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733)
733화. 남매
-JUNE
화면에 떠오른 건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은이의 눈에 꽂히듯 이 단어가 눈에 들어온 이유는 하나였다.
‘영어..’
시은이는 똑똑한 아이였다.
그러나 영어에 한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왜냐고?
정식 교육과정으로 선화초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는 건 초등학교 3학년부터니까.
그리고 시은이는 1학년이다.
똑똑함과 별개로 선행학습을 하지 않는 이상 배우지 않은 걸 알 수는 없었다.
‘.. 모르겠어.’
구불구불.
본 적은 있어서 익숙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단어가 어떤 발음인지는 물론이고, 각 알파벳의 명칭도 잘 알지 못했다.
모르는 걸 뚫어져라 본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결국 체념한 시은이는 시선을 옮겼다.
스윽.
글씨가 잔뜩 쓰여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메일의 형식을 띠고 있는 글이었다.
-안녕하세요, JUNE님. NEXT의……
또 모르는 단어가 나왔다.
답답함을 참고서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가는 순간이었다.
가까워지는 발소리.
둥.
흠칫 어깨를 들썩인 시은이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몰래 보려던 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그런 상황이 연출된 것 뿐이지.
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모습을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 어?”
노트북을 닫는 순간.
글자들 속에서 스치듯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이번에는 영어가 아니었다.
-초록
초록이라는 단어였다.
보통은 색깔을 떠올리겠지만 시은이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색깔이 아니었다.
궁금했다.
어떤 맥락 속에서 그 단어가 나온 건지.
그러나 한 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툭.
노트북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시은이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알 수 없었다.
침대가 에이수 침대여서인지, 시은이가 가볍기 때문인지는.
끼익.
동시에 열린 문.
신세연의 눈에 비친 건 책을 들고 침대 위에 누워있는 딸의 모습이었다.
“.. 응?”
의문을 담은 혼잣말에 시은이의 몸이 흠칫했다.
들킨 걸까.
그런 상황 속에 이어지는 말.
“웬일로 침대에 누워서 책을 보고 있어, 우리 딸?”
타당한 의문이었다.
혼자 책을 읽을 때 시은이는 항상 정자세로 의자에 앉아서 보는 편이었으니까.
어색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그냥……”
찰나의 순간. 시은이는 생각했다.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고 방금 본 단어들의 뜻을 물어볼까 하고.
허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누워서 보고 싶어서.”
잘 모르겠다.
왜인지 그래서는 안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흐응, 그래?”
그리고 신세연은 조금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애당초 의심이라는 게 거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앉아서 보는 게 좋아.”
“응?”
“편하다고 누워서 보다가 그게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면 습관이 된다니까? 습관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거냐면……”
시작됐다.
한 번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신세연의 잔소리폭탄이.
평소에도 그렇지만 지금은 더더욱 엄마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맴돌았다.
방금 본 단어들이.
***
엄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은이는 책가방에서 공책과 연필을 꺼냈다.
사각. 사각.
여전히 알지 못했다.
방금 본 단어들의 명칭과 발음은.
그러나 그게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JUNE, NEXT, 초록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런 모양이었던 거 같다.
고개를 끄덕이며 시은이는 단어들이 적힌 종이를 곱게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음날.
학교에 가서 시은이는 종이를 펼쳤다.
‘선생님한테 물어볼까?’
뜻을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 생각으로 종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
“.. 시은아!”
연두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란 시은이는 종이를 손으로 가렸다.
“.. 연두야.”
연두한테 비밀은 없었다.
어린이집 때부터 뭐든지 터놓고 이야기하는 단짝친구였으니까.
허나 지금은 예외였다.
종이 안에는 ‘초록’이라는 단어가 적혀있는 건 둘째치고 자신에 관련된 얘기가 아니었다.
엄마 노트북에서 본 내용이었다.
아무리 연두라도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
“으응..?”
연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공교롭게도 종이를 가리는 시은이의 손동작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런 연두를 향해 시은이는 말했다.
“연두야.”
“응.”
“혹시 영어 잘하는 사람 알아?”
“.. 영어?”
“응, 영어.”
두 사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1반의 지우와 선재오빠.
둘 중에 한 명한테 물어본다면 누가 좋을까.
‘둘 다 괜찮아.’
그러나 굳이 고르라면 선재오빠가 좋을 거 같았다.
시은이는 바로 실천에 옮겼다.
동아리시간에 선재오빠를 따로 불러내서 종이를 펼쳤다.
“오빠.”
“Yo.. 시은!”
“이거 무슨 뜻인지 알아?”
지우개로 비운 초록.
자연히 남은 단어는 ‘June’과 ‘Next’였다.
외국생활을 한 건 둘째치고 영어로 된 힙합음악을 즐겨듣는 선재였다.
이 정도의 간단한 단어를 모를 리 없었다.
“쥰..”
“준?”
“준, Nope! 쥬~운. 따라해봐, 체킷!”
“…”
슬슬 열이 올라오긴 했지만 물어보는 입장이니 어쩔 수 없었다.
뜻을 알아내려면.
“쥬운..”
“쏘 굿. 바로 그거야.”
“그래서.. 쥬운이 무슨 뜻인데?”
선재는 브이자를 만들듯 손가락 두 개를 뻗었다.
“첫 번째, 유월!”
“유월?”
그렇다.
일반적으로 ‘June’은 6월이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허나 선재는 생각보다 더 친절했다.
“두 번째, 남자 이름!”
“남자 이름?”
그렇다.
외국생활을 통해 ‘June’이 남자 이름으로 많이 쓰인다는 것까지 선재는 설명해줬다.
시은이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6월이라는 뜻.
엄마의 생일이 6월이라는 게 바로 떠올랐다.
‘그럼 혹시……’
하지만 두 번째 뜻.
‘June’이 남자 이름이라는 건 미궁 속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이어지는 ‘NEXT’의 뜻.
“다음?”
전혀 연관성이 없어보였다.
6월과 남자 이름, 다음, 그리고 종이에는 적혀있지 않은 초록까지.
의문만 더 증폭되는 느낌이었다.
뜻을 알고 나면 실타래 풀리듯 의문이 풀릴 줄 알았는데.
“고마워, 선재오빠..”
“My plaesure.”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선재오빠는 유유히 떠나갔다.
새어나오는 한숨.
아무래도 답은 쉽게 나오지 않을 거 같았다.
***
스튜디오 초록.
어느새 ‘드림 큐!’의 일러스트 작화도 후반부에 들어선 상태였다.
‘훨씬 빨라.’
원래 생각했던 마무리 예정 일자보다 훨씬 빠른 템포였다.
퀄리티도 마음에 들었다.
우스갯소리로 최표식이 말했다.
“초록님, 그때 하신 말씀 기억하세요?”
“어떤 말이요?”
“작업물로 벽지 빈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가 되면 스튜디오 옮기겠다고 하셨던 거요. 그 말 들었을 때 몇 년은 걸리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작업물로도 가득 채우겠는데요?”
확실히 그랬다.
이번에 그린 일러스트 개수를 생각하면 벽지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목표를 빨리 이루는 셈이니 좋다고도 볼 수 있지만 문제가 있다.
‘감당이 안 될 거야.’
온통 캐릭터 사진으로 도배가 될 텐데 도무지 감당이 안 될 거다.
실소를 뱉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각자 그린 것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거 하나만 붙이는 거로 하죠.”
“하하, 동감입니다.”
최표식이 덧붙인다.
“저는 여기가 좋거든요.”
옆에서 팀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씩 덧붙인다.
“맞아요.”
“과장이 아니라 저는 집보다 여기가 더 편하다니까요?”
“그건 좀 과장같은데요, 하나님.”
“악!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경우님, 진짜……”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는 옮길 필요성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공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팀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와중에 유하나가 입을 뗐다.
“가장 마음에 드는 일러스트 하나씩이라…… 다들 뭘 붙일 생각이세요?”
쉽게 고르기 어렵긴 했다.
어떤 일러스트든 내가 그린 거라면 정이 가기 마련이니까.
하나둘 나오는 대답 속에 한경우가 말했다.
“우리 우영님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지 않나요?”
“네?”
“물어보나 마나 예리 아니에요?”
자연히 떠올랐다.
미팅 도중에 예리라는 캐릭터 얘기가 나왔을 때 우영이가 열변을 토했던 게.
그렇다.
예리는 우영이가 가장 과몰입했던 캐릭터였다.
“…”
그런데 이상했다.
우영이 성격상 ‘뭐, 그렇죠.’라고 대답하는 게 일반적인데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때였다.
유하나가 웃으며 입을 뗀 건.
“아니죠. 몰랐어요, 경우님?”
“뭘요?”
“저번에 연두 온 이후로 우영님 최애캐 바뀐 거요. 예리에서 구종현으로.”
흠칫하는 우영이.
한 마디 한 마디에 반응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아니……”
반박하려는가 싶더니 말한다.
“.. 고민중이에요.”
그 말에 팀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지막은 나였다.
“저는 구민아일 거 같네요.”
“역시.. 남매가 나란히 붙을 수도 있겠는데요?”
“흐흣, 그러네요.”
그렇게 수다를 떠는 와중에 서도연이 입을 열었다.
“근데 진짜 대단한 거 같아요.”
“뭐가요?”
“June이라는 작가요. 스토리부터 캐릭터 하나하나 설정까지 다 짰다는데…… 설정 보면서 일러스트 그리다 보면 감탄 나올 때가 많아요.”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저도 호기심 생겨서 알아봤는데 신기하더라고요. 여기저기 유명한 작품에도 이름은 엄청 올렸는데 성별도 불문이라는 게……”
“준인데 남자 아닐까요?”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까다로운 스타일이라 적혀있던데……”
“근데 그런 거 치고는 우리한테는 태클 건 게 하나도 없지 않아요?”
“흐응.. 우리 작화가분들이 태클 걸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해서?”
능청스러운 유하나의 말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역시 분위기메이커다.
그건 그렇고, 나도 궁금한 건 매한가지였다.
‘어떤 사람일까.’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지만 한 번쯤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기회가 생긴다면 말이다.
***
녹음 전날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연두는 선우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종현이오빠!”
“이제는 처음부터 종현이라고 부르는 거냐.”
“히히.”
늘 같은 시간.
이 시간만큼은 서연두와 선우영이 아닌 구민아와 구종현이 되는 둘이었다.
우영이가 입을 뗐다.
“내일이 녹음날이지?”
“네에.”
“이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그런 우영이의 말에 연두는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지막..”
그렇다.
오늘은 녹음을 앞둔 마지막 연습날이었다.
둘은 바로 연습에 들어갔다.
연두는 늘 그렇듯 구민아에 잘 몰입했고, 이제는 적응이 된 우영도 오빠 역할에 꽤 잘 맞춰줄 수 있었다.
그리고 끝이 다가왔다.
왠지 모를 정적을 깬 건 우영이의 한 마디였다.
“고생 많았다.”
“네에.”
연두는 자그맣게 덧붙였다.
“우영이오빠도요..”
“뭐야. 연습 잘 끝내 놓고 목소리가 왜 그렇게 풀이 죽었어.”
“마지막이니까……”
그 안에는 내포되어있었다.
마지막이라는 데서 오는 속상함과, 우영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
그때였다.
우영이가 입을 뗀 건.
“땅콩.”
“네.”
“기죽지 마. 기죽으면 될 것도 안 된다. 그리고……”
무심한 듯 하지만 신경쓰고 있는 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는 연기같은 거 딱 질색이라 하기도 싫고 잘 하지도 못하는데 너는 아니야. 오늘도 그랬어.”
“…”
“진짜 구민아같았으니까.”
연습은 몰라도 실제 녹음에서 상대역이 되어줄 수는 없었다.
허나 와닿았다.
진심이 담긴 우영이의 말은.
“그러니까, 하던 대로만 하고 오라고.”
“.. 우영이오빠.”
입가에 번지는 미소.
어느새 연두의 얼굴에서 서운함과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네! 잘 하고 올께요..!”
“그래.”
미나를 대할 때의 종현처럼 세상 다정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둘은 꽤나 남매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