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84)
84화. Speed
“도와줄게요, 형.”
얘는 다짜고짜 본론을 이야기하는 게 습관인 모양이다.
저번에는 전화하자마자 난데없이 만나자고 하더니.
‘그나마 그때는 이해라도 됐지.’
지금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도 가지 않았다. 뜬금없이 전화하고 도와주겠다니.
도움을 청한 적도 없는데 뭘 도와주겠다는 건지 알 턱이 없었다.
연두는 여전히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고.
결국 나는 선우영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네?”
“갑자기 뭘 도와주겠다는 거냐고.”
“그야, 학습지 그림 그리는 거죠. 요즘 그걸로 엄청 바쁘다면서요.”
순간적으로 놀란 나머지 입이 벌어졌다.
가까스로 목소리를 유지한 채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다뇨? 땅콩이 얘기 안 했어요?”
“땅콩? 연두 말하는 거야?”
아차. 너무 자연스럽게 땅콩을 연두라 이해해버렸다.
힐끗 연두를 바라보니 조금 충격받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두 못지않게 나도 당황한 상태였다.
“아까 낮에 땅콩한테 전화 왔거든요. 형 요즘 엄청 바쁘다고 도와달라 그러던데요?”
“연두가 너한테 전화를 했다고?”
“네. 전화 와서 받았더니 땅콩 목소리더라고요. 받자마자 다짜고짜 도와달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게 네가 할 말이냐 물으려다가 그만뒀다.
누구보다 ‘다짜고짜’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녀석이.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연두가 선우영한테 전화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제야 알겠군.’
기억을 되짚어 보니 어떻게 된 건지 알 거 같았다.
어제 집으로 돌아온 연두는 내 핸드폰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다 우영이의 핸드폰 번호가 뭐냐고 물어봤고.
‘생각해보면 엄청 뜬금없는 질문이었네.’
그런데도 내가 눈치채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평소에 워낙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하는 연두였으니까.
그래서 별생각 없이 연락처를 열고, 선우영의 번호를 보여주며 말했다.
‘연두야.’
‘네에.’
‘이게 우영이 오빠 번호야. 이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면 통화할 수 있는 거지. 할머니나 주연이 언니도 마찬가지고.’
언젠가는 알아야 할 기본상식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묻지도 않은 전화를 거는 방법까지 자세히 알려줬고.
당시에 연두는 설명을 들으며 무척이나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걸 알게 돼서 기분이 좋은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우영이의 번호를 알아서 뿌듯해한 거였구나.
연두가 소리 없이 중얼거리던 입 모양의 정체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우영이의 핸드폰 번호를 잊지 않으려 중얼거린 거겠지.
역시나 연두는 똑똑한 아이였다.
사실 눈치 못 챈 게 이상할 정도로 어색했던 점은 많았다.
연두는 내 앞에서 종이에 삐뚤빼뚤 숫자들을 적기까지 했으니까.
선우영의 번호를 적은 게 틀림없었다.
그걸 생각하면 나한테 숨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숨기려고 하면서 그렇게 티 나게 행동할 리 없으니 말이다.
‘내가 묻지 않았을 뿐이지.’
평소처럼 숫자 공부를 하는 거라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즉, 눈치 못 챈 내가 바보였다.
***
내가 어제를 떠올리는 동안, 선우영은 혼자 떠들고 있었다.
“.. 그래서 안 들어줄 수가 없더라고요. 땅콩이 형 위해서 그렇게 간절히 부탁하는데 어떻게 거절을 하겠어요. 물론 제가 보조로 일할 만한 실력은 아니긴 하지만, 특별히 형은 예외로……”
희한하게 이번에는 녀석의 자뻑에 웃음이 나왔다.
평소와 달리 귀엽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재수 없는 것도 이쯤 되니 익숙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마음은 고마운데 사양할게.”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당황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왜요?”
“안 도와줘도 돼.”
내 말에 해맑게 웃고 있던 연두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선우영이 내게 말했다.
“형.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저 돈 안 받을 건데요?”
“하하, 그런 거 아냐.”
“혹시 도와주는 대신 땅콩 한 번 그리기로 한 거 때문에 그래요?”
“.. 처음 듣는 얘긴데, 그것도 아니다.”
“그럼 왜요? 혼자 그리느라 힘든 거 아니에요? 땅콩이 그러던데.”
사실 내 입장에서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받고 싶었다.
특히나 우영이의 그림 실력을 알기에 더더욱 그랬고.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와 우영이는 성향 면에서도 비슷하니까.
‘하지만.’
역량과 별개로 우영이는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학업도 중요할 테고, 그밖에 신경 써야 할 것들도 많겠지.
내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지장을 줄 수는 없었다.
끈질기게 묻는 녀석에게 결국 나는 이유를 대답해줬다.
“힘든 건 사실이야. 그래도……”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을 마쳤다.
그런데 왜인지 알겠다는 대답 대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형. 도움은 필요한데, 제 학교생활이 걱정된다는 거죠?”
“.. 굳이 말하면 그렇긴 하지.”
“와. 저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뭔 소리야?”
“저 그림만 잘 그리는 거 아니에요. 공부는 대충 해도 상위권이고, 공모전 출품할 그림도 오늘 다 그려서 당분간 시간 남아돌아요. 그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이번에도 듣기에 재수 없는 이야기였다. 허나 뭐라 트집을 잡기는 어려웠다.
내가 걱정한 문제들을 단박에 불식시키는 말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조력이 필요했다.
믿고 작업의 일부분을 맡길 수 있는 누군가가 절실했고.
그리고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은 이 녀석뿐이었다.
결국 나는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할 거 엄청 많을 텐데. 괜찮겠냐?”
“당연하죠, 그림인데.”
“그래, 그럼 같이해 보자. 참고로 돈은 줄 거야.”
“네?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함께 그리는데 수익은 독식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학습지를 통해 얻는 수익의 일정 부분은 우영이에게 줄 생각이었다.
만약 학습지가 쫄딱 망한다면 거의 못 주겠지만.
“뭐, 그럼 사양은 안 할게요. 그건 그렇고 하나 질문할 게 있는데요.”
“뭔데?”
“형 저한테 거짓말한 거예요? 동물원에서 물었을 때는 취미생이라면서요.”
나로서는 참 곤란한 질문이었다.
거짓말한 건 아닌데, 상황이 달라진 거니까.
“그때는 맞았어. 근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이렇게 됐네.”
“크크, 그게 뭐예요. 무슨 영화 제목도 아니고.”
선우영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물어보려던 게 하나 더 있는데요.”
“물어봐.”
“형 이름이 뭐예요?”
“.. 내가 그걸 안 말했던가?”
“저도 놀랐어요. 형 이름 모르는 거 깨닫고.”
아직까지 이름도 안 밝혔다니.
황당한 나머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주원이야.”
“생각보다 평범한 이름이네요.”
“하하, 무슨 이름을 기대했길래.”
몇 마디 더 주고받고는 말했다.
“그럼 잘해 보자, 우영아.”
“네. 메일 주소 문자로 보낼게요. 주원이 형.”
“그래.”
툭.
최근에 몇 번이고 고민한 게 있었다.
지금이라도 무리일 거 같다고 연락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
남은 작업량과 시간을 고려하면 도저히 그런 생각을 안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우영이가 도와준다면 부담은 크게 줄어들 터였다.
나도 생각 못 한 조력자를 찾아준 셈이다. 그게 누군지는 굳이 말할 것도 없겠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연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연두는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아..”
“응.”
“연두 잘모태써요..?”
이번에는 평서문이 아닌 의문문이었다.
내가 아까 우영이의 제안을 거절하자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던 연두.
그것 때문에 스스로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우영이 오빠한테 연락한 게 잘못한 일인지.
나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최고로 잘했어, 연두야.”
“.. 진짜요?”
“응. 우영이 오빠랑 같이 그리기로 했거든.”
“그, 그럼 아빠 이제 마니 힘들지 아나도 대요..?”
“그래. 연두 덕분에. 우리 연두, 아빠 많이 생각해 줬구나?”
나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어쩌면 연두는 나보다도 나를 더 걱정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넘칠 정도로 애틋했다.
포옥.
연두가 안심한 표정으로 내게 안겼다.
느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
이틀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여전히 나는 학습지의 작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영이가 돕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유를 부릴 수는 없으니까.’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사실이 변하지는 않았다.
사실 작화를 맡기로 한 후, 서점에 가서 여러 한글 학습지를 펼쳐봤다.
유투브 채널을 만들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거창하게 말하면 사전조사라고 할 수 있었다.
‘솔직히 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
특히 작화면에서는 퀄리티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유명 출판사에서 나온 학습지들도 마찬가지였고.
한글 연습 칸, 큼지막한 그림, 그리고 공백.
이 세 가지 틀을 벗어나는 학습지는 매우 드물었다.
왜일까? 좀 더 공을 들이면 퀄리티를 크게 높일 수 있을 텐데.
서점에 선 채로 나는 이유를 생각해봤다.
생각 끝에 자연스레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작화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야.’
그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할 터였다.
이미 잘 팔리고 있으니 굳이 퀄리티를 높이려는 의지가 없는 걸 수도 있고.
학습지라는 이름에 맞게 학습에만 초점을 맞춘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디자인했을 수도 있다.
큼지막하고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라면 퀄리티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뭐, 그게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
어떻게 보면 타게팅을 잘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퀄리티를 낮추는 만큼 노동력도 적게 들 테니, 기회비용 측면에서도 이득일지 모르고.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내 기준에서 수요층이 아이들이라는 건 그림에 신경 쓰지 않는 근거가 될 수 없었다.
그야, 학습지는 아이들이 학습을 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어야 하니까.
‘아이들이 학습을 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놀이를 하듯 학습에 집중할 수 있게.
그게 가능하도록 만드는 요소가 바로 그림이었다. 생각보다 아이들은 시각적 요소에 민감하니까.
공부를 재미있게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시각적인 요소, 즉 그림으로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아야 했다.
‘내가 생각할 때 이건 기회야.’
기존 학습지의 퀄리티에 맞춘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동용 학습지의 작화가 전체적으로 하향평준화되어 있다는 것.
그건 작화 퀄리티를 높이는 것만으로 차별화가 가능하다는 의미니까.
‘알면서 안 할 수는 없지.’
그게 내가 작화에 공을 들이는 이유였다.
학습 콘텐츠의 퀄리티는 내가 아닌 서지혜의 몫이고.
나는 내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래도 우영이랑 통화하고 나서 심적으로는 전보다 여유가 찾아온 상태였다.
밤을 새워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지양하고 있고.
그 덕에 연두의 걱정도 한층 덜어줄 수 있었다.
그나마 요즘 하는 걱정이라면 하나였다.
‘우영이가 어떻게 그릴 거냐는 거지.’
이틀 전, 우영이에게 작화를 맡길 파트와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작화 도중에 이해가 안 되거나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고.
그런데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서 보내준 건 사실이지만.
혹시나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 전혀 다르게 그리고 있다면 곤란했다.
‘연락해 봐야겠어.’
얼마나 진도가 나갔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 타이밍에 한 번은 작화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툭.
펜을 내려놓고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연락처 버튼을 누르려는데.
위이이잉.
손 위의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호랑이는 아니지만 우영이에게 온 메일이었다.
‘이틀 동안 그린 걸 보낸 건가.’
학교생활을 고려해 일주일 정도 걸릴 걸 예상하고 보낸 파트였다.
이틀이 지났으니, 그렸을 분량은 대충 예상이 갔다.
달칵.
메일을 클릭하니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한 줄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거 주세요, 주원이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