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820)
화. 산책
아침이 밝았다.
눈을 뜨니 어제 잠들기 전에 했던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고 할머니가 했던 말도.
‘.. 적어도 마음은 열어두라는 얘기다.’
답을 내지는 못했다.
잠깐 생각한다고 해서 당장 명확한 답을 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조금은 정리가 됐다.
적어도 피하지 않고 마주해야 하는 문제라는 건 자각했으니 말이다.
“읏차!”
기지개를 켜고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심란할 이유는 없었다.
왜냐고? 이건 딱히 부정적인 생각도 아니니까.
“일어났어, 주원아?”
그렇다.
당장 내게 말을 건네는 삼촌만 해도 안고 있는 고민이었다.
“네, 삼촌. 잘 주무셨어요?”
“응.”
아이들은 곤히 잠들어 있다.
늦게까지 생각하다가 잠든 내가 더 일찍 일어난 걸 보면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깨우지 말아야지.
어차피 돌아가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니까.
오늘은 시골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아침 식사 시간이 지났는데 할머니가 깨우지 않은 것도 그래서겠지.
푹 자게 두려는 게 분명하다.
슬쩍 오른쪽을 본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 녀석은 얌전히 자는 법이 없네.’
다름 아닌 선동이였다.
이불을 내팽개친 채로 팔다리를 자유분방하게 뻗고서 자고 있다.
도로 이불을 덮어주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나를 본 삼촌이 입을 뗐다.
“잠깐 산책이나 다녀올래?”
“오, 좋죠!”
마침 시원한 공기가 마시고 싶던 참이다.
게다가 삼촌이 먼저 건네는 산책 제안이다.
이건 귀하다.
“잠시만요.”
재빨리 겉옷만 걸치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바로 나가도 돼?”
“네. 어차피 집 근처 걷는 건데요.”
“그래.”
그렇게 집을 나섰다.
마당을 걸어 나간 우리는 무작정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따로 목적지를 말할 필요는 없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와 삼촌은 같은 산책로를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바로 약수터를 찍고 돌아오는 루트였다.
‘좋네.’
선선한 공기, 걸을 때마다 밟히는 낙엽 소리는 힐링이 될 정도였다.
아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그렇게 말없이 걷다 보니 드는 생각이 있었다.
‘.. 신기하단 말이지.’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둘이서 있을 때 편안한 사람과 둘이서 있을 때 어색한 사람.
특히나 낯을 가리는 성격의 내게 있어서 두 부류의 차이는 극명히 드러난다.
전자의 경우는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몇 있었다.
아름이나 주연이.
활달한 성격으로 끊임없이 오디오를 채워서 어색함을 못 느끼게 만드는 녀석들이었다.
그 모습이 꾸밈이 없어서 나도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었고.
굳이 언급은 안 하겠지만 후자의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함께 있으면 어색한 사람.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나만 해도 함께 있는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유형의 인간은 아니었다.
애초에 낯을 많이 가리니까.
나보다 낯을 더 많이 가리는 사람을 만나면 그보다 삭막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얘기를 갑자기 왜 했냐고?
슥.
살짝 고개를 돌리니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삼촌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앞서 말한 두 부류 말고도 또 하나의 부류가 있었다.
삼촌은 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과묵해.’
나보다 말이 없다.
그렇다고 리액션이 강하거나 표정의 변화가 다채로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일까.
삼촌과 함께 있을 때는 조금도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아도 말이다.
보통은 그랬다.
나보다 말 없는 사람을 만나면 억지로라도 말을 걸어서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다 보니 뜬금없는 헛소리를 뱉기도 했고.
그런데 삼촌을 대할 때는 전혀 그런 강박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어색하지가 않으니, 그 있지도 않은 어색함을 풀어야 할 이유가 없는 거다.
삼촌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를 편하게 해 주는 사람.’
나는 그게 무척 빛나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도착한 약수터.
“잠깐 정자에 앉았다 갈까?”
“.. 풋.”
결국 웃음이 터졌다.
방금 한 말이 약수터에 오는 동안 삼촌이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으니까.
그렇다.
우리는 약수터까지 서로 한 마디도 없이 걸어왔다.
묵언수행.
그럼에도 조금의 어색함도 없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재미있었다.
막상 삼촌은 아리송한 얼굴이었지만.
“왜?”
“아니에요. 앉았다 가요, 삼촌.”
“그래.”
그렇게 우리는 정자에 가서 앉았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
‘여기서 연두한테 삼촌이 동화책을 선물했었지.’
그리고 삼촌 무릎을 베고 누워서 잠들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이곳이 삼촌과 마음의 거리를 단숨에 좁히는 계기가 됐던 장소였다.
나와 삼촌도, 그리고 연두와 삼촌도.
“좋네요.”
“그래, 좋네.”
보는 그대로였다.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말을 받아도 신기할 정도로 편안함이 느껴진다.
“주원아.”
그리고 어느 순간.
삼촌은 한 번씩 먼저 말을 건네오기도 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혹시 신경 쓰고 있어?”
“네?”
“어제 엄마가 했던 말.”
그리고 나와 삼촌의 대화는 시작됐다.
***
“우으..”
눈을 비비며 일어난 연두.
좌우로 한 번 뒹굴더니 외마디 의문사를 내뱉는다.
“.. 응?”
아빠가 없었다.
보이는 건 이불을 끌어안고 자고 있는 선동이오빠와 반대쪽에 있는 친구들뿐이었다.
“아빠, 어디 갔지..?”
딱히 심각해진 건 아니었다.
방을 나서면 먼저 일어난 아빠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연두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스르륵.
그러자 눈에 들어온 건 할머니였다.
“할머니!”
“빨리도 일어난다, 요 가시나야.”
“안녕히 주무셨어여!”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연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서 얘기했다.
“아빠는 어디 있어요..?”
“네 아빠가 어딨는지 내가 어떻게 알어?”
민홍임은 툭 던지듯 내뱉었다.
“안 보이는 거 봐선 집이라도 갔나 보지.”
그 한 마디의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흔들리는 눈동자.
그런 연두의 입에서는 떨리는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 집이요?”
충격이었다.
“여, 연두는여..?”
아빠가 혼자 갔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연두를 감쌌다.
신발장으로 달려간 연두.
“없어……”
아빠 신발이 없었다.
울상이 된 연두는 다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연두야?”
마침 일어난 시은이가 연두를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톡 건드리면 울음을 터트릴 거 같은 표정이었으니까.
“왜 그래, 연두야?“
“시은아……”
대화 소리에 하나둘 일어나는 아이들.
세상 모르고 자고 있던 선동이도 눈을 떴다.
그러자 들려오는 말.
“아빠가.. 아빠가 집에 간 거 같아. 그리고 삼촌도……”
“뭐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덜 깬 채로 비몽사몽하고 있던 선동이도 눈을 번쩍 떴다.
“아저씨가 집에 갔다고?”
“.. 응.”
“왜? 무슨 일인데?”
“할머니한테 아빠 어디 갔냐고 물어봤는데.. 집에 갔나 보지 했어…… 그리고……”
“그리고?”
“신발장에 아빠 신발이 없어……”
선동이는 헷갈렸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만약 정말 간 거라면 시골에서의 즐거운 시간이 길어질 테니까.
그래도 연두가 울상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좋아해서는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해, 연두야.”
이번에도 연두를 안심시키는 건 시은이였다.
“집에 간 게 아닐 거야.”
“.. 그럼?”
“생각해 봐. 아저씨가 연두를 혼자 두고 집에 갈 사람이야?”
연두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 다 같이 찾아보자.”
선동이도 말을 더했다.
“그래! 내가 꼭 찾아줄게!”
“나도!”
납량특집 때문일까.
부쩍 협동심이 늘어난 듯한 아이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연두의 마음에도 희망의 불씨가 살아났다.
“.. 응! 고마워!”
그렇게 아이들의 주원 찾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
“혹시 신경 쓰고 있어?”
“네?”
“어제 엄마가 했던 말.”
조금 놀라긴 했다.
여기서 다시 그 얘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그것도 삼촌의 입에서.
“신경……”
왜일까.
무의식적으로 부정하려 했다가 나는 말을 정정했다.
“…… 전혀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렇구나.”
아까 한 얘기와 일맥상통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삼촌은 내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응?”
“제가 신경 쓰고 있을 거라는 거요. 겉으로 티는 안 냈다고 생각하는데.”
말 그대로였다.
어제 할머니 말을 듣고도 나는 일부러 심적 동요가 전혀 없는 것처럼 방으로 들어갔다.
삼촌과 할머니도 그 모습을 봤을 테고.
그런 나를 향해 삼촌은 말했다.
“티 안 났어.”
“그럼요?”
“나도 그러니까.”
“네?”
“나도 신경 쓰고 있으니까, 주원이 너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삼촌은 담백하게 말을 더했다.
“나랑 다르게 주원이 너는 책임져야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더 생각이 복잡하겠지.”
그 몇 마디에서 내 생각과 고민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입 밖으로 실소가 새어 나왔다.
‘누가 공감 능력이 없다고 했냐고.’
무심해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남의 입장을 잘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면서 느낀 삼촌은.
그래서 나도 이렇게 마음을 열고 얘기할 수 있는 거겠지.
“솔직히 맞아요. 어제 복잡해서 늦게까지 잠도 못 잤으니까요.”
“그랬구나.”
“그래서 그런지 좀 의외네요.”
“뭐가?”
“삼촌은 신경 안 쓸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말에 삼촌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보였구나. 혹시 내가 이성에 관심이 없어 보였나?”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당황한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
“그냥 삼촌은 어떤 문제에 있어서도 생각이 확고해 보여서요. 주관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 생각하는가 싶더니 삼촌은 대답했다.
“꼭 그렇지는 않아. 나라고 항상 정답만 고르는 건 아니니까.”
“학창 시절에는 정답만 고르셨을 거 같은데요.”
“거의 그렇긴 했지.”
“하하…”
은근히 킹받는 포인트도 있었다.
이렇게 장난 섞인 말을 던질 때 아무렇지 않게 받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그때였다.
삼촌은 정면을 응시하며 입을 뗐다.
“주원이 너는 봤잖아.”
“네?”
“내가 오답을 고르고 자책하는 걸.”
“.. 아.”
뭘 얘기하는지 바로 감이 왔다.
연두와 있었던 일에 관해 얘기하는 거겠지.
그렇다.
생각해 보면 삼촌도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자책하는 경우가 있었다.
거의 없다시피 해 보이긴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그래.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고.”
“.. 네?”
“괜히 뒷담화를 하는 거 같긴 하지만, 엄마가 하는 말이라고 전부 옳은 것도 아니니까.”
“그럼 삼촌은 할머니가 어제 한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삼촌은 말했다.
“새겨듣되 크게 흔들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결국 주원이 네 삶이니까.”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끝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생각을 좀 덧붙이자면……”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삼촌은 얘기했다.
“주원이 너는 좋은 애야.”
“.. 삼촌.”
“좀 오글거릴 수도 있지만 널 진심으로 사랑해줄 사람이 분명히 나타날 거라 생각해. 그 사람이 주원이 너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면 더 좋겠지.”
짤막한 한 마디가 이어졌다.
“그럼 지금 드는 고민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게 될지도 몰라.”
잘 모르겠다.
다른 누군가에게 들었다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삼촌이 하는 말들은 마음속에 상당한 울림이 있었다.
그래서였다.
“삼촌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들은 말들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어진 건.
“하하, 고마워.”
“저도요.”
내가 하던 고민들의 답이 나온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놀라울 정도로.
그때였다.
내 등 뒤를 바라보던 삼촌이 작게 웃음을 터트린 건.
슥.
그에 따라 나도 고개를 돌렸다.
“하하..”
덩달아 새어 나오는 웃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 아빠..!”
저 멀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