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89)
89화. 최흥만
왜 진작에 그 생각을 못 한 걸까. 예쁜 옷을 못 산 걸 아쉬워하기만 했지.
엄청나게 단순한 해결책이 있다는 걸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 아빠아?”
내 표정변화를 눈치챈 건지 연두가 입을 열었다.
뜬금없지만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든 채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연두를 보니.
새 옷에 새 신발, 예쁜 액세서리까지 착용한 연두는 치명적일 정도로 귀여웠다.
양손의 쇼핑백도 연두가 드니 패션 아이템이 된 느낌이다.
그 상태로 연두는 내가 말을 꺼내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의외로 힘들다니까.’
생각보다 연두에게 표정을 숨기는 건 힘든 일이었다.
어떨 때는 깜짝 놀랄 정도로 내 기분을 알아차리는 연두니까.
뭐, 지금 상황에는 표정을 숨길 이유가 없긴 하지만.
나는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연두야.”
“네에.”
“아빠 진짜 바보인가 보다.”
내 말에 연두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빠 엄청 똑또캐요..!”
“하하, 그래.”
역시 발끈하는구나.
누군가 내 험담을 하는 것만큼은 절대 못 참는 연두였다.
설사 그 험담을 하는 대상이 나라도 말이다.
‘그건 그렇고.’
내가 생각한 단순한 해결책. 그건 오늘 쇼핑 목표 속에 숨어있었다.
오늘의 쇼핑목표는 ‘범재가 선물한 원피스’만큼 예쁜 옷을 사는 거였다.
그리고 범재의 아버지는 작은 쇼핑몰을 운영한다고 했지.
작은 온라인 키즈쇼핑몰을 말이다.
‘그럼 범재 쇼핑몰에서 사면 되잖아!’
예쁜 옷을 사는데 굳이 백화점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작은 쇼핑몰이라고 해도 연두색 원피스만 팔 리는 없으니까.
다른 예쁜 옷도 상당히 많겠지.
원피스의 가격은 내가 기억하기로 11만 원이었다.
‘그때 가격표를 봤을 때는 센 가격이라 생각했는데.’
오늘 ‘버디’라는 브랜드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브랜드 가치를 고려하더라도 73만 원은 내 기준치를 한참이나 넘어섰으니까.
아직도 생각하면 신기했다. 아동복이 그렇게 비쌀 수 있다는 게.
솔직히 방금까지만 해도 조금 울적한 기분을 느꼈다.
‘너무 비싸서 못 샀다는 게 슬펐으니까.’
연두에게 어울릴 걸 알면서도 사주지 못했다는 게 슬펐다.
그러나 이제는 깔끔히 미련을 버릴 생각이었다. 해결방안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나는 빙긋 웃으며 연두를 향해 말했다.
“아빠 전화 한 통만 하고 가자, 연두야.”
“누구한테여..?”
“안경 낀 오빠한테 전화할 건데. 기억나?”
일부러 바로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연두는 폴짝 뛰며 대답했다.
“범재 오빠!”
“하하, 역시 우리 연두.”
“구, 구럼 연두도 범재 오빠랑 저나해도 대여..?”
“당연하지.”
못 만난 지 한참 됐는데도 잊어버리지 않은 연두였다.
범재는 물론이고, 동건이와 주연이까지.
실제로 틈만 나면 연두는 녀석들의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녀석들이 그걸 알아야 하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바로 범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는 편이 좋으니까.
쇼핑몰 사이트를 물어보려는 의도였다.
틱.
빠르게 전화가 연결됐다.
이제는 익숙해진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주원이 형?”
왜인지 놀란 목소리였다.
“왜 그렇게 놀라?”
“아뇨. 형한테 먼저 전화 오는 건 처음이라.”
“아…”
그러고 보니 먼저 범재한테 연락한 적은 없구나.
범재가 연두 보고 싶다고 전화한 적은 꽤 있지만.
이거 괜히 죄지은 기분인데.
나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했어.”
“뭔데요?”
“저번에 네가 연두한테 선물한 원피스 있잖아.”
“아, 네. 연두색 원피스 말이죠?”
“응. 그 원피스 연두가 되게 잘 입고 있거든. 예뻐서.”
일단 칭찬으로 환심을 사기로 하자.
예상대로 범재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네요. 입고 나올 때마다 뿌듯하던데.”
“응?”
“연두튜브에 자주 입고 나오잖아요.”
“아, 그치. 연두가 제일 좋아하는 옷이니까.”
“제일 좋아하는 옷.. 그 정도예요?”
“응, 그 정도야.”
“오우 쉣.”
“…”
다소 격한 감탄사에 잠깐 말문이 막혔다.
하긴, 동건이가 워낙 짓궂어서 묻히는 감이 있지만.
범재도 만만찮게 장난기 많은 녀석이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아버님 쇼핑몰 사이트 좀 알려줄 수 있어? 연두 옷 좀 사주려고 하는데.”
“아빠 쇼핑몰에서요..?”
“.. 곤란할까?”
“아뇨, 저야 좋죠. 근데 형.”
“응.”
“차라리 직접 와서 구경하는 거 어때요? 마침 저 아빠 포장 도와주고 있거든요. 여기 되게 가까운데.”
생각도 못 한 뜻밖의 제안이었다.
포장이라면 옷 포장을 얘기하는 걸 테고.
그럼 지금 있는 곳은 작업실 같은 장소인가?
“아버님한테 민폐 아닐까? 바쁘실 텐데.”
“에이, 아빠 하나도 안 바빠요.”
이어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범재와 범재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소리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범재가 말했다.
“아빠도 환영한다는데요?”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곤란했다.
됐으니까 쇼핑몰 주소나 알려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실 그런 문제를 떠나서, 이건 내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었다.
어떤 옷이든 입어보고 사는 편이 좋으니까.
인터넷 쇼핑은 입어보고 사는 게 불가능하다.
그게 유일하게 걸렸던 문제인데, 이러면 자연스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럼 더 사양은 안 할게.”
“크크, 나이스. 제가 문자로 주소 찍어드릴게요.”
“알겠어. 근데 범재야.”
“네, 형.”
아까부터 연두가 내게 눈빛으로 통화를 갈구하고 있다.
‘빨리 바꺼주세여..!’라고 말하는 거 같다.
할 말을 마쳤으니 약속대로 연두를 바꿔줄 차례였다.
“연두가 너 바꿔 달라는데. 잠깐 통화할래?”
“…”
왜인지 잠깐의 침묵이 일었다.
그러다 굉장히 떨리는 범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옆에 연두 있어요?”
나에서 연두로 바뀐다고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괜히 섭섭하네, 이거.
“크흠.”
심지어 목소리까지 가다듬는다, 이 녀석.
이윽고 범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형, 그.. 연두가 저 기억하고 있을지도 잘 모르겠는데.”
“당연히 기억하지. 근데 갑자기 왜 최흥만 목소리를 내고 그래?”
“최, 최흥만이라뇨, 형!”
“하하, 장난이야. 바꿔줄게.”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연두에게 건넸다.
연두는 핸드폰을 두 손에 꼭 쥔 채로 말했다.
“범재 오빠아..?”
“… 여, 연두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서인지 연두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연두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헤헤, 범재 오빠 목소리다..!”
“그래, 나 범재 오빠야. 기억나니, 연두야?”
“네에. 기억나요, 오빠…”
“푸흡.”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난데없이 웃음이 터졌다.
대화 내용이 왜 이렇게 슬픈 건데. 꼭 상봉한 남매가 하는 대화같다.
저번에 편의점에서 동건이와 연두가 나눈 대화 맥락도 이랬던 거 같은데.
그나저나 안 봐도 알 거 같았다. 지금 범재 녀석이 짓고 있을 표정을.
***
통화가 끝난 후, 나는 곧바로 범재가 보내온 위치로 향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라 부담은 없었다.
들렀다가 바로 집으로 가면 될 테니까.
‘상황이 이렇게 되니 드는 생각이지만.’
아동복의 사넬 ‘버디’에서 옷을 사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그곳에서는 하나만 샀어도 오늘 쇼핑예산이 전부 거덜 났을 테니까.
참았기에 이렇게 좋은 기회가 온 거지.
이게 바로 충동구매를 지양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거의 도착했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 근처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큼지막하게 적힌 글자가 있었다.
[푸른공원]공원에서 기다리면 범재가 마중을 나오기로 했지.
저쪽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면 될 거 같았다.
한편 연두는 여전히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들고 있었다.
안에 든 건 옷이 전부라 그리 무겁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 걱정이 된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 무거워, 연두야? 아빠가 들어줄까?”
연두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대답했다.
“안 무거어요! 연두가 들 수 이써요..!”
“하하, 그래?”
“네에. 아빠눈 안 무거어요..? 연두보다 마니 큰데…”
“괜찮아. 아빠는 힘이 세니까.”
장난스레 말하며 양손의 쇼핑백을 힘껏 들어 보였다.
“우아…”
이런 유치한 힘자랑에도 놀란 표정으로 감탄사를 내뱉는 연두.
그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조금 걸어서 벤치에 도착한 나는 연두랑 나란히 앉아 말했다.
“근데 연두야. 아까 범재 오빠랑 통화했잖아.”
“네에.”
“기분이 어땠어?”
“.. 조아써요! 마니 생각나서……”
“응? 뭐가 생각나?”
“아빠랑 가치 출군했던 거!”
출근이라. 연두의 입에서 나온 것치고는 고난도 단어였다.
기특하게도 전에 알려준 걸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연두는 신나서 말을 이었다.
“연두가 아빠랑 가치 이쓰면… 언니오빠들 와써요..! 예뿐 주여니 언니랑, 동거니 오빠, 구리고 범재 오빠..!”
“하하, 진짜 다 기억하는구나?”
“네!”
지금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함께 출근한 날들이 연두에게 무척 좋은 기억일 거라는 거.
당연히 그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도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겠지.
방금 연두가 언급한 녀석들 말이다.
‘뭐,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녀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시간들 속의 주인공은 나와 연두였다.
정말이지 내게는 꿈같은 시간이었다.
무료한 일상이 순식간에 반전됐던 꿈같은 시간.
물론 지금도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지만.
“그럼 우리 연두. 지금은 아까보다 더 기분 좋겠네? 이제 범재 오빠 진짜로 보는 거니까.”
“네, 조아여…”
웃음 짓는 연두를 보니 또 장난기가 올라왔다.
결국 나는 충동을 못 이기고 입을 열었다.
“그럼 연두야.”
“네에.”
“.. 아빠가 더 좋아, 범재 오빠가 더 좋아?”
요즘 이런 유치한 질문을 하는 빈도가 유독 늘었다.
우습지만 연두를 만난 이후로 나는 상당히 유치해졌다.
어쩌면 다섯 살 연두보다 더 유치할지도 모르겠다.
문득 전에 들은 말이 떠올랐다.
‘윤영이 누나가 그랬지.’
연두가 자주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할 거라고. 그럴 때마다 진심 어린 마음을 표현하는 게 좋다고.
최근 들어 하는 생각이지만, 그건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인 듯하다.
이런 유치한 질문을 던져서까지 확인받으려 하는 걸 보면.
할머니가 이런 나를 봤다면 분명 ‘아주 주접을 떠네, 조대새끼.’라고 했을 거다.
하지만 나도 나대로 항변할 말이 있었다.
“아빠.”
“응?”
“아빠가 더 조아요..!”
이런 딸이 있는데 유치해지지 않는 아빠는 없을 테니까.
연두는 물어볼 때마다 항상 망설임 없이 대답해줬다.
아빠가 더 좋다고.
이 대답을 듣기 위해서라면 조금 유치해지는 건 상관없었다.
“아빠도.”
“으응..?”
“아빠도 연두가 좋아.”
“헤헤…”
이럴 때마다 매번 보는 미소인데도 참기가 힘들다.
귀여워서 가만히 있는 게 불가능한 웃음이니까.
쇼핑백도 옆에 뒀겠다. 망설임 없이 애정표현을 하기로 했다.
단번에 연두를 들어서 품에 안았다.
꼬옥.
“꺄아!”
“누가 그렇게 귀여우래, 연두.”
“자, 잘모태써요! 안 기여울게요..!”
“하하, 안 되겠는데? 더 귀여워서 못 놔주겠는데? 우리 연두.”
“으으.. 구럼 연두도 아빠 안 노을 꺼에요!”
연두가 짧은 팔로 내 목을 꼭 안았다.
나름 지지 않으려는 의도 같은데 전혀 타격이 없다.
아니, 타격은커녕 올라간 내 입꼬리만 더 치솟을 뿐이다.
“형..?”
그러던 와중 갑자기 이질적인 호칭이 들려왔다.
연두가 나를 이렇게 부를 리는 없고.
애초에 이건 남자만 낼 수 있는 굵은 목소리였다.
비슷한 목소리를 떠올리면 최흥만이 생각나는 목소리.
‘잠깐. 최흥만?’
설마 하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예상은 완벽히 적중했다.
“주원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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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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