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875)
875화. 콧구멍그램
장보기팀 활동 개시였다.
‘꽤 크네. 부산의 마트도.’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우영이 혼잣말처럼 꽤나 큰 대형마트였다.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마트에 입성한 아이들은 숙소에서 가져온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는 중구난방으로 적혀있었다.
사야 할 재료들이.
“줘 봐.”
종이를 가져간 유리가 한 가지 재료를 추가했다.
그 모습을 본 연두가 묻는다.
“뭐 쓴 거야, 유리야?”
“감자.”
유리는 툭 내뱉었다.
“수제비 만들려면 필요하대.”
“수제비?”
연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완전히 취향을 저격하는 메뉴였으니까.
외출까지 한 상태라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진 참이기도 했고.
“맛있겠다……”
뒤에서 남몰래 입맛을 다시는 지우.
그 소리에 혼자 깜짝 놀라서 눈치를 살피는 게 웃음포인트였다.
“그래서 뭐부터 살까?”
종이를 되돌려주며 유리가 물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 리드하는 역할은 고정되어 있지만 지금은 시은이가 없었다.
장보기.
얼핏 보면 별거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난생처음 장을 보는 사람과 주부 9단이 장을 본다면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인 장보기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할 필요도 없이 후자였다.
“그냥 차례대로 살까?”
유리의 제안.
종이에 적힌 대로 차례대로 장을 보자는 뜻이었다.
가장 단순한 방법이 될 수는 있으나 냉정히 말해서 좋은 전략은 아니었다.
당연하다.
뚜렷한 기준 없이 마구잡이로 적혀있는 재료들이다.
그걸 차례대로 산다는 건 그만큼 긴 동선을 낭비하게 된다는 뜻이다.
“어쩔래?”
장보기 초보가 쉽게 저지르는 실수였다.
별다른 생각 없이 무작정 하나씩 사다 보면 계속해서 겹치는 동선을 밟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뇌정지가 온다.
어디로 가야 하오, 라는 노랫말 같은 상황이 펼쳐지는 거다.
“그, 그럴까..?”
안타깝게도 유리의 재촉에 연두는 수긍하기 직전이었다.
아빠 없이 많은 재료의 장을 보는 게 처음이다 보니 난관에 봉착하고 만 거다.
그건 주아랑이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마트에 가는 차 안에서 아랑과 우영은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대화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잠깐만요.’
출발 전에 아랑은 우영을 따로 불러내서 말했다.
‘무슨 일?’
‘장보기 할 때 개입하지 말아주세요. 도와주는 걸 포함해서.’
의도는 간단했다.
보호자 역할만 수행하고 아이들이 장을 보는 데 있어서 개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설사 헤매는 일이 생기더라도.
다소 공격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투였지만 상대는 우영이였다.
다짜고짜 본론 말하기 화법의 권위자인 우영에 한해서는 맞춤 화법이었다.
‘걱정 마요. 말 안 해도 도와줄 생각 없으니까.’
그 말대로였다.
우영이는 아이들이 헤맨다고 도와줄 위인이 아니었다.
헤매는 아이들을 보며 뒤에서 낄낄 웃거나, 바보 같다고 놀리고 약 올릴 수는 있어도.
“풋.”
지금도 그랬다.
우영이는 그냥 상황이 흘러가는 걸 재밌게 지켜보고 있었다.
아랑도 마찬가지였다.
슥.
말없이 카메라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장보기도 하나의 미션이다.
그냥 장을 보는 거라면 굳이 아이들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어른의 도움 없이 아이들 스스로 장을 보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일이었으니까.
헤매더라도 아랑과 우영의 개입은 없다.
“그래. 그럼 밀가루부터……”
그런 상황 속에서 유리가 발을 옮기려는 참이었다.
“.. 자, 잠깐만!”
유리를 멈추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지우였다.
사실 많이 고민했다.
아까 차에서 유리에게 한 소리 듣기도 했고.
‘너 이상하네.’
‘.. 어?’
‘아무렇지도 않은데 미안하다 그러고. 바보 같아.’
‘……’
바보같아.
과장이 아니라 그 말을 머릿속으로 수백 번은 반복한 지우였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다.
입을 떼려다가도 괜히 나선다고 생각할까 봐 몇 번이나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결국 지우는 용기를 냈다.
‘.. 도움이 되고 싶어.’
스스로의 선택으로 장보기팀이 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장보기팀의 일원으로서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왜?”
고개를 돌린 유리가 조금은 까칠하게 말했다.
“시간 없어. 빨리 사야 돼.”
“그, 그게……”
지우는 눈을 꾹 감고 내뱉었다.
“나, 나한테 생각이 있어!”
그 말과 함께 교차했다.
카메라를 든 손 뒤로 미세하게 올라가는 아랑의 입꼬리가.
***
요리팀은 얼추 상황이 종료된 상태였다.
정확히 말하면 종료라기보다는 일시중지에 가까웠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재료가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양념 만들기 정도였으니까.
‘얼마나 걸리려나.’
조금은 걱정이 됐다.
아이들이 스스로 장을 잘 볼 수 있을지.
어느 정도는 상관없지만 오늘 소화해야 할 일정을 생각하면 너무 지체되는 건 곤란하다.
전화해 볼까.
“……”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기분이 울적해졌다.
유리한테 전화를 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아마 번호를 알고도 유리한테 전화를 걸 수 없는 사람은 세상에 나 하나뿐이지 않을까.
“우와!”
“진짜 예쁘다.. 여기 봐, 시은아!”
임무를 완수한 아이들은 아까 미처 못한 집 구경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러다 혼자 앉아있는 내게로 다가왔다.
“뭐 해요, 아저시?”
레나가 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말한다.
“아저시 힘들어보인다..”
“응?”
“무슨 일 있서요?”
시은이와 월이도 나를 빤히 바라본다.
“심부름 많이 시켜서 지쳤서요?”
“아니요?”
나는 일부러 오버해서 말했다.
“지치기는커녕 완전 신났습니다. 이렇게 멋진 셰프들 요리를 도울 수 있다니.. 얼마나 영광인데요.”
“……”
반응이 석연찮다.
억텐(억지 텐션)이라는 게 아이들에게도 느껴진 걸까.
그때였다.
레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얘기해도 돼요!”
“네?”
“고민 잇스면 언제든지 얘기해도 돼요! 아저시도 고민 잘 들어주니까!”
꽤나 감동이었다.
레나에게 나는 고민을 잘 들어주는 착한 어른인 건가.
시은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월이까지 맞장구쳤다.
“말해 보이소. 혼자 참으면 병 납니더.”
이렇게 좋은 셰프님들을 상사로 둔 나는 행운아였다.
결심했다.
고민을 말하기로.
“사실 고민이 있습니다, 셰프님들.”
그렇다고 필터 없이 얘기할 수는 없었다.
유리가 나를 차단한 거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건 뒷담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나는 조금의 필터를 씌워서 고민을 털어놨다.
“누군가가 저를 피하는 거 같은데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저시를 피한다구요?”
전혀 몰랐다.
내 고민을 듣고서 레나가 발끈할 줄은.
조그마한 주먹을 꾹 쥔 채로 전혀 무섭지 않지만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덧붙인다.
“누구에요! 혼내 줄게요!”
말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투닥거리는 둘인데 상대가 유리인 걸 알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래도 화를 내주는 마음이 고맙게 느껴졌다.
“이상하네요.”
시은이는 혼잣말을 뱉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나를 또 감동하게 만들었다.
“아저씨가 피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응, 응!”
맞장구치는 레나.
그 상황에서 해결책을 내놓은 건 월이였다.
“솔직하게 말해 보이소.”
“네?”
“혼자 고민만 해서는 아무것도 안 됩니더.”
시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사람이랑 대화해 봐야 피하는 이유를 알 수 있으니까요. 아니면 피한다는 게 오해일 수도 있고요.”
레나도 말을 더했다.
“우리도 그랬서요. 그런데 오해였서요.”
언제를 말하는 건지 알 거 같았다.
오해로 인해 연두와 아이들이 갈등을 빚었던 적이 있으니까.
확실히 그랬다.
‘오해일 수도 있잖아.’
어쩌면 전부 내 오해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대화해보지 않고서는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일이고.
좋아. 얘기해보는 거야.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고맙습니다, 셰프님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히히.”
요리팀은 훌륭한 고민 해결사였다.
***
“나, 나한테 생각이 있어!”
“생각?”
고개를 돌린 유리가 물었다.
“무슨 생각?”
“호, 혹시.. 콧구멍그램이 뭔지 알아?”
“뭐?”
콧구멍그램.
듣기만 해도 우스꽝스러운 명칭에 유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난치는 거야, 지금?”
“아, 아니……”
불과 얼마 전이었다.
유준이에게 콧구멍 풀이법에 이어 콧구멍그램이라는 걸 배운 건.
정식명칭은 벤 다이어그램.
‘지우야!’
‘으, 응?’
‘일로 와 봐! 내가 재밌는 거 알려줄게! 킁!’
벤 다이어그램은 고학년 과정이었다.
그런데도 유준이가 알고 있는 건 선행학습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재밌기 때문이었다.
‘.. 우와!’
벤 다이어그램을 우연히 접한 유준이는 감탄했다.
수많은 것들을 몇 개의 동그라미를 사용해서 간단히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건 기준이었다.
심지어 전혀 연관이 없는 것들도 간단히 표현해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색깔이다.
‘빨간색, 주황색, 초록색……’
모든 물건은 색깔이 있다.
색깔에 따라 분류하면 연관성이 없는 많은 물건도 간단히 분류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벤 다이어그램이다.
벤 다이어그램을 깊이 탐구한 유준이는 새로이 이름 붙였다.
‘유준 콧구멍그램!’
앞에 유준을 붙인 이유는 간단하다.
‘벤 다이어그램’에서 ‘벤’은 수학자 이름이었다.
그에 따르면 콧구멍그램을 만든 수학자는 유준이가 되는 셈이었다.
동그라미를 콧구멍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럼 이렇게 콧구멍 네 개로 분류할 수 있는 거야! 큰 콧구멍 하나, 작은 콧구멍 세 개로!’
‘우, 우와……’
고학년 과정인 만큼 초등학교 1학년에게는 다소 어려운 개념이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유준이는 달랐다.
‘어때! 신기하지!’
‘으, 응!’
‘킁!’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설명.
그렇게 지우는 벤 다이어그램이 고학년 과정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새로운 개념을 습득했다.
이름하여 콧구멍그램이었다.
그 개념이 떠오른 건 유리가 첫마디를 내뱉었을 때였다.
‘그래서 뭐부터 살까? 차례대로 살까?’
그 말을 듣는 동시에 머릿속에 콧구멍그램이 스쳐 지나갔다.
수학은 실생활에 활용이 가능하다.
지우는 깨달았다.
종이에 적힌 수많은 재료들을 몇 개의 콧구멍을 활용하면 간단히 표현이 가능하다고.
기준만 제대로 정하면 된다.
“자, 잠깐만……”
종이와 펜을 건네받은 지우는 본격적으로 분류를 시작했다.
콧구멍그램을 활용해서.
“여기는……”
큰 콧구멍에는 한눈에 봐도 많은 채소를 채워 넣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지우는 유준이로부터 배운 개념을 상황에 맞춰 응용하고 있었다.
작은 콧구멍도 마찬가지였다.
“과일, 고기……”
기준에 따라 꼼꼼히 채워 넣었다.
분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채 1분도 되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1분의 투자로 낭비되는 동선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돼, 됐다……”
콧구멍그램을 완성한 지우가 고개를 들었다.
놀란 연두의 표정.
그 옆에 들어오는 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유리의 표정이었다.
“뭐야, 너?”
“…!”
지우가 흠칫 몸을 떨었다.
무서웠다.
역시 괜한 짓을 한 걸까.
그런 생각에 움츠러들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니었잖아.”
“.. 으, 응?”
“바보 아니었잖아.”
극찬을 들은 지우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 한눈에 들어와.’
유리는 똑똑한 아이였다.
비록 벤다이어그램이라는 명칭은 알지 못해도 그 효용은 두 눈으로 보면 알 수 있었다.
엄청나게 간단하다.
이 항목대로 재료를 구매하기만 하면 되니까.
‘.. 콧구멍그램.’
이름이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하긴 하지만 대단했다.
이런 걸 알고 있다니.
종이에 적힌 대로 차례대로 사자는 의견을 낸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연두도 마찬가지였다.
“지우 대단하다……”
순수한 감탄이었다.
콧구멍이 총 다섯 개니 다섯 번만 이동하면 장보기 끝이었다.
그래서일까.
안도한 지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행이다……’
또 날 선 얘기가 들려올 거라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다.
도움이 됐다.
그 사실이 지우를 웃게 만들었다.
아이디어를 낸 걸 넘어서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용기도 가져다줬고.
“그, 그럼…… 제일 가까이 있는 채소부터 살까?”
“좋아..!”
힘차게 카트를 끄는 연두.
그렇게 장보기팀의 대왕콧구멍 공략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