱.. 후욱..”
이렇게 숨 쉬기 힘들 정도로 과식을 한 건 오랜만이었다.
축구공처럼 튀어나온 배.
쉽사리 일어나지도 못하고 배를 두드리던 선동이의 눈앞에 펼쳐졌다.
“설거지 연두가 할게요!”
그 말을 듣고 바로 일어나려 했다.
왜냐고?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는 건 생각만으로 웃음이 번지는 일이었으니까.
로망이라고 해야 하나.
‘일어나야 하는데……’
몸이 너무 무거웠다.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미 할머니가 그 자리에 서 있어서 비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조금만 덜 먹을걸 후회하며 선동이는 고개를 뒤로 재꼈다.
‘.. 응?’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연두색 카메라였다.
그 순간, 선동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할 수 있잖아!’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배운 게 있었다.
심지어 연두로부터.
그건 다름 아닌 카메라 사용법이었다.
간단하게는 사진 촬영부터, 동영상 촬영을 하는 방법까지.
‘.. 사진은 이렇게 찍는 거에여!’
‘흐헤.’
‘그리고 동영상 찍고 싶으면.. 이 버튼 누르면 찍을 수 있어요!’
‘흐허허.’
‘.. 선동이오빠?’
‘응? 무슨 일이 있었니?’
그런 식으로 실없이 웃으면서 배우긴 했지만, 한 귀로 듣고 흘린 건 아니었다.
제대로 숙지했다.
그 뒤에는 수차례의 연습도 거쳤고.
찰칵. 찰칵.
카메라의 장점이 있었다.
앵글을 통해서는 아무리 뚫어져라 봐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렇다.
카메라를 쥔 동안은 합법적으로 연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우와…’
너무 자주 넋을 놓게 된다는 부작용도 있긴 했지만.
뭐, 그건 단점이라고도 볼 수 없다.
그런 생각도 했다.
‘치사해.. 이런 걸 혼자만 알고 있었다니.’
질투대상은 주원이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선동이는 팔을 뻗어 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긴 했지만.
“훅.. 후욱…”
떠올린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아저씨가 하는 것처럼 카메라로 설거지하는 연두와 할머니의 모습을 담는 거다.
자신이라고 못 할 건 없었다.
‘.. 좋아. 시작해보자고.’
바로 선동이는 행동을 개시했다.
동영상 모드로 전환한 뒤에 버튼을 누르고 입을 뗐다.
“아, 아. 안녕하세요. 큼큼.”
처음이다 보니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꼭 멘트가 필요한 게 아닌데도 어떤 말이라도 뱉어야 할 거 같은 기분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선동이는 말했다.
“연두부님들, 안녕하세요. 저는 오선동…… 아, 이렇게 말하면 모르겠구나. 저는 감자소년, 그리고 이든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오선동입니다.”
일류 배우 뺨치는 자기소개였다.
멋쩍은 와중에도 감자와 이든 모델 타이틀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선동이.
그 뒤에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후욱..”
거친 숨소리.
그래도 이제 어느 정도 움직이는 건 가능한 수준이었다.
“보이니사요? 아니, 보이시나요?”
발음도 꼬였다.
앵글이 향하는 건 연두와 할머니의 뒷모습이었다.
“지금 연두와 할머니가 같이 설거지를 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레 선동이는 가까이 다가갔다.
연두 쪽으로.
전과 마찬가지로 합법적으로 연두를 바라보며 덧붙인다.
“아, 정말 열심히 하네요. 그런데 할머니는 연두가 준 그릇을 들고만 있습니다. 설거지가 하고 싶지 않은 걸까요?”
국어책을 읽는 듯한 멘트.
그와 별개로 나중에 민홍임이 본다면 등짝 한 대로는 안 끝날 멘트였다.
하필이면 그녀가 넋을 놓고 있는 타이밍이었으니까.
쏴아아!
둘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사이, 계속해서 선동이는 멘트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 할머니?”
줄곧 가만히 있던 민홍임이 연두의 말에 고개를 돌린 건.
정면으로 마주친 시선.
“아니, 근데 이 녀석은 어디 갔어? 노인네가 설거지한다고 서 있는데……”
“아, 아.”
“…?”
“할머니가 고개를 돌렸습니다.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민홍임이 눈을 끔뻑였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연두부님들, 들리시나요. 저한테 뭐 하는 거냐고 묻고 있네요.”
“이 놈의 새끼가……”
촬영같은 걸 신경 쓸 그녀가 아니었다.
“빨리 끄고 설거지 안 해!”
“안 돼요! 연두랑 할머니가 다정하게 설거지하는 컨셉이란 말이에요!”
“뭐? 컨.. 뭐라고?”
“컨셉이요! 할머니는 컨셉이 뭔지도 모르세요?”
“염병.. 이 놈의 새끼가 진짜……”
와당탕!
컨셉이 바뀌었다.
다정한 연두와 할머니의 설거지에서, 할머니가 선동이를 쥐 잡듯 잡는 컨셉으로.
“어억!”
알 수 없는 파찰음과 이어지는 선동이의 비명소리.
그렇게 끝이 났다.
선동이의 첫 동영상 촬영이.
***
숨가쁜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그 흐름에 맞춰 ‘스튜디오 초록’도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괜한 걱정이었어.’
첫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아마 누구에게 물어봐도 실패했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인센티브가 기본 계약금을 가뿐히 뛰어넘었으니까.
‘걸그룹 프로미스는 최대 주가를 달리고 있지.’
작화팀 내외로 들려오는 건 좋은 소식뿐이다.
첫 프로젝트임을 고려하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 뭘 걱정한 거냐고?
‘붕 뜬 느낌이 들지는 않을까 하고.’
말 그대로였다.
지금은 첫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나서 다음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직전 단계다.
즉, 과도기라고 볼 수 있었다.
다음 프로젝트에 대한 부담감이 극에 달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당연한 얘기지만 나 또한 그런 부담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직원들도 그럴 테고.
그게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이 된 건 사실이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일주일 간의 휴식이 끝나고 출근한 뒤에, 그 영향을 몸소 체감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나가 됐어.’
개인이 아니라 힘을 합해서 성공의 맛을 봤기 때문일까.
우리는 팀의 모습에 더 가까워졌다.
전보다 더 자연스럽게 의견을 공유하고 서로를 향해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자연히 준비가 됐다.
다음 프로젝트를 시작할 준비가.
‘섣불리 결정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신중했다.
몇 번이나 미팅을 하며 제안들을 추리고 또 추려냈다.
끝내 남은 선택지는 두 개였다.
좋은 제안들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현재 우리 상황에 최적의 프로젝트를 선택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좋은 선택지가 두 개라면……’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건 더더욱 신중해야 했다.
눈앞의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미팅은 오전과 오후로 나눠서 하루에 진행할 생각입니다. 일정 확인 부탁할게요.”
“네.”
“네, 초록님!”
스튜디오 초록은 제대로 된 외부와의 첫 미팅을 앞두고 있었다.
***
퇴근 시간.
스튜디오에서 나와 팀원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들어가세요, 초록님!”
“내일 뵙겠습니다!”
하나둘 멀어지는 팀원들.
그 사이로 우영이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 가, 우영아? 차 안 타고 가?”
“아, 네.”
“왜?”
“갈 데가 있어서요.”
갈 데라.
뭔가 수상하긴 한데 깊게 물어보지는 않기로 했다.
오늘 귀갓길은 혼자겠군.
부웅.
도로는 한적했다.
열심히 일해서인지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연두가 보고 싶은 거지만.
‘연두만이 아니지.’
반겨줄 사람이 두 명이나 더 있지 않은가.
…… 반겨주려나?
내색은 안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그럴 거라 믿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집.
띠. 띠. 띠. 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매번 반겨주는 연두도 보이지 않는다.
외출한 건가?
집에 있는 게 연두 혼자였다면 패닉이 왔을 테지만, 할머니가 있다는 걸 알았기에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가방을 내려두고 안쪽으로 향했다.
‘부엌에는 없네.’
싱크대가 깨끗했다.
그렇게 내버려두라고 얘기했는데 할머니가 하신 모양이다.
예상은 했지만.
실소를 뱉으며 나는 연두 방문을 열었다.
‘여기도 없고.’
다음은 내 방이었다.
신기하게도 열기 전부터 이 안에는 있을 거 같다는 느낌이 왔다.
그리고 그 느낌은 적중했다.
“…?”
생각지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는 게 문제지만.
“아빠다..!”
반짝이는 눈.
내 눈에 들어온 건 할머니 무릎을 베고 있는 연두의 모습이었다.
옆에는 선동이가 서 있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연두에게 사 준 연두색 카메라를 들고 있다.
‘.. 뭐지?’
잘은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건,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다.
할머니가 무릎을 내어주는 건.
“돼, 됐어. 이제 일어나, 이 년아.”
“네에..”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난 연두가 내게 다가와 안긴다.
이어지는 할머니의 말.
“빨리도 온다, 이 놈의 조대새끼.”
화제전환을 하려는 게 느껴져서 웃음이 나왔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내 앞에 드리운 건.
척.
“.. 아저씨.”
왠지 모르게 퀭한 눈.
그러나 동시에 진지함을 머금은 눈으로 선동이는 입을 뗐다.
연두색 카메라를 내밀며.
“연두의 할머니랑 설거지하기, 재밌는 이야기하기, 다정한……”
알 수 없는 말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끝으로 덧붙이는 한 마디.
“촬영감독 오선.. 아니, 감자소년.”
뭔지 모를 무언가를 준비한 듯한 감자소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