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898)
898화. 고성능 지니
집으로 돌아왔다.
“누렁아!”
세연씨에게 케어를 부탁했던 만큼 누렁이는 무사히 잘 있었다.
매번 어디 갈 때마다 부탁하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달리 부탁할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누렁이 이 녀석.
엄청나게 앵긴다. 볼을 비비고 배를 뒤집어 눕고 난리도 아니다.
“냐아!”
이런 모습을 보면 서로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 한 번씩 거리두기는 필요한 거 같다.
아니, 정정한다.
그 논리대로라면 나도 연두랑 거리를 둬야 하잖아.
“헤헤.. 잘 있었지, 누렁아?”
“냐아……”
애틋한 눈빛.
한참 동안 누렁이를 쓰다듬던 연두는 그동안 못 챙겨준 간식을 챙겨줬다.
코를 박고 먹는 녀석.
간식을 챙겨준 뒤에 코를 닦아주는 건 필수코스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빠..”
“응?”
“.. 이상해여. 아직 저녁도 아닌데……”
눈이 가물가물하다.
그럴 만도 했다.
어제 잠을 많이 잔 것도 아닌 데다가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쉴 새 없이 친구들과 얘기하느라 에너지를 소모했을 테니까.
미소를 띠며 나는 얘기했다.
“피곤하면 조금 자도 돼, 연두야.”
“네에.”
“침대로 갈래?”
그러자 연두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한다.
“아빠 옆에서 자도 돼여?”
중얼거리듯 덧붙인다.
“무릎 베고……”
“당연하지.”
소파로 가서 앉으니 연두가 무릎을 베고 누웠다.
무릎베개.
새삼 가벼워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 재밌었어여.”
반쯤 잠긴 목소리로 소곤거리듯 연두가 얘기했다.
나도 ‘ASMR’식 화법으로 화답했다.
“.. 다행이다.”
그러자 연두가 쿡쿡 웃더니 더 볼륨을 줄여 얘기한다.
연두식 ‘ASMR’ 화법이었다.
“.. 아빠 덕분이에여.”
“.. 왜?”
“.. 아빠가 친구들한테, 친구들 엄마아빠한테 얘기해줘서.. 다 같이 갈 수 있었으니까……”
빙긋 웃으며 나는 말했다.
“.. 당연한 거지.”
“.. 왜 당연해요?”
진짜 궁금한 뉘앙스다.
“.. 소중한 딸의 바람을 어떻게든 들어주고 싶은 건 아빠로서 당연한 거니까.”
“.. 아.”
자그마한 목소리로 연두는 계속해서 말했다.
“.. 아빠는 램프의 요정 지니 같아여.”
얼마 전에 학교에서 ‘알라딘’을 보여줬다는 걸 들었다.
장난스레 대꾸했다.
“.. 외모가?”
내가 알기로 지니는 상당히 육중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
뚱뚱하다는 뜻이다.
살짝 올라가는 연두의 입꼬리.
“.. 아니에요.”
“.. 흐응.”
“.. 지니랑 아빠는 다르게 생겼어요. 둘 다 귀여운데.. 달라여.”
긍정적인 측면만 닮았다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 지니는 몸이 파란색이에요. 그런데 아빠는 파란색도 아니고.. 초록이니까.”
“.. 하하, 그러네.”
맞는 말이다.
파랑과 초록은 엄연히 다르다.
“.. 근데 아빠가 왜 지니 같아?”
“.. 소원을 들어주니까. 지니는 램프를 문질러야 소원을 들어주는데.. 아빠는 램프를 문지르지 않아도 소원을 들어줘요.”
왜일까.
잠긴 연두의 목소리가 심장을 간질거리는 기분이 든다.
다시 장난스레 물었다.
“.. 그럼 아빠가 더 고성능 지니인 거네?”
“.. 고성능?”
“.. 업그레이드 버전이라는 거지. 연두 소원이 뭔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서 이뤄주니까.”
자화자찬하는 느낌이라 조금 낯간지럽긴 하다.
“.. 맞아여. 고성능 지니.”
배시시 웃더니 연두는 말했다.
“아빠.. 소원 빌었어요..?”
“.. 소원?”
“.. 네. 아빠도 터널에서 숨 참기 성공했으니까.”
“연두는?”
“.. 빌었어요.”
연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연두도.. 연두도 아빠 지니가 되게 해 달라고.”
조금 흠칫했다.
나와 관련된 소원을 빌었을 줄은 몰랐으니까.
곧 잠에 들 듯이 거의 잠긴 목소리로 연두는 덧붙였다.
“고성능 지니로.. 할 걸.. 그랬다……”
“……”
그 뒤로는 말이 없었다.
조금 지나서 내 입에서는 옅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 이걸 어쩐다.’
아무래도 연두는 소원 하나를 헛되이 날려버린 거 같았다.
왜냐고?
이미 연두는 내게 있어서 고성능 지니라 소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았으니까.
‘.. 뭐, 아예 헛된 건 아닌가.’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 내 마음에 가득 찬 온기가 연두의 소원이 아예 헛된 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
지우네 집.
“여행은 재밌었니?”
“으, 응.”
“다행이구나.”
평소처럼 말하긴 했으나 2박 3일 동안 혼자 집에서 지내며 지우의 빈자리를 많이 느꼈던 그녀였다.
그야, 처음이었으니까.
이렇게 긴 시간 떨어져서 지내본 건.
지우도 다르지 않았다.
“어, 엄마는? 엄마는 잘 지냈어?”
“그래. 지우가 없어서 조금 허전하긴 했지만.”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즐거웠다.
다시 친구들과 함께 여행하고 싶다는 걸 소원으로 빌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나, 나도……”
“응?”
“나도.. 엄마가 계속 떠올랐어……”
특히 즐거울 때면 더더욱 그랬다.
엄마도 이걸 봤으면 엄청 좋아했을 텐데, 즐거워했을 텐데 하고.
왜일까.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여행하는 동안은 엄마가 많이 생각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랬니?”
“으, 응.”
“좀 더 듣고 싶은데. 여행이 어땠는지.”
그녀로서는 당연했다.
저녁마다 짧게 통화를 주고받긴 했으나 안부 인사 정도였으니까.
딸의 여행이 어땠는지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 엄마도 그런 말 들어봤어?”
“어떤 말?”
“버, 버스 타고 부산에 갈 때 월이가 얘기해줬어. 터널이 다 지나갈 때까지 숨을 참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들어본 거 같네.”
생각보다 역사가 있는 속설인 모양이었다.
“그, 근데.. 가는 길에는 나랑 연두네 아저씨만 성공했다?”
이희영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자랑하듯 얘기하는 딸의 모습에.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물어보려는데 이야기가 이어졌다.
“수, 숙소에 도착해서는 점심을 만들어 먹었어. 나는 장보기 팀이어서 유리랑 연두랑 같이 장도 봤어.”
“셋이서?”
설마 셋이 장을 보러 간 건가 하고 묻는데 지우가 말했다.
“편집자님이랑 우영이오빠도 같이. 그런데 장보기는 우리끼리 했어!”
“.. 그랬구나.”
역시 그럴 리가 없었다.
지우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마을을 탐험한 것부터 시장을 구경하고 옷을 서로 골라준 일, 미션 맞히기, 바다를 보고 회를 잔뜩 먹은 것까지.
마지막은 귀갓길이었다.
“그, 그리고 버스 타고 올 때도 성공했다?”
“숨 참기?”
“.. 응. 그때는 나 말고 친구들도 다 성공했어!”
“잘 됐구나.”
이희영은 그제야 미뤄뒀던 질문을 건넸다.
“어떤 소원 빌었니?”
“나, 나는……”
지우는 얘기했다.
“다시.. 친구들이랑 다 같이 여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지우다운 소원이었다.
그 뒤에 지우는 조심스레 덧붙였다.
“호, 혹시 서운했어? 엄마가 아니어서……”
그게 신경 쓰였으면 슬쩍 엄마를 추가해도 됐을 텐데 거짓말은 못 하는 지우였다.
이희영은 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서운하다는 뜻이었다.
가끔 서운할 때면 이희영은 이렇게 격한 부정을 하곤 했다.
그것도 모르고 지우는 얘기했다.
“그, 그런데.. 월이 소원을 듣고 조금 후회했어.”
“왜?”
“월이 소원이 내 소원보다 더 멋지고 좋은 소원이었거든.”
“어떤 소원이었는데?”
워낙 마음 깊숙이 박혀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우는 고민했다.
이 말을 하면 엄마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엄마는 자주 얘기하곤 했다.
‘결국 인생은 혼자란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건……’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야.’
‘친구에 집착하지 말렴. 지우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해. 그럼 친구든 뭐든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법이란다.’
‘지금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어.’
사람은 언제나 필요에 따라 행동하고 움직인다.
인간관계란 얄팍하다.
그러니 쉽게 정을 주지 마라. 아무도 믿지 마라. 그래야 사람 때문에 상처받지 않으니까.
그게 이희영이 수없이 지우에게 한 말들이었다.
딸이 상처받지 않길 바라니까.
“워, 월이 소원은……”
지우도 엄마 말이 옳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자신을 소중하게 대해주는 친구들이 생겼다.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진심을 느끼면서 정작 자신은 마음을 주지 않고, 정을 주지 않고, 믿지 않고, 언제든 멀어질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건 너무 슬펐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지금 엄마한테 이야기하는 것도.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시간이 더 많이 지나서 꼬부랑 할머니가 돼도……”
“……”
“.. 그래도, 우리가 친구였으면 좋겠다고.”
엄마가 누누이 했던 말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지우는 말했다.
“워, 월이는 나보다 더 멋진 소원을 빌었어.”
“……”
“그래도 괜찮아. 월이 소원도 이루어질 테니까.”
정적이 일었다.
묘하게 일그러진 이희영의 머릿속에 흐릿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 영원히 친구인 거다?’
‘당연하지!’
‘걱정 마, 칭구들! 내가 이미 우리 늙으면 다닐 노인정까지 예약해 뒀으니까.’
“푸흣! 어이없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평소라면 늘 하던 말을 뱉어야 했다.
그런데 왜일까.
어떤 말도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 다음에 얘기하자, 지우야.”
화장실에 들어간 이희영은 꽤나 오랜 시간 나오지 않았다.
***
유리는 집에 돌아와서 방 안 의자에 앉아있었다.
앞에는 카메라가 놓여 있다.
“못 돌려줬네……”
주원이 여행하는 동안 쓰라고 준 필름 카메라였다.
돌려주는 걸 까먹고 가방에 넣어뒀다가 그만 집까지 가져와 버렸다.
인화한 사진도 함께 들어있었다.
촤르륵-
사진을 전부 펼쳤다.
기어코 2박 3일의 여행 동안에 필름을 다 써 버린 유리였다.
한 장 한 장 차례로 펼쳐봤다.
‘이건 부산에 있는 동안 유리한테 맡길게.’
‘저한테요?’
‘응. 대신 필름 개수가 정해져 있으니까 정말 예쁜 것만 찍어야 해. 유리를 찍어도 되고.’
아저씨가 필름 카메라를 건네며 했던 말이었다.
예쁜 것.
그게 대상을 선정하는 기준이었다.
첫 사진은 연두와 함께 찍은 셀카 투샷이었다.
‘야, 서연두!’
‘.. 으응?’
‘이쪽으로 와 봐!’
반쯤은 강제로 연두를 불러내서 찍은 셀카였다.
그런 거 치고 사진 속 연두는 세상 환하게 웃고 있지만.
“뭐, 이 정도면……”
기준을 충족했다고 봐도 될 거 같았다.
새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유리는 다음으로 사진을 넘겼다.
단체샷부터 시작해서 예쁜 풍경 사진, 다양한 테마의 사진이 차례로 등장했다.
“.. 아쉽다.”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쉬웠다.
버스 안에서 필름을 보여줬다면 친구들은 물론이고 아저씨한테도 칭찬을 들었을 텐데.
아저씨의 칭찬.
‘뭐야. 왜 이렇게 잘 찍었어? 유리 아무래도 사진에 재능이 있는 거 같은데?’
망상이 시작됐다.
“.. 헤.”
그러다 유리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민유리.
너 아저씨의 칭찬 한마디에 헤벌레하는 그런 쉬운 애 아니잖아!
은경쌤 칭찬이면 몰라도.
“후우..”
가까스로 심신을 안정시켰다.
그 상태로 사진의 마지막 장을 보는데 유리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언제 찍었지, 이거.”
환하게 웃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이어지는 혼잣말.
“.. 바보. 실수했잖아.”
아무리 봐도 아저씨가 예쁘게 생긴 건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유리는 알지 못했다.
사진을 보는 자신의 입꼬리가 살짝도 아니고 꽤 많이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