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735)
735화. 유일무이
십수 년을 업계에 몸담았지만 녹음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상대와 호흡을 맞추는 경우라면 더더욱.
‘이 아이……’
과장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성우로서의 높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따라서 생각했다.
최소한 발목만 잡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시작한 녹음은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몰입하고 있어.’
어설픈 몰입이 아니었다.
눈빛, 표정, 말투, 그리고 제스처 하나하나에서 느껴졌다.
구민아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다는 게.
“민아는 소원이 뭐야?”
“소원?”
“응.”
“오빠가…… 오빠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
테크닉적인 요소는 뒤로 하더라도 엄청난 재능이었다.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다는 건.
‘괜히 피아니스트가 아니란 건가.’
성우에 대한 자부심은 확실하지만 이윤선이 독선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다른 직업 또한 존중했다.
특히나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단지, 어설픈 실력으로 여기저기서 그녀가 몸담고 있는 업계에 발을 들이는 게 싫었을 뿐이다.
피아니스트도 마찬가지였다.
‘성우와 비슷해.’
목소리 녹음하는 걸 직접 보거나 피아노연주를 직관하는 게 아니라면 사람들의 귀에 들리는 건 소리뿐이다.
허나 대부분은 모른다.
그 소리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있는지.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의 연주도 영상을 통해 본 적이 있었다.
‘훌륭한 연주가였지.’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표현하는 데 있어서 나이를 따지는 것만큼 바보같은 일은 없었다.
피아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표현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느낄 수 있었다.
훌륭한 연주가라는 걸.
그리고 지금, 그게 피아노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잠깐 쉬었다 갈까요?”
헤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엔지니어 김형락의 목소리.
이윤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바로 가죠.”
굳이 휴식시간을 둬서 몰입한 상태를 깨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진행하고 싶다.
그녀는 눈앞의 아이를 향해 말했다.
“괜찮지, 민아야?”
이윤선이 아닌 구종현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바로 답이 들려왔다.
연두가 아닌 민아의 목소리가.
“.. 응! 괜찮아, 오빠!”
아까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이 순간.
좁은 녹음실 안에서 둘은 온전히 캐릭터에 몰입한 채로 교감하고 있었다.
***
솔직히 조금 놀랐다.
연습하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연습과 실전은 다르니까.
녹음도 처음인 만큼 처음에는 많이 헤맬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걱정도 했고.’
혼자 녹음하는 게 아니었다.
앞서 이윤선에 대한 설명을 전해들은 만큼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일에 있어서 그녀의 기준은 높을 테니까.
그런 내 걱정은 둘이 녹음실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불식됐다.
‘.. 뭐야?’
헤매는 모습은 전혀 없었다.
바로 연두는 구민아에 몰입했다.
지금껏 본 그 어떤 모습보다도 더 구민아같은 연기력을 선보였다.
신기했다.
앞서 이윤선의 단독연기를 본 직후인 만큼 부담이 됐을 텐데.
“즐기고 계시네요.”
그때였다.
음향 엔지니어 김형락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네?”
“이윤선 성우님이요. 저렇게 즐기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요.”
“아, 정말요?”
“네. 워낙 프로의식이 강한 분이라 항상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펼치시긴 하지만, 그래도 그 이상으로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거든요. 그리고 그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그가 말했다.
“연두도 즐기고 있어서 가능한 거고요.”
그 말을 들은 나는 다시 투명한 창 안으로 연두를 바라봤다.
확실히 감이 왔다.
즐기고 있다는 말의 의미가.
“대단한 아이네요. 첫만남에 이윤선 성우님이랑 저렇게 호흡을 맞추는 게 쉽지 않은데. 심지어 성우분들도 긴장한 나머지 꼭 실수를 하거든요.”
“하하…”
극찬이었다.
그와 별개로 둘의 연기를 듣고 있자니 어딘가 벅차오르는 기분이 느껴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지켜보고 있긴 하지만 나는 완전히 관전자의 역할은 아니다.
‘내가 그렸으니까.’
구민아.
그 캐릭터를 그린 건 나다.
내가 그린 캐릭터를 딸이 연기하고 있는데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게 이상했다.
그것도 저렇게나 몰입한 채로.
‘우영이도 데려올 걸 그랬네.’
내가 구민아를 그렸듯 구종현을 그린 건 우영이였다.
아마 이 연기를 두 눈으로 지켜봤다면 분명히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겠지.
게다가 우영이는 연두의 연습 파트너이기도 했고.
‘재밌었을 텐데.’
그런 우영이의 표정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뭐, 어쩔 수 없지.
우영이 몫까지 두 눈에 확실하게 담는 수밖에.
자연스레 입 밖에 새어나왔다.
“멋진 직업이네요.”
“네?”
“새삼 드는 생각인데 성우라는 직업, 멋진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왜 이윤선 성우님이 자부심을 갖는지 알 거 같아요.”
아차 싶어서 덧붙였다.
“혹시 지금 얘기하면 안 되는 거 아니죠?”
“걱정 마세요. 기본적으로 여기서 하는 말은 안에서는 안 들리게 설계되어 있으니까.”
“휴우…”
조심해야겠다.
괜한 말로 둘의 몰입을 깨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마 지금 보고 있는 이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을 거 같았다.
***
녹음이 끝났다.
짧지만은 않은 녹음이었지만 순식간에 지나간 거 같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만큼 몰입했기 때문이었다.
스윽.
헤드폰을 귀에서 뺐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드는 이윤선의 눈에 들어오는 장면.
“.. 아. 이렇게……”
그만 웃음이 나와버렸다.
헤드폰을 빼려다 선이 엉켜버려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에.
방금의 똑부러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연두였다.
이윤선이 천천히 다가갔다.
“가만히 있어 보렴.”
“…!”
깜짝 놀란 연두가 그대로 정지했다.
얼음이라도 된 듯이.
이윤선은 차분하게 엉킨 선을 풀어준 뒤에 손수 헤드폰도 벗겨줬다.
“됐다. 이제 내려오면 돼.”
“고맙습니다..”
아까와는 명백히 달랐다.
처음에 어색해하던 연두를 도와준 건 그녀가 아닌 김형락이었으니까.
이윽고 대기실에서 나온 둘.
“쭉 한 번 점검하는 동안 잠깐 대화 좀 나누고 계세요.”
김형락의 말에 따라 이윤선과 연두는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주원도 함께였다.
딸의 옆인데도 외부인이 된 듯한 기분에 서글픔을 느끼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 두 연기자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연두는 기억력이 엄청 좋은가 보네.”
넌지시 건네는 말.
구종현에서 이윤선으로 돌아왔지만 목소리는 다정함을 담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연두를 향해 그녀는 덧붙였다.
“대본을 거의 안 보던데.”
그렇다.
연두는 대본을 거의 보지 않았다.
녹음을 하는 내내 연두의 시선이 향하고 있던 곳은 이윤선의 눈이었다.
외우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사실 그 점이 연두를 대하는 이윤선의 태도가 바뀐 주된 이유였다.
‘재능이 있다.’
이윤선은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스스로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재능을 타고났다고 생각했으니까.
허나 그게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재능있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 역시 재능있는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재능은 있는데 노력하지 않는 사람.
‘무너지게 되어있지.’
재능으로 인해 태울 수 있는 불꽃은 일시적이다.
그에 안주하여 노력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주저앉게 되어있다.
모래성처럼.
이윤선은 생각지 못했다.
연두가 대사를 외워왔을 거라고는.
‘적은 양이 아니야.’
장면별로 놓고 보면 대사량이 많지 않았지만 전부 합하면 이야기는 달랐다.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한 두 번 보는 것만으로는 다 외울 수 없다.
연기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대사는 물론이고 대본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한 게 연기니까.
“.. 연습했어여.”
“응?”
“우영이오빠가 그림 다 끝나고 나면.. 같이 맨날 연습했어여. 연두는 민아가 되고, 우영이오빠는 종현이오빠가 돼서……”
“우영이오빠?”
아리송한 이야기였다.
옆에서 들려오는 주원의 설명을 듣고서야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영이는 저랑 같이 작화팀에서 일하는 동료예요.”
그 친구와 매일같이 연습했다는 모양이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연두를 바라보며 주원은 얘기했다.
“한 번은 연두를 데리러 갔는데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구요.”
“어떤 말씀이요?”
“연두 반에 미나라는 친구가 있거든요. 미나를 부르는데 연두가 벌떡 일어나면서 대답했다고.”
“아, 아빠..!”
수줍음 가득한 얼굴.
그 표정을 보며 이윤선은 또 한 번 웃음지었다.
‘편견을 가지고 있던 건 나였구나.’
가벼운 마음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름을 헷갈릴 정도로, 어떤 관점에서는 성우 이상으로 역할에 몰입했다.
최선을 다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노력이 이윤선의 눈에는 아름답게 비쳤다.
“고마워. 내 여동생이 되어줘서.”
진심이 담긴 목소리.
어쩌면 마지막이 될 구종현의 목소리였다.
잠깐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연두는 환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민아의 목소리로.
“응, 오빠..!”
꼭 게임 속으로 들어간 듯한 기분.
주원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녹음은 끝났지만 아직 연두가 민아로서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피아노 녹음.’
구민아의 주요 설정 중 하나인 피아노 신동.
그에 따라 작중에서도 민아가 연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임팩트가 상당한 장면이다.
그런 만큼 구종현 역인 이윤선도 무척 아쉬워했지.
‘아쉽네요. 민아가 연주하는 장면을 꼭 보고 싶었는데.’
그 말에 나는 대답했다.
‘녹음하는 날에 초대할 여건이 된다면 꼭 초대하겠습니다.’
‘빈말 아니고요?’
‘저는 빈말같은 거 할 줄 몰라서요. 그치, 연두야?’
‘네!’
그렇게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녹음 어땠어, 연두야?”
“재밌었어여!
“그래. 재밌어보이긴 하더라. 아빠보다 종현이오빠랑 더 다정해보이던데?”
내가 봐도 유치한 질투다.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이해를 못 한 듯한 표정이다.
짐짓 모른 척 덧붙였다.
“막 그런 거 아니야?”
“.. 으응?”
“민아 연기를 해 보니까 연두보다는 민아가 되고 싶어졌다거나, 아빠보다는 종현이오빠가 더 좋은 거 같다거나……”
그러나 중간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연두의 발걸음이 멈췄으니까.
“.. 싫어여.”
“여, 연두야.”
“연두는 민아 되기 싫어요. 민아 아빠는.. 연두 아빠 아니니까…”
확실히 그랬다.
민아는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화목한 부모님, 멋진 오빠.
그러나 연두 말대로 민아 아빠는 내가 아니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아빠는.. 연두보다 민아가 좋아요..?”
그럴 리가 없었다.
민아가 매력있는 캐릭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최근에 ‘드림 큐!’에서 내가 제일 아끼는 캐릭터로 등극하기도 했고.
우습게도 그 이유는 하나였다.
‘연두를 닮았으니까.’
이런 흐름을 생각하고 꺼낸 얘기는 아니다.
그저 장난에 불과했다.
허나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가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연두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어떻게 연두보다 민아가 더 좋겠어.”
“아빠..”
“민아는 연두가 아닌데.”
같은 이유였다.
민아 아빠가 내가 아니라는 연두의 말처럼, 나 역시 그 누구도 연두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유일무이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무슨 일이 있어도 바뀌지 않을 진실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그 뒤에 눈에 들어온 건 옅게 미소짓는 연두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