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879)
879화. 니가 가라 하와이
조금 미안할 정도였다.
재밌어서 계속 놀리다 보니 어느새 너덜너덜해진 월이의 표정.
이제 그만해야겠다.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골목길의 벽화들.
‘확실히 퀄리티가 있네.’
지역예술가들이 모여서 마을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하던가.
이 벽화들은 그 결과물이겠지.
그래서인지 생각 이상으로 퀄리티가 높았다.
특히나 몇몇 벽화들은 창의력이 돋보여서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어때, 우영아?”
“괜찮네요.”
우영이도 흥미로운 표정이다.
“재미있을 거 같아요. 벽에 그림 그리는 것도.”
하긴 그랬다.
그림에 일가견이 있긴 하지만 벽화를 그려본 적은 없을 터였다.
나도 그렇고.
“나중에 기회 생기면 그려보자.”
“그런 기회가 있을까요?”
벽화가 필요한 곳은 의외로 많다고 들었다.
애초에 이 마을도 지역예술인들을 모아서 꾸민 거기도 하고.
지역예술인.
어쩌면 우리도 거기 속할 수 있지 않을까.
‘재밌을 거 같아.’
나도 동감이었다.
티셔츠에도 그려보고 메이크업의 일환으로 얼굴에도 그려봤지만 벽에 그림을 그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찌 보면 벽은 훨씬 자유로운 장소였다.
왜냐고?
종이에 비해 면적이 훨씬 넓다는 건 창의력을 뽐낼 수 있는 틀이 그만큼 넓다는 거니까.
“기회가 있으면 할 거지?”
“저야 콜이죠.”
“무보수여도?”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악덕 사장 마인드로 팀원을 부려 먹으려는 의도는 아니니까.
애당초 작화팀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알기로 벽화는 자원봉사의 일환으로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민 없이 대답하는 우영이.
“상관없어요. 평소에 많이 받아서.”
묘하게 뿌듯하다.
팀원이 보수에 만족한다는 건 돈을 주는 사장으로서 기분 좋은 일이니까.
어쨌거나 만족스러운 대답이다.
꼭 한 번 벽화를 그려봐야겠다.
우영이도 그렇지만 나 역시도 한 번 흥미가 생기면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니 말이다.
“우아……”
옆에서 듣고 있던 연두가 말한다.
“진짜진짜 예쁠 거 같아여..”
“뭐가?”
“우영이오빠랑 아빠가 그리는 벽화……”
동감이었다.
자화자찬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우영이는 확실히 잘할 거 같다.
틀을 깨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녀석이니까.
‘안성맞춤인 거지.’
아니면 팀원들을 전부 데려가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잠깐만.
이건 진짜 악덕 사장인가?
직원들한테 일 끝나고 등산 가자고 하는 그런 개념인 건가?
‘.. 생각해 봐야겠어.’
당장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한편 우영이와 연두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당연하지.”
“.. 으응?”
“땡잡은 거라고 보면 되지. 내 그림은 엄청 비싸니까.”
이 자신감이 문제다.
남들이 볼 때 근거 있는 자신감이라 더 재수 없게 보일 때도 있고.
이제 나는 익숙하지만.
궁금한 게 떠오른 건지 연두가 묻는다.
“얼마인데요?”
“뭐?”
“우영이오빠 그림은 사려면 얼마 줘야 해요?”
막상 생각해 본 적은 없는 모양이다.
“글쎄.”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나도 아직 내 그림의 가치를 매겨본 적은 없는데.”
“연두가 모은 돈으로 살 수 있어여?”
“얼마 있는데.”
연두의 대답에 웃음이 터지게 만들었다.
“만삼천삼백 원이여.”
삼백 원까지 빼놓지 않는 디테일.
표정이 진지해서 더 웃겼다.
“.. 풋.”
옆에서 조용히 걸어가던 유리도 웃음을 터트렸다.
황당한 표정으로 우영이가 입을 뗀다.
“뭐야, 미션이야?”
“.. 으응?”
“나한테 만삼천 원 주고 그림 산다 하기. 그런 미션이냐고.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리가 없는데.”
“미션 아니에여!”
“아니겠지. 아무리 감이 없어도 그런 미션을 주겠냐.”
조금은 풀 죽은 얼굴로 연두가 눈치를 보며 묻는다.
“못 사여? 만삼천 원으로..?”
“당연히 못 사지.”
“만삼천 원으로 짜떡 여섯 번 먹을 수 있는데……”
“실컷 먹어라, 짜떡.”
연두가 고개를 푹 숙인다.
순간 눈에 들어왔다.
그런 연두를 보고 흠칫하는 우영이의 어깨가.
너무 심했나?
그렇게 생각하는 표정이다.
“사고 싶었는데.. 나중에……”
궁금했다.
과연 우영이는 여기서 어떻게 반응할까.
일부러 오디오를 비우고 우영이의 반응을 기다렸다.
“내 그림은 땅콩 네가 아무리 돈 모아도 못 사. 그러니까 그 돈으로 짜떡이나 실컷 사 먹어.”
아니, 이 녀석이.
이러면 진짜 미션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다.
연두한테 상처 주기 미션.
월이도 못 참고 한 마디 뱉으려는 찰나였다.
“그냥 한 장 그려줄 테니까.”
“.. 네?”
“싫음 말고.”
툭 내뱉고 앞서가는 녀석.
연두튜브 댓글에 자주 등장하는 유행어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우영쿤, 믿고 있었다고!
역시 연두튜브 공식 츤데레 자리를 쉽게 넘겨주지 않는 우영이였다.
***
벽화는 다양성이 있는 만큼 여러 매력이 공존했다.
퀄리티 자체가 높은 벽화나 창의력 넘치는 벽화가 있는가 하면 이런 벽화도 있었다.
우리를 멈춰 서게 만든 벽화.
아기자기한 그림이 잔뜩 있는데 그걸 하나로 묶어주는 건 사투리였다.
‘말풍선에 사투리가 쓰여있어.’
의도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마 사투리를 구사해 보길 바라며 이 그림을 그린 게 아닐까.
그림을 잘 그린 건 아니다.
그러나 컨셉이 확실해서 재미있었다.
“우영아.”
“네.”
“이거 나랑 해 보자.”
“굳이요?”
“어허. 행님이 하자면 하는 거지. 여기가 어디고. 부산 아이가.”
사실 맞는지도 모르겠다.
되는 대로 뱉어봤다.
그래서인지 옆에서 월이가 쿡쿡 웃음을 터트린다.
“내 먼저 할게.”
벽화에는 간단한 상황극이 가득했다.
내가 가리킨 건 두 남자의 대화였다.
한 명이 오른쪽 길을 가리키고 있고 다른 한 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다.
내가 먼저였다.
“저쪽에서 돌아가는 게 더 빠르다카이.”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우영이가 입을 뗀다.
“머, 머라카노.”
“푸흣.”
시작부터 웃음이 터졌다.
나도 나지만 우영이 사투리가 장난 아니게 어색했으니까.
아이들도 뒤집어지게 웃는다.
“.. 흐흣.”
“사투리 진짜 못한다.”
귀가 빨개진 우영이.
유리 말에 발끈한 건지 괜히 큰소리를 친다.
“야, 너 해 봐. 얼마나 잘하나 보게.”
“오빠보다는 잘할 거 같은데요.”
꽤나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우영이와 유리도 찐남매 케미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우유케미라고 불리기도 했지.
그때는 유리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지금은 반대 구도였다.
한편 연두는 궁금증을 해결하고 있었다.
“머라카노가 무슨 뜻이야, 월아?”
잠깐 생각하던 월이가 답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라는 뜻이다. 상대랑 생각이 다를 때 쓰는 말이다.”
“아하!”
역시 사투리 권위자인 월이였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설명과 해석이 인상 깊었다.
“그럼 이거 우영이랑 유리가 해 볼래? 누가 더 잘하나 보게.”
딱히 보지도 않고 그림을 가리켰다.
잠깐 훑어본 결과 뭘 해도 재미있을 거 같았으니까.
둘 다 빼지 않았다.
역시 경쟁이 붙으니 구도가 재밌어지는구먼.
내가 가리킨 그림을 보자마자 우영이가 입을 뗀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한 번만 더 만나도.”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다.
어떤 대사인지는 뱉고 나서 파악한 거 같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받는 유리.
“와이카노!”
그렇다.
내가 가리킨 그림은 우영이가 만나 달라고 매달리고 유리가 매몰차게 뿌리치는 구도였다.
억울한 표정의 우영이.
“아니, 형! 왜 내가 이런 역할인데요!”
“미안, 몰랐다.”
“……”
우영이 수난 시대.
하기야 살면서 이런 멘트는 처음 뱉어봤을 거 같았다.
그것도 사투리로.
아마 짝사랑도 해 본 적 없지 않을까.
“와이카노! 저리 떨어지라!”
신나서 과몰입한 유리를 향해 얘기했다.
“유리야. ‘저리 떨어지라’는 대사는 없는데.”
약이 바짝 오른 우영이.
역시나 옆에서 유리는 뜻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와이카노는 ‘왜 이러는데’라는 뜻이다. 와이라는데! 와자꾸 이카노! 라고 해도 된다.”
“우아……”
감탄하는 연두.
같은 의미의 말까지 잔뜩 알려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럼 월이가 시범 한번 보여줄래?”
그 말에 월이는 사투리 메들리를 보여줬다.
“나는 다 꼬랐다. 그 핸드백 어디서 샀노? 야, 저 아가씨한테 말 쫌 걸어 봐라. 니가 해라, 쪽팔리게.”
감탄이 나오는 디테일.
정말이지 어색함이 하나도 없었다.
“오빠야, 돈까스 묵고 가자.”
애교 섞인 대사를 뱉고는 수줍은 표정이 떠오른다.
“여까지 할게요.”
“와..”
감탄을 뱉으며 나는 말했다.
“월아. 월이는 진짜 사투리만 해도 되겠다. 엄청 멋진데?”
“아, 아닙니더.”
아닌 게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내 눈에 꽂히듯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다.
두 남자가 마주 보고 앉아있다.
서로를 노려보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림.
‘이건……’
영화 친구의 명장면이었다.
어릴 적에는 둘도 없는 친구였으나 커서 적이 된 장동근과 유우성이 주고받는 대사.
다소 압축되긴 했지만 중요한 대사는 거의 들어있다.
이 장면이 있을 줄이야.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심장이 요동쳤던 기억이 있다.
너무 멋있어서.
“얘들아.”
“네.”
“혹시 이거 해 볼 사람?”
지원자는 연두와 월이였다.
연두가 장동근 역할을, 월이가 유우성 역할을 맡았다.
나는 감독 역할이었다.
“자, 스탠바이.. 큐!”
월이가 스타트를 끊었다.
“마이 컸네, 연두.”
스타트는 완벽했다.
역시 경상도 사람답게 특유의 껄렁한 말투까지 구사하는 월이였다.
놀랍게도 연두도 바로 역할에 몰입했다.
영화를 본 적이 없음에도.
“원래 키는 내가 더 컸다 아이가. 니 시다바리 할 때부터.”
“간단하게 말하께.”
“복좝하게 말해도 된다.”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서 감독인 내가 NG를 낼 뻔했다.
복좝하게는 뭐냐고.
그림과 마찬가지로 둘은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월이가 입을 뗐다.
“하와이로 가라. 거기 좀 가 있으면 안 되겠나? 몇 년만 있으면 예전처럼 다 좋아질끼다.”
지금이었다.
친구의 손꼽히는 명대사 중 하나가 나올 타이밍.
“…… 니가 가라. 하와이.”
“컷!”
재촬영은 없었다.
명장면을 완벽하게 재현해 낸 두 아이였다.
***
여러 장소를 구경했다.
중간에는 감천제빵소라는 곳도 있었다.
감천의 달빛을 닮은 미니 케이크가 시그니처 메뉴였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케이크를 먹으며 생각했다.
“오른쪽 길로 오길 잘했다. 그치.”
“네!”
“우리가 더 재밌을걸? 사진 보여주면 왼쪽으로 간 거 후회할 거야. 특히 이레나.”
이런 와중에도 레나와 경쟁의식을 불태우는 유리였다.
방금 작은 사고가 있긴 했지만.
“꺅!”
발을 잘못 디딘 건지 유리가 걷다가 넘어진 거다.
보기 좋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 아.”
다행히 다친 거 같지는 않았다.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나는 유리에게 가장 먼저 다가간 건 월이였다.
“있어 봐라. 내가 털어줄게.”
의외로 유리는 피하지 않고 월이에게 엉덩이를(?) 맡겼다.
훈훈한 장면이었다.
“됐다. 이제 깨끗하다.”
“.. 때, 땡큐.”
케이크는 넉넉하게 샀다.
그래도 코스 자체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왼쪽으로 갈 걸 하는 후회 같은 건 조금도 들지 않을 정도로 즐거웠으니까.
“……”
이어지는 코스에 바로 그 생각이 깨지긴 했지만 말이다.
왜냐고?
앞을 보면 알 수 있다.
무진장 높다.
위를 바라보는 아이들과 우영이도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옆에는 표지판이 우뚝 서 있었다.
*248계단
제목만 해도 느껴지는 높이.
하이라이트는 설명이었다.
-별 보러 가는 계단이라고도 불린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문득 뒤돌아보면, 현기증으로 눈앞에 별이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거 참 기가 막힌 작명 센스다.
하늘에 별을 보러 오르는 계단이 아니라 현기증으로 별을 보러 가는 계단이라니.
-계단이 248개라 248계단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정말 심플한 이유다.
설명 끝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이들과 우영이와 차례로 눈을 맞췄다.
그리고 입을 뗐다.
“.. 가자.”
“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이 계단에 또 하나의 별칭을 붙여주고 싶다.
-인생
인생이 그렇다.
행복이 있으면 고난이 있기 마련이다.
달콤한 케이크 맛을 봤으니 이제 쓴맛을 볼 차례라는 뜻이다.
“다들 현기증 조심하고.”
“네.”
“아빠도 조심해여..”
고마워, 연두야.
그렇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왼쪽으로 갈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