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740)
740화. 굴레
연상호가 집을 나선 지 몇 시간째.
아직도 TV에서는 무한상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학생 하성 좀 닮았어요. 그런 얘기 안 들어요?”
“처음 듣는데요.”
정색하며 하는 대답.
무안한 얼굴로 박영수가 특유의 말투로 구시렁대듯 말한다.
“.. 아버지뻘한테……”
“푸핫!”
박진혁은 소파를 데굴데굴 굴렀다.
벌써 배꼽을 몇 번 잡았는지 모르겠다.
손에는 과자가 들려있었다.
‘없는 게 없단 말이지.’
연상호의 집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입이 좀 허전하다 싶으면 냉장고를 열면 된다.
거의 도라이몽 주머니다.
그렇게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데, 귀가 떨어질 듯한 효과음이 들려왔다.
쾅!
“뭐, 뭐야!”
TV에서 나온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괜히 오한이 든 박진혁은 과자를 내려놓고 옆에 있는 막대기를 손에 들었다.
검도용 목검이었다.
매복하듯 벽 뒤에 숨은 박진혁은 숨을 참았다.
‘.. 누구냐.’
연상호.
친구이기에 알았다.
단점을 셀 수 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 유형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굴까.
‘도둑일지도 몰라.’
상호의 재력을 생각해보면 도둑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숨을 참고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발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우악!”
고함과 함께 목검을 쥐고 벽 밖으로 몸을 날렸다.
“우아악! 아악..?”
이런 호들갑이 따로 없었다.
목검을 멈춘 박진혁의 눈에 비치는 건 연상호의 얼굴이었다.
작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 뭐냐?”
어정쩡하게 멈춘 자세.
박진혁은 목검을 쥔 채로 몇 차례 비틀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긴장이 풀린 얼굴로 되물었다.
“너야말로 뭐냐?”
“뭐가.”
“너답지 않게 문을 왜 그렇게 세게 열고 들어오는데? 그 표정은 또 뭐고. 딸 만나고 온 표정이라기에는 사람이라도 하나 죽이고 온 표정 같은데.”
실제로 그랬다.
집을 나설 때 기대감에 차 있던 표정과는 정반대였다.
들려오지 않는 답.
얼마간의 침묵이 흐르고 박진혁이 뒷걸음질 치며 재차 입을 뗐다.
“설마 진짜 죽인 거야..?”
“야.”
“잠깐만, 상호야. 나도 죽일 건 아니지? 우리 친구다? 진짜 나 입 꾹 닫고 있을게. 경찰에 신고도 안 할 거고 아무한테도……”
“헛소리 그만하고 앉아.”
꼴깍 침을 삼킨 박진혁이 말했다.
“.. 아니야? 사람 죽인 거?”
“아니야.”
“진짜 아닌 거지?”
“한 마디만 더 하면 아닌 게 아니게 될지도 몰라.”
연상호는 박진혁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목검 그렇게 쥐는 거 아니야. 그렇게 휘두르면 손 나간다.”
“.. 짜식.”
머쓱한 얼굴로 박진혁이 덧붙였다.
“쓸데없는 데서 스윗하기는……”
그 말과 함께 소파에 앉았다.
리모컨을 들어 무한상사를 끈 뒤에 말을 건넸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딸은 만났고?”
표정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게 좋은 일이 아니었을 거라는 것도.
예상은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더 상황이 안 좋게 흐른 모양이다.
연상호는 쓰러지듯 소파에 몸을 걸쳤다.
“만났어.”
“만났다고?”
“어.”
“근데? 만나기만 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랬으면 네가 이 정도로 화가 나지도 않았을 거고.”
“하아…”
탄식과 같은 한숨을 내쉰 뒤에 연상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 시은이가 아니었어.”
“야, 이 미친……!”
박진혁이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딸을 착각하다니.
얼굴을 모른다고 했을 때부터 불안하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스노우볼이 굴러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평소라면 욕을 퍼부었을 거다.
그러나 지금 그러기에는 아까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살해당할지도 몰라.’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박진혁의 특기였다.
그가 판단하기에 지금은 한발 물러나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아직 전부 듣지도 못했고.
“그래서. 그 모습을 시은이가 본 거야?”
“.. 아니.”
“그럼?”
“시은이만 늦게 나왔거든. 하아.. 시은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헷갈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또다시 입이 간질거린다.
그야, 상호는 맥을 완전히 잘못 짚고 있었으니까.
그런 줄도 모르고 고개를 손바닥에 파묻은 채로 연상호는 말을 이어갔다.
하나하나가 레전드였다.
너무 최악이라 뭘 지적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느낌.
종지부를 찍은 건 연상호의 한 마디였다.
“세연이한테.. 남자가 있었어.”
“남자가?”
“응, 시은이를 데리고 나오더라. 재수 없게 생긴 자식이었는데……”
잘생겼다는 뜻이군.
그 말을 꾹 삼킨 채로 박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하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마지막에 그 자식이 내 귀에 대고 그랬어.”
“뭐라고?”
“이 방법밖에 없었냐고. 시은이를 생각했다면 절대 이러지 못했을 거라고. 근데……”
“근데?”
“그 개자식의 말에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못 했어.”
박진혁은 바로 납득했다.
누군지 모를 그 남자가 완전히 맞는 말을 한 것과 별개로, 연상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한다.
그리고 어느 상황에서도 좋을 대로 답을 찾는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심지어 딸 앞에서.
‘자존심에 치명적인 흠집이 났겠지.’
그렇게 화가 나 있던 것도 납득이 갔다.
중간에 몇 번이고 하고 싶은 말을 참았지만, 우습게도 다 듣고 나니 입 밖에 나오는 말은 하나였다.
연상호를 바라보며 박진혁은 말했다.
“그래서 어쩔 거냐?”
“…”
“포기하게?”
슥.
천천히 고개를 드는 연상호.
이윽고 두 눈이 마주쳤을 때 박진혁은 실소와 함께 내뱉었다.
아주 깊은 한숨을.
***
한편 그 시각.
신세연은 작업실 안에 있었다.
타닷. 탓.
키보드 위의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핸드폰은 꺼 둔 상태였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환경을 추구했으니까.
‘좋아.’
글을 쓰는 건 창의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창의력이 언제나 불타오르거나 일정한 건 아니다.
창의력의 샘.
어떤 날에는 물밀듯 샘솟지만, 어떤 날에는 텅 비어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지금은 전자의 경우였다.
손꼽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이대로라면 계획했던 것들을 예정보다 일찍 끝낼 수 있을 거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손을 떼며 신세연이 내뱉듯 말했다.
“.. 됐다.”
결코 적지 않은 양이었다.
밀려오는 뿌듯함.
한동안 그 상태로 앉아 있다가 신세연은 핸드폰을 꺼내서 전원 버튼을 눌렀다.
떠오르는 대기화면.
‘시은이는 잘 있겠지?’
주원씨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시은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아무래도 일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필요했다.
오롯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그때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이든 촬영 날.
할머니가 촬영장에 찾아가서 벌어진 일을 전해 들었을 때가 떠오른다.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화가 난 나머지 무작정 본가에 찾아가서 말했다.
‘정리할 사람은 따로 있어.’
‘그게 무슨……’
‘엄마를 정리할 거야.’
그 말은 진심이었다.
참고 참다가 곪을 대로 곪아서 내뱉은 말.
그러나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미워도 엄마였으니까.
하루에 수십 통씩 전화가 걸려왔고, 핸드폰을 들고 받을지 말지 수없이 고민했다.
결국 받지 않았지만.
‘반복될 거 같았어.’
자신은 상관없었다.
엄마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상처를 받게 되는 게 싫었다.
하루에 수십 통씩 걸려오던 전화는 어느 순간부터 뜸해지더니 걸려오지 않았다.
이제는 포기한 거겠지.
씁쓸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안도감도 들었다.
‘이제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전원이 켜진 핸드폰.
무의식적으로 잠금을 푸는데 화면에 떠올랐다.
부재중 전화였다.
시은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두 통의 전화가, 그리고 주원씨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와 있었다.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누구한테 전화해야 하지.’
고민은 짧았다.
수신 버튼을 누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왔다.
주원의 목소리였다.
***
세연씨로부터 걸려온 전화.
무의식적으로 수신 버튼을 누른 나는 뒤늦게 아이들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두야, 시은아.”
“네.”
“여기 앉아 있어.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세연씨와 둘이 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
그대로 나는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 주원씨.”
“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알 수 없었다.
다 알고 전화한 건지 아닌지.
선생님과 얘기를 나눴다고 해도, 그 뒤에 있었던 일은 알지 못하겠지만.
결국 나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혹시 선생님이랑 통화하셨나요?”
“아니요.”
불안함을 머금은 목소리.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길래 주원씨한테 먼저 전화했어요. 혹시.. 시은이한테 무슨 일 있었나요?”
역시 시은이를 가장 먼저 걱정한다.
당연하다.
시은이를 맡아주기로 한 나와 시은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와 있는 거니까.
재차 들려오는 목소리.
“.. 주원씨?”
나로서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저번 일로 세연씨가 나한테 얼마나 미안해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숨기고 싶었다.
학교에서의 일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이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만 있었던 게 아니야.’
그 자리에는 시은이도 있었다.
숨기려 한다고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숨겨야 할 일도 아니었다.
엄마로서 알아야 했다.
반대 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테니.
그렇게 판단한 나는 입을 뗐다.
“세연씨.”
“네.”
“시은이는 지금 저랑 같이 있어요.”
불편한 얘기라고 해서 선생님한테 떠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상황에 대해 보다 더 잘 전달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니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하기 전에 한 가지만 먼저 얘기하고 싶은데요.”
“어떤……”
“저한테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전과 같았다.
그녀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알겠죠?”
“.. 네.”
그 뒤에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짧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세연씨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듣고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 그렇게 된 거예요.”
이야기에 가감은 없었다.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 외에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맴도는 정적.
그 정적을 깬 건 세연씨의 한 마디였다.
“지금.. 지금 갈게요.”
무슨 말을 할 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조금 떨리는 거 같긴 했으나 목소리만으로는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우선 방을 나섰다.
연두와 시은이는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별일 없었지?”
애써 미소를 띠며 소파에 앉았다.
“시은아.”
“네.”
“곧 엄마 오기로 했어.”
“엄마요?”
“응.”
“엄마.. 다 알아요?”
순간적으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시은이는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답을 들었다는 듯이.
“냐아..”
누렁이 울음소리만 들리는 정적 속에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인터폰이 울렸다.
곧바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현관문을 열자 눈에 들어오는 장면.
“.. 안녕하세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세연씨가 옅은 미소를 띠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