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851)
851화. 달리기
“다 적었어?”
“응.”
“그럼 보여줘. 네가 생각한 방향성.”
의도는 간단했다.
원본 영상을 보고 어떤 식으로 편집해야 할지 생각하는 건 편집자로서의 감이었다.
그 감은 실력과도 연관이 있었다.
물론 더 쉬운 길이 있었다.
영상을 본 뒤에 메일에 명시된 방향성대로 편집을 하는 거다.
그럼 어떻게 될까.
‘잘되겠지.’
주아랑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길을 택하지 않고 구태여 돌아가는 길을 준태에게 강요했다.
비단 준태만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메일 내용을 보지 않은 상태였다.
이유는 하나였다.
‘생각을 포기하는 거니까.’
무엇을 하든 간에 그랬다.
답이 있다고 해서 그걸 바로 확인하는 건 최악의 수였다.
수학을 생각해보라.
실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순간은 답을 확인하기 전에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이다.
편집도 마찬가지였다.
‘센스를 기르는 거지.’
입력값대로 결과를 뽑아내는 건 기계에 불과하다.
편집자는 기계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방향성을 미리 생각해보는 건 효율적인 훈련이었다.
이 정도의 훈련도 따라오지 못할 거라면 진작에 그만두는 편이 낫다는 게 아랑의 생각이었다.
“자, 여기.”
주아랑의 시선이 모니터를 향했다.
화면에는 준태가 생각한 편집의 방향성이 적혀있었다.
아랑의 시선이 멈췄다.
툭.
얼마간 화면을 응시하고 나서야 천천히 시선을 뗐다.
긴장한 표정의 준태.
“잘 봤어.”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신랄한 비평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다소 소심하게 준태가 입을 뗐다.
“저.. 나도 봐도 될까?”
“뭐?”
“네가 쓴 거.”
의외로 아랑은 쿨하게 노트북을 넘겨줬다.
화면을 바라보는 준태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 와.”
그럴 수밖에 없었다.
편집 방향성뿐 아니라 편집에 활용할 수 있는 갖가지 아이디어까지 적혀있었으니까.
나름 디테일하게 적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 모자랐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구나.’
리스펙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의 편집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이 정도로 노력한다는 게.
“앞으로도 이건 계속할 거야.”
“응.”
토를 달지는 않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한 번 해보니 감이 왔다. 이 과정이 엄청난 도움이 될 거라는 걸.
그런 준태를 향해 아랑이 입을 뗐다.
“초록님이랑 비슷한 거. 그게 네 장점이라고 했지.”
“.. 어?”
“인정해. 그건 장점이 맞아.”
실제로 아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또 한 명의 편집자가 뚜렷한 장점 없이 어설픈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골치가 아팠을 거다.
그러나 납득했다.
준태의 장점은 명확했고, 그녀에게도 도움이 되는 장점이었다.
“근데 네가 생각하는 편집자로서의 목표가 초록님처럼 되는 거라면 생각을 고쳐먹는 게 좋아.”
그 말의 의미는 간단했다.
“그게 목표라면 초록님이랑 더 비슷해질 수는 있어도 초록님보다 편집을 잘하게 될 수는 없으니까. 초록님을 대체하는 편집자가 초록님 하위호환이라면 편집자로서의 가치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
준태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초록님처럼 편집을 할 수 있게 되는 게 최종 목표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뭘 목표로 잡아야 되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초록님보다 잘하겠다는 생각으로 해야지.”
확실히 그랬다.
누군가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나서놓고, 기준치를 그보다 더 낮게 두는 건 이상하다.
허나 그 당연한 생각이 준태에게는 어려웠다.
그래서일까.
“그 정도 각오도 없었던 거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해주는 주아랑의 존재가 커다랗게 느껴졌다.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초록님의 기대에, 그리고……
‘기대를 할지는 모르겠어.’
일말의 기대감 없이 금방 떨어져 나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 예상을 뒤엎고 싶었다.
“아니. 해볼게.”
의지에 찬 목소리였다.
***
오늘은 초록연두구역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다름 아닌 예은이였다.
“안녕, 예은아.”
꽤나 오랜만이었다.
학교에서 간간이 인사를 주고받긴 했지만 이렇게 집에 놀러 온 지는 꽤 됐으니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사이에 바뀐 게 있을지도.
톡.
발을 들인 예은이는 심각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더니 말했다.
“좋아. 안전하군.”
“……”
그 한 마디로 확신했다.
예은이는 조금도 바뀐 게 없다는 걸.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며 연두가 말한다.
“안전해, 예은아?”
“응. 마기가 짙지 않아. 아마 수호신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말인데……”
예은이는 연두의 귀에 뭐라 뭐라 속닥거렸다.
수호신.
예은이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 집에는 마기를 정화해주는 수호신이 있었다.
그건 바로 누렁이였다.
귓속말을 마친 예은이가 헛기침을 내뱉자 연두가 말했다.
“알겠어! 누렁이 보러 가자..!”
그러자 눈이 동그래진 예은이가 말한다.
“오, 오해는 하지 마!”
“.. 으응?”
“나는 딱히 누렁이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수호동물을 보고 싶은 거니까!”
누렁이가 많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생긋 웃으며 연두는 누렁이가 있는 곳으로 예은이를 데려다줬다.
여기저기 구석구석 잘 숨는 누렁이였지만, 초록연두구역 안에서는 언니인 연두 손바닥 안이었다.
“.. 찾았다!”
누렁이는 내 방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로 자고 있었다.
인기척에 지금 막 눈을 떴지만.
그런 누렁이를 본 예은이는 상기된 표정으로 목소리를 냈다.
“더 귀여워졌…… 아니, 더 힘이 강해졌어! 이 정도면 여기서는 걱정할 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느새 예은이의 손은 누렁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모습을 보니.
‘연두도 좋아하네.’
잘 모르겠다.
나처럼 예은이 모습을 보고 웃는 건지, 아니면 예은이 말에 반응해서 웃는 건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결국은 웃는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슬쩍 방에서 빠져나온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슬슬 준비해 볼까.’
예은이가 집에 놀러 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가출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때 예은이 언니 예솔이와 함께 예은이를 찾아 나섰지.
예은이를 발견한 건 나와 연두였다.
놀이터에 혼자 있는 예은이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왔던 게 생생히 떠올랐다.
‘예솔이가 예은이를 데리러 왔고.’
나는 둘에게 저녁을 대접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식사를 예은이가 굉장히 즐거워했던 기억이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였다.
이번에도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한 건.
타다다. 다다.
채소부터 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 메뉴는 뭐냐고?
짜장밥이었다.
무려 춘장을 기름에 직접 볶아서 삼겹살을 넣어 만드는 짜장밥.
벌써부터 군침이 고인다.
야채를 다지고, 춘장을 볶고, 야채를 볶고, 소스를 바글바글 끓이고.
과정을 보면 감이 오겠지만 꽤나 요란한 소리와 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나올 기색이 없다.
‘안 들리나 보네.’
나올 때 문을 닫아둬서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누렁이랑 노느라 정신이 없을 수도 있고.
아무튼 그 덕에 거의 요리가 완성됐다.
촤르륵.
전분물을 빙 둘러서 걸쭉하게 농도를 맞춰줬다.
순전히 감의 영역이었다.
밥과 함께 비볐을 때 찰떡이겠다 싶을 정도의 농도를 맞추는 건.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툭.
밥과 짜장을 그릇 위에 올렸다.
그리고 계란을 반숙으로 익혀서 보기 좋게 올려놓는 순간이었다.
방문이 열렸다.
“아빠!”
나를 부르며 문을 열고 나온 연두가 그대로 멈췄다.
눈보다 먼저 반응한 건 코였다.
“…!”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코로 반응하고 난 뒤에 비로소 향하는 연두의 시선을 보니.
“얼른 와, 얘들아.”
이주원표 짜장밥을 대접할 시간이었다.
***
연두가 예은이 손을 잡고 부엌으로 데려왔다.
예은이의 시선이 그릇에 멈췄다.
“이, 이건……”
“아빠가 만든 짜장밥이야!”
그러자 예은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 셰프!”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했더니.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적어도 초록연두구역 내에서는 내가 요리사이니 말이다.
“연두야.”
“네에.”
“예은이랑 같이 손 씻고 올래?”
순식간에 연두는 예은이와 함께 손을 씻고 나왔다.
식탁에 둘러앉았다.
아직 식지 않은 짜장이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었다.
“연두가 먼저 기미 좀 해볼래?”
요즘 내가 밀고 있는 유행어였다.
기미.
다들 알다시피 ‘기미상궁’에서 기미를 쏙 떼 온 거다.
“네!”
힘차게 대답한 연두는 숟가락을 들었다.
“연두가 먼저 기미 해볼게, 예은아..”
그 말과 함께 연두가 숟가락으로 노른자를 톡 터트렸다.
역시 먹을 줄 안다.
윤기가 좌르륵 흐르는 노른자.
그에 더해 짜장과 밥, 그리고 고기 한 덩이까지 야무지게 올려서 입 안에 넣는다.
아암.
쏙 들어가는 숟가락.
그렇게 기미를 한 연두의 얼굴에는 황홀함이 떠오른다.
“맛있어……”
극찬이었다.
기미가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인 식사 시간이었다.
“맛있게 먹어, 예은아.”
왜일까.
엄청 먹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예은이는 몇 번이고 첫입을 떼기를 망설였다.
그러다 조심스레 한 숟가락을 떴다.
개미만 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듯 들려왔다.
“.. 잘 먹겠습니다.”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
연두와 마찬가지로 노른자를 톡 터트려서 짜장밥에 곁들여 먹는 걸 보니.
굳이 맛있냐고 물을 필요가 없었다.
몇 번을 오물거리고 난 뒤에, 예은이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니까.
“……”
그 뒤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본격적으로 우리는 그릇을 비우기 시작했다.
식사를 즐기다가 나는 넌지시 물었다.
“예은이는 매운 거 좀 먹을 줄 아나?”
입 안에 든 짜장밥을 넘기고 난 뒤에 예은이가 답했다.
“먹을 줄 안다. 하지만……”
뒤에 어떤 말을 덧붙일지 감이 왔다.
그래서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내가 듣기로 매콤한 김치는 마력을 공급해준다고 들었는데.”
그 말과 함께 예은이 숟가락 위에 김치 한 조각을 올려줬다.
“설마 몰랐던 건 아니지?”
흠칫하는 예은이.
이윽고 숟가락을 들며 말한다.
“물론이다! 그 정도는 기본이니까!”
야무지게 입 안에 넣는다.
표정 변화가 크게 없는 걸 보니 연두랑 달리 매운맛 내성이 강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말하니 뭔가 웃기네.
‘의외로 다루기 쉽다니까.’
저번에는 당근을 먹였는데 김치도 어렵지 않게 성공했다.
의외로 컨트롤이 쉬웠다.
아주 조금만 예은이 세계관에 몰입하면 되니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연두도 한 번 도전해 볼래?”
그냥은 어려웠다.
불과 얼마 전에 도전한 적이 있었으니까.
‘할 수 있어여..!’
야심 차게 도전한 연두는 물을 몇 잔을 들이켜고도 매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거의 울기 직전이었지.
또 그 모습을 보려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연두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건지 동공지진을 일으키고 있다.
재빨리 나는 정정했다.
“너무 겁먹지 마, 연두야. 그냥 도전하라는 건 아니니까.”
“.. 그럼요?”
“봐 봐.”
김치 한 조각을 들어서 물 안에 넣고 흔들었다.
매운 양념이 씻겨나간다.
이러면 매운맛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많이 덜어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질색할 수 있겠지만 맵찔이 중 맵찔이인 연두에게는 크나큰 도전이었다.
그리고 연두는 결단을 내렸다.
“도, 도전할게요..!”
“오케이.”
나는 김치를 그릇 위에 올려줬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짜장, 밥, 그리고 계란이 차례로 올라가고, 마지막으로 김치 조각이 올라갔다.
눈을 질끈 감고 연두가 숟가락을 입 안에 넣었다.
오물. 오물.
긴장되는 순간.
얼마 지나지 않아 연두의 입이 자그맣게 벌어졌다.
그리고 귓가에 들려왔다.
“.. 있어요.”
“응?”
“김치.. 연두도 먹을 수 있어요..!”
환희에 찬 연두의 목소리가.
***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특히나 나는 그랬다.
맵찔이 연두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
얼마나 긴 세월, 연두가 매운 음식에 고통받았는가.
내 기준 안 매운 김치볶음밥부터 시작해서, 회 먹을 때 실수로 와사비 간장을 먹었던 것, 야심 차게 김치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참패했던 것까지.
그런데 지금 첫 승을 거둔 거다.
“김치.. 연두도 먹을 수 있어요..!”
비록 물에 씻어낸 김치이긴 했지만.
과거의 연두였다면 절대 먹지 못했을 거다.
“축하해, 연두야!”
“헤헤..”
예은이도 짝짝 손뼉을 쳤다.
전혀 공감 못 하는 표정이 웃음을 자아내긴 했지만.
뭐, 당연하다.
맵찔이가 아니면 쉽게 맵찔이를 이해할 수 없으니.
얼마 후에 식탁 위에는 세 개의 텅 빈 그릇이 놓여있었다.
“저기……”
그런 와중에 목소리를 낸 건 예은이였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망설임이 묻어나는 그 목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말없이 나는 그릇에 짜장밥을 더 올려줬고, 예은이는 조용히 한 그릇을 더 비웠다.
“배부르게 먹었으니까 이제 소화를 시켜야겠지?”
빙긋 웃으며 연두를 향해 물었다.
“소화시키는 데 제일 좋은 방법이 뭘까, 연두야?”
잠깐 생각하더니 연두는 답했다.
“달리기!”
원하는 대답이었다.
예은이가 질색하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곧바로 외출준비를 했다.
동시에 나는 연락을 돌렸다.
“좋아.”
세 명에게 연락해서 두 명에게 오케이를 받아냈다.
한 명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고.
이 정도면 훌륭한 성과였다.
“그럼 가 볼까?”
“네에!”
“나는 배가 부르다.. 배가 불러서……”
예은이의 힘없는 혼잣말은 묵살됐다.
그렇게 공원으로 나갔을 때, 이미 내가 연락을 돌린 두 팀이 나와 있었다.
그중 한 명이 걸어오며 말했다.
“안녕, 연두야.”
고개를 돌려 덧붙인다.
“예은이도 안녕.”
여전히 작지만 강해 보이는 1학년 5반의 명실상부 운동회 에이스.
월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