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880)
880화. 의심
248계단.
그 악명(?)답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넘어지면 큰일나니까 조심해야 돼, 얘들아.”
높은 계단인 만큼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일부러 아이들을 앞으로 보내고 나랑 우영이가 뒤쪽에서 걸었다.
‘그게 안전하니까.’
생각보다 좁은 계단이다.
나란히 올라가서는 아이들을 모두 케어하기는 어려웠다.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 뒤쪽에 서는 게 안전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나저나 문득 궁금해졌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진짜 현기증 때문에 별이 보일지.
“헉.. 헉……”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자면 내가 내는 숨소리는 아니다.
앞에서 나는 소리다.
유리 숨소리는 한층 더 리얼하다.
“.. 헥.”
힘든 와중에도 웃음이 나올 뻔했다.
248계단.
얼핏 듣기에는 그리 안 높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막상 실물을 영접하면 그 생각은 쏙 들어간다.
무진장 높다.
수십 층 아파트 꼭대기를 계단으로 오르는 거랑 별반 차이가 없으니까.
슬슬 나도 고비가 왔다.
‘안 힘들다.. 안 힘들다……’
끊임없이 자기암시를 걸며 계단을 올랐지만 언제까지고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힘들다.’
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름 보호자이자 최연장자인 내가 먼저 휴식을 제안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그렇다.
정말 쓸데없는 자존심이었다.
“괜찮아, 우영아?”
“네.”
의문이었다.
이 태연한 표정은 진짜인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왜 그렇지 않은가.
방구석에서 그림만 그리는 녀석이 체력이 좋은 건 반칙 아니냐고.
나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우영이를 앞세워 휴식을 취하는 데 실패한 나는 아이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꽤나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후아.. 하..!”
일종의 기합을 내뱉으며 앞으로 전진하는 연두.
월이는 어떠냐고?
굳이 언급할 것도 없다.
하나도 힘든 기색 없이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탈초딩이야.’
그리 바람직한 단어는 아니지만 월이는 논외로 두기로 했다.
그렇다면 타겟은 유리였다.
그런 내 마음이라도 읽은 건지 유리가 입을 뗐다.
“못 가!”
그 말에 모두가 정지했다.
“응?”
“더는 못 간다구! 힘들어서 못 가겠어!”
“유리야……”
걱정스러운 눈빛.
나는 놓치지 않고 입을 뗐다.
“어쩔 수 없지.”
“응?”
“조금 쉬었다 가자. 아저씨는 하나도 안 힘들지만 유리가 힘들다고 하니까. 우리는 팀이잖아. 쉬는 것도 다 같이 쉬어야지.”
이 정도면 됐다.
쉬었다 가기에 명분은 충분했다.
그런데……
“나 좀 밀어줘.”
유리가 연두 앞으로 가서 섰다.
“.. 으응?”
“나 좀 밀어달라구.”
이건 무슨 전개지.
쉬었다 갈 생각에 기뻐하던 내 낯빛이 숯처럼 어두워졌다.
“유리야. 그러기보다 그냥 쉬었다 가면……”
“.. 응! 밀어줄께!”
그리고 연두는 지나치게 열정적이었다.
“.. 읏!”
다시 시작된 전진.
내가 뱉은 말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쉬는 것도 다 같이 쉬어야지. 반대로 말하면 가는 것도 다 같이 가야 된다는 거다.
울며 겨자 먹기로 나는 발을 옮겼다.
“나도 도와줄게!”
월이도 손을 보탰다.
조금 우습긴 하지만 연두가 유리의 왼쪽 엉덩이를, 월이가 오른쪽 엉덩이를 맡았다.
조금 지나니 체력이 회복된 건지 유리가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아.. 하아……”
슬슬 끝이 보였다.
문득 계단을 오르기 전에 본 표지판의 문구가 떠올랐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문득 뒤돌아보면, 현기증으로 눈앞에 별이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확인하려면 지금인 거 같았다.
왜냐고?
체감상 지금이 극한으로 힘든 타이밍이니까.
슥.
뒤를 돌아봤다.
아쉽게도 별은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밤이었으면 어쩌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예쁘네.’
별은 안 보였지만 마을의 정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예쁘다.
순수한 감상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이들과 우영이도 멈춰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소를 머금은 채로 나는 물었다.
“혹시 별이 보이는 사람?”
아무도 없었다.
그런 가운에 연두가 자그맣게 입을 뗐다.
“별은 안 보여요. 그런데……”
“그런데?”
“별처럼 예뻐요..”
별처럼 예쁘다, 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별 보러 가는 계단’은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하고.
***
두 개의 코스.
기본적으로 모두 높이 올라가는 코스가 존재했다.
결국 한 점으로 모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힘겹게 오른 왼쪽 팀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 우와!”
레나의 감탄사.
그럴 만도 한 게 바다가 선명하게 보였다.
“예, 예쁘다..”
“응.”
“미뉴리는 바다 못 봤겠지?”
역시 앙숙답게 하는 생각도 비슷했다.
한참 바다를 내려다보다가 시은이가 입을 뗐다.
“이제 내려갈까?”
“응.”
사실상 마지막 코스였다.
여기서 내려가고 나면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니까.
김준태가 입을 열었다.
“마침 저쪽 팀도 거의 도착했다고 하네요.”
코스 길이가 비슷한 만큼 도착시간도 비슷했다.
빠르게 내려가는 두 팀.
목적지에는 감천문화마을의 명물이자 최대 인기를 자랑하는 어린왕자 포토존이 있었다.
그 전에 두 팀이 먼저 재회했다.
“재밌었어, 연두야?”
“응! 바둑이도 만나고 벽화도 구경했어! 그리고……”
자랑하듯 서로의 코스를 공유하는 아이들.
그런 와중에 시은이는 예리한 물음을 던졌다.
“미션은?”
흔들리는 연두의 눈동자.
옆에서 듣고 있던 주원은 아차 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생각 못 하고 있었어..’
미션을 깜빡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 봐도 딱히 짚이는 부분은 없었다.
아이들은 평소대로였다.
만약 미션을 수행했다고 한다면 촬영 중에라도 분명히 어색함을 느꼈을 거다.
‘그래. 못 알아챘을 리가 없어.’
아직 아이들은 미션을 수행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연두도 대답했다.
“아직 못했어..”
“정말?”
“응. 시은이는?”
시은이는 작게 웃으며 얘기했다.
“비밀.”
“그, 그럼 연두도 비밀이야!”
“이미 말했으면서.”
“으으..”
한편 레나와 유리 쪽에서도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하늘마루도 갔서!”
“그게 뭔데?”
“전망대. 거기서 내려다보면 마을이 엄청 예쁘거든.”
겨우 그거냐는 듯 유리는 코웃음을 치며 얘기했다.
“나도 갔는데. 너 별 보러 가는 계단이라고 알아?”
“.. 별 보러 가는 계단?”
이름이 심상치 않았는지 레나가 조금 움츠러든다.
유리는 주도권을 잡을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가면 별이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 별을 봤서?”
“뭐, 본 거나 마찬가지지. 거기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별처럼 예쁘니까.”
“……”
기세에서 밀린 레나.
장소보다는 스토리텔링에서 밀린 느낌이다.
주원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248계단은 언급도 안 하네.’
틀린 말은 없었다.
밝은 면만 부각시킨 감은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서일까.
레나는 결국 필살기를 꺼냈다.
“.. 바, 바다!”
“뭐?”
“나는 바다도 봤서!”
이번에는 유리도 당황했다.
“바다를 봤다고?”
“응, 바다!”
다시 어깨가 올라간 레나.
꽤나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지는 가운에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위기감을 느낀 유리의 말이었다.
“흥. 바다는 어차피 내일 볼 건데 미리 봐서 뭐 한다구.”
문제는 그 뒤의 얘기였다.
“미션은 수행했니?”
“.. 미, 미션?”
“그래.”
유리는 팔짱을 끼고서 말을 이었다.
“보나 마나 못 했겠지. 너는 엄청 티 나는 스타일이니까.”
“너는 했서?”
“그건 비밀이구.”
위기감을 느낀 건 주원도 마찬가지였다.
유리의 말.
빈말일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뭔가 미션을 수행했다는 뉘앙스로 들렸으니까.
혼란스러웠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입을 뗀 건 월이였다.
“억수로 부럽네..”
“응?”
“내도 바다 보고 싶다……”
그러더니 조용히 흥얼거린다.
“여수 밤바다~”
옆에서 해맑은 표정으로 이어 부르는 연두.
“그 조명에 담긴~”
심각한 표정의 주원.
큰일이었다.
이제는 모든 것들이 의심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
타오르기 시작한 의심의 불씨.
그에 따라 나는 탐정 노트를 만들었다.
연두, 레나 : 아직 미션을 수행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
시은, 지우 : 알 수 없음
유리 : 미션 수행 가능성 있음(페이크일까 사실일까……)
월이 : 노래를 부르는 게 수상했음(노래를 부르는 게 미션일까……? 아니, 그건 너무 간단함. 주시할 필요 있음)
지금까지는 이 정도였다.
원래는 한 명도 빠짐없이 맞힐 생각이었으나 이제는 목표가 바뀌었다.
적어도 세 명은 맞힌다.
그래야 탐정으로서 할 말은 있을 거 같았다.
‘한 명도 못 맞히면……’
그런 개망신이 없었다.
좀 더 경각심을 가진 상태로 나는 아이들을 주시하며 이동했다.
최종 목적지는 어린왕자 포토존이었다.
감천문화마을 내에서 가장 유명하고 관광을 온 모두가 반드시 거쳐 가는 스폿이라고 들었다.
‘그럴 만하네.’
커다란 어린왕자 조각상이 앉아있었다.
사람이 별로 없었던 거리와 달리 어린왕자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줄도 서야 했다.
그런데 조금 곤란하다.
어린왕자한테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헐.. 뭐야?”
“대박! 저기 연두랑 초록님이야! 미쳤다……”
“시은이 레나 다 있는데?”
“여행 중인가 봐..”
본디 어린왕자가 받았어야 할 주목을 의도치 않게 뺏어가 버린 느낌이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사진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도요!”
“오, 오빠. 저 진짜 팬인데……”
심지어 우영이도 여고생 무리에게 사진 요청을 받았다.
부산사람은 한 명도 없어 보인다.
하기야 당연하다.
‘우리한테나 관광지지.’
여기가 삶의 터전인 사람들이 어린왕자와 사진을 찍으러 이곳에 방문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팬서비스는 확실했다.
사진을 찍어주는 아이들.
원래라면 질색을 했을 우영이도 귀찮은 표정으로 툭 내뱉는다.
“그래요.”
“우와..”
“감사합니다! 진짜 잘생겼어요!”
그래도 좋은가보다.
잘생겨서일까. 나쁜 남자의 매력인 걸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초록님, 팬이에요!”
우렁찬 목소리.
나도 팬이 있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유성초 스나이퍼어!”
잠깐이지만 손에 고무줄총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난이고……
찰칵.
함께 사진을 찍어줬다.
꽤나 힘겨운 줄 서기 끝에 우리는 어린왕자 옆에 도달했다.
“우선 한 명씩 찍을까?”
“네!”
먼저 단독샷이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시간을 오래 지체할 수는 없었다.
“괜찮아용.”
“천천히 하세요. 정말 괜찮으니까.”
“아니, 천천히 해 주세요.”
“제발요.”
정작 기다리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천천히 하기를 바랐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 반짝이는 눈빛들이 무진장 부담이 됐으니까.
찰칵. 찰칵.
빠르게 단독샷을 찍었다.
어린왕자를 읽은 연두와 시은이의 표정이 유독 밝았다.
설레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연두.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오후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뭔가 묘했다.
예전에 봤을 때는 이게 왜 명대사인가 했는데 이제는 그 감성을 알 거 같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연두 하교 시간이 가까워지면 실시간으로 행복해지니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하고서 아이들은 사진을 찍었다.
생긋 웃으며 어린왕자를 바라보는 연두, 팬심 어린 표정의 시은이, 어린왕자 어깨에 기댄 레나, 소심하게 선 지우, 초면이라 어색해하는 월이, 눈싸움을 하듯 어린왕자를 노려보는 유리까지.
“.. 푸흣.”
결국 웃음이 나왔다.
이제 단체샷을 찍을 차례였다.
“자, 어린왕자 옆에 나란히 서 볼래?”
“네!”
옆에는 어린왕자의 마스코트 중 하나인 여우도 있었다.
나란히 선 아이들.
“포즈는……”
“브이하고 찍자.”
조금 놀랐다.
이든 모델답게 포즈를 주도하는 시은이의 모습에.
“브이?”
“너무 평범하지 않나……”
투덜대면서도 곧잘 따라 하는 유리.
마지막으로 어색하게 브이를 만드는 지우를 확인하고서 나는 촬영 버튼을 눌렀다.
찰칵!
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시은이는 여러 포즈를 주도해서 사진을 찍었다.
“볼 하트.”
“꽃받침.”
포즈는 앙증맞은데 시크한 표정으로 짤막하게 주도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유치하게 하트는……”
“뭐? 꽃받침? 그런 거 싫은데……”
투덜대면서 누구보다 빠르게 포즈를 취하는 유리도 웃겼고.
마지막은 내가 주도했다.
“자, 이번에는 자유 포즈!”
우왕좌왕하는 아이들.
일부러 나는 빠르게 카운트다운을 했다.
“하나, 둘……”
서둘러 포즈를 취하는 아이들.
빙긋 웃으며 나는 지체 없이 마지막 숫자를 뱉었다.
“…… 셋!”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눈에 들어왔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지우와 뻣뻣하게 서서 카메라를 보는 유리, 그러나 나를 놀라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연두였다.
쪽.
포즈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냅다 옆에 있는 유리의 볼에 뽀뽀해버린 거다.
새빨개진 유리의 얼굴.
“뭐, 뭐야!”
“헤헤..”
덕분에 기막힌 사진이 나왔다.
그렇게 마지막 단체샷을 끝으로 감천문화마을의 마지막 코스인 어린왕자 포토존에서의 시간도 끝이 났다.
즐거움이 가득했던 마을 탐방이었다.
“그럼 가 볼까?”
“네에!”
허나 나는 몰랐다.
그 타이밍에 벌써 네 명의 아이가 미션 수행에 착수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