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907)
907화. 성장통
도입부의 몇 초로 충분했다.
딴. 따단.
반쯤 감은 눈.
스릉.
활을 든 레나의 손은 우아한 동작과 함께 현 위를 춤췄다.
확연히 달랐다.
앞서 들었던 연주들과는.
‘맞아.’
연주하는 레나를 보니 떠올랐다.
처음 레나의 연주를 보고 놀랐을 때부터 그 뒤에 보여줬던 연주들까지.
그럼에도 잠깐 망각하고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제대로 본 적은 없어.’
학교 강당에서 연두와 합동 무대를 한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런 자리는 아니었다.
그건 연주회보다는 축제 분위기였으니까.
환호하는 관객들 속에서 그 분위기를 즐기느라 연주에 100% 집중하지는 못했다.
그럴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고.
즉, 처음이라는 거다.
따단. 따다단. 딴.
제대로 본업 하는 레나의 모습을 보는 건.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콩쿨장 내부.
오직 레나의 손끝이 만들어내는 선율만이 콩쿨장 내부와 내 귀를 가득 채웠다.
‘그래.’
레나는 이런 아이였다.
괜히 바이올린 영재, 아니 천재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처음으로 유리가 입을 뗐다.
“부르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 3악장.”
“응?”
“지금 이레나가 연주하는 곡이에요.”
곡에 대한 정보였다.
단순히 바이올린만 잘 켜는 게 아니었다.
표정과 몸짓까지 전부 하나처럼 기능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러지?’
앞서 연주한 친구들도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고.
그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수준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마치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거 같았다.
‘호흡이 완벽해.’
피아노 반주에 화음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그게 느껴질 때마다 짜릿할 정도의 쾌감이 느껴진다.
음알못인 내가 들어도 알 수 있는 포인트였다.
“유리야.”
“네.”
“바이올린에 대해서도 잘 안다고 했지?”
고개를 끄덕인다.
이걸 묻는 이유는 간단하다.
평소 남을 평가하는 유리의 습관을 좋게 보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유리의 감상을 들어보고 싶었다.
“어떤 거 같아, 유리야?”
“뭐가요?”
“레나 연주.”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나는 덧붙였다.
“아저씨가 듣기에는.. 장난 아니거든.”
순수한 감상이었다.
왜일까.
그런 내 말에 유리는 왠지 모르게 뚱한 표정을 짓더니 툭 내뱉었다.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괜찮다고?”
“네. 호흡도 안정적이고 잘못 짚은 음도 없고.. 비브라토도 거슬리는 포인트는 없으니까요.”
잘은 모르겠다.
확실히 심사위원인 엄마를 보고 배워서인지, 유리의 감상은 한층 더 전문적인 영역에 있었다.
그래도 유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 건 고려하면 극찬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딱 그 정도예요.”
“응?”
“당연히 해야 하는 거라구요. 이레나니까. 그러니까……”
눈이 마주쳤다.
뭐라 말하려던 유리는 홱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 됐어요.”
눈을 끔뻑였다.
또 내가 뭘 잘못한 건가?
그래도 유리의 말을 듣고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잘못된 걸 수가 없지.’
지금 내 귀에 들리고 있다.
누군가 이게 별로라고 말한다면 어지간해서는 인정할 수 없을 거 같다.
설사 그게 이은경이라 해도.
“.. 와아.”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연두의 입이 헤 벌어져 있었다.
완전히 연주에 빨려든 표정이다.
이럴 때면 꼭 나오는 동작이 있었다.
딴. 따단.
역시나.
무릎을 건반 삼아 연주하는 연두의 손이 보인다.
그럴 만도 하다.
이렇게 멋진 연두를 본다면 호흡을 맞추고 싶어서 손이 간질거리는 건 당연하니까.
“.. 흣.”
작게 웃은 뒤에 다시 레나를 바라봤다.
어느새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연주.
딴.
끝까지 실수 없이 레나는 연주를 마쳤다.
연주를 마치고 활을 든 손을 내려놓으며 레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찰랑이던 금발은 땀에 젖어있다.
몇 초간 그렇게 서 있다가 레나는 관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싫어하는데.’
땀 흘리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공원에서 달리기 연습을 할 때도 힘들고 땀이 난다는 이유로 매번 농땡이를 치는 레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500m를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장난 아니게 멋있었다.
‘이런 거구나.’
연두튜브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였다.
갭모에.
얼마 전에 단톡방 기사가 떴을 때도 나를 대상으로 그 단어가 나오기도 했다.
평소에는 착한데 일할 때 화를 내는 모습을 생각하니 갭모에가 느껴진다나 뭐라나.
그걸 보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실상은 많이 다른 데다가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제야 알 거 같네.’
그 단어의 뜻을 이제야 확실히 알 거 같았다.
갭모에는 내가 아니라 레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였다.
***
레나 연주의 임팩트는 상당히 컸다.
짝. 짝.
어디선가 박수가 터져 나올 정도였으니까.
“야, 박수 치는 거 아니야.”
“앗.. 나도 모르게……”
콩쿠르 특성상 무대가 끝날 때마다 따로 박수를 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웃음이 나왔다.
감탄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박수를 친 게 느껴졌으니까.
조용하던 객석도 술렁였다.
“와, 장난 아니다……”
“소름 돋았어, 지금.”
“이게.. 천재?”
“프로 아니냐, 그냥. 떡잎부터 다르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아니지. 신이 불공평하다는 말이지. 비주얼 봐.
관객들의 반응에 내가 괜히 뿌듯했다.
무대를 내려가는 레나.
그 뒤에는 세상 슬픈 장면이 펼쳐졌다.
터벅. 터벅.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다 죽어가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아이의 모습이었다.
다음 참가자의 숙명이다.
‘파이팅!’
마음속으로나마 응원의 말을 건넸다.
그렇게 몇 차례 연주가 더 지나가고 마지막 연주까지 끝이 났다.
이번에는 마음이 편안했다.
‘그러고 보니 항상 어려웠어.’
유리 콩쿠르 때는 유리 컨디션이 걱정이 돼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연두는 수호라는 위협적인 경쟁자가 있었고.
둘 다 부담감을 이겨내고 멋진 무대를 보여주긴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없었어.’
아무리 곱씹어봐도 레나를 위협하는 무대는 없었다.
그렇기에 마음 놓고 결과 발표를 기다릴 수 있었다.
이변은 없었다.
“축하합니다. 제17회 아루 음악 콩쿠르 대상 수상자는……”
이름이 호명됐다.
“선화초등학교 1학년 이레나입니다!”
자기 일처럼 좋아하는 연두와 시은이.
유리는 여전히 뚱한 표정이긴 하지만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내심 1등 하기를 바랐던 거 같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무대 위에 오른 레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콩쿠르 보러 와준 친구들.. 연두, 시은이 너무 고마워요. 그리고..”
대상 트로피를 흔들며 말한다.
“아저시 덕분이에요! 히히.”
“……”
뜻하지 않게 언급되어버렸다.
***
시상식이 끝난 뒤에 레나가 내려왔다.
우리를 보더니 멀리서부터 전력 질주를 해서 달려온다.
“얘드라아!!”
이렇게 뛰면 계주도 하겠다.
그렇게 달려온 레나는 연두와 시은이에게 곧장 안겨들었다.
“나 대상 탔서!”
“축하해.. 진짜진짜 멋졌어……”
“히히.”
미소를 띠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한참을 친구들 품에 안겨서 기쁨을 만끽하다가 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빙긋 웃으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축하해, 레나야. 진짜 잘하더라.”
“.. 진짜요?”
“응. 진짜 프로 연주가 같았어.”
조금은 수줍은 얼굴로 말한다.
“때, 땡큐.”
뭐지, 이 갑분 영어는.
그 와중에 발음은 엄청 좋은 게 포인트였다.
독일식 영어인가.
거친 듯하면서도 고급스럽다.
“레나는 어디 가서 영어 쓰면 안 되겠다.”
“왜요?”
“매력 있어서 또래 남자친구들 다 반할 거 같거든.”
“……!”
동그래진 눈.
2차 수줍은 표정이 떠오른다.
이런 모습을 보면 무대 위에 섰을 때와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 왜 그랬어, 레나야?”
“.. 뭐를요?”
“내 덕이라고.”
“아.”
레나는 얘기했다.
“아저시가 좋은 소원 알려줬스니까!”
“좋은 소원?”
“네! 1등 할 수 있을 만큼 열심히 노력하게 해 달라는 소원! 소원이 진짜 이루어졌스니까 아저시 덕분이에요!”
“하하, 그런 거야?”
말 한마디 잘한 거로 스노우볼이 이렇게 굴러갈 줄이야.
그나저나 이 정도면 미신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소원 성취율이 대단하다.
톡.
그때였다.
살며시 다가간 레나가 손가락으로 톡 유리의 팔을 건드렸다.
“뭐, 뭐야!”
“미뉴리……”
발그레한 볼.
레나는 허공을 응시하며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 갈게.”
“뭐?”
“나도 꼭 보러 간다구. 너 콩쿠르.”
아까도 한 말이지만 왠지 모르게 더 간질간질하다.
레나는 덧붙였다.
“그러니까…… 보러 와 줘서 고맙다구!”
당황한 유리가 소리친다.
“고, 고맙긴!”
“그, 그럼 안 고맙니?”
“안 고마워도 되거든!”
“그럼 안 고맙다! 됐냐?”
“됐다!”
처음이었다.
유리와 레나가 다투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 건.
***
집에 돌아왔다.
연두는 하루종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헤헤..”
이유는 하나였다.
“레나가 콩쿠르 대상 받은 게 그렇게 좋아, 연두야?”
“네에.”
괜히 물었다.
“연두가 받은 것도 아닌데?”
“.. 으응?”
아리송한 표정.
세상 당연한 듯이 연두는 얘기했다.
“레나가 받은 거니까여..”
그렇다.
연두한테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소중한 친구가 대상을 받은 건.
‘마찬가지겠지.’
나는 확신했다.
레나가 아니라 주위 친구 중 누구였다고 해도 연두는 지금 같은 반응이었을 거라고.
그런 점이 좋았다.
의외로 주위 사람의 행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도 그랬다.
‘결핍투성이였으니까.’
정신이 병든 시기였다.
내 처지를 비관하며 주위 사람의 성공을 질투하고 시샘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었다.
왜냐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내 모습을 누구보다 싫어하고 혐오하는 건 나 자신이었으니까.
‘연두를 만나고 변했지.’
단순히 결핍이 채워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연두가 그런 아이였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의 행복에 순수하게 기뻐할 줄 아는 아이.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아빠도 알지, 그 기분.”
“으응..?”
아리송한 표정으로 묻는다.
“연두 기분이여?”
“응. 지금 연두가 느끼고 있는 기분. 막 날아갈 거 같고 자꾸만 웃음 나고 그러잖아.”
완벽하게 맞췄나 보다. 눈이 동그래져서 묻는다.
“어, 어떻게 알아여?”
“연두가 상 탔을 때 아빠가 그랬거든. 아마 그때 연두보다 아빠가 더 기분 좋았을걸?”
“아빠……”
연두가 품에 안긴다.
꼭 끌어안은 채로 연두가 속삭이듯 얘기했다.
“레나가 학교에서 그랬어요.”
“뭐라고?”
“아빠는 꼭 듣고 싶은 얘기를 해준다고… 그래서 천재 같다고……”
또 나왔다, 천재.
그나저나 레나가 나에 대해서 그런 말을 했다니.
멋쩍은 웃음이 새어 나온다.
“하하.. 그랬어?”
“네.”
조금 지나서 연두는 입을 뗐다.
“맞는 거 같아요..”
“응?”
“아빠는 천재 같아여.”
큰일이다.
연두까지 이렇게 말한다면 편집자들과 제대로 한번 협상을 해 봐야겠다.
내 천재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그럼 천재 아빠가 또 맛있는 저녁 만들어줘야겠네, 우리 공주님?”
“……!”
곧바로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꽁냥꽁냥 시간을 보내다가 침대에 누웠다.
완벽한 하루였다.
‘나도 기뻤으니까.’
레나의 대상이 나도 진심으로 기뻤다.
레나뿐만이 아니었다.
연두를 만나고 연두튜브를 시작한 뒤로, 주위 사람이 잘 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상당한 기쁨을 느꼈다.
내 기쁨만이 기쁨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오늘은 좋은 꿈 꾸겠다. 그치, 연두야.”
“네에.”
달칵.
조명을 껐다.
얼마나 지났을까.
‘.. 어?’
반쯤 잠에 들었던 나는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끙끙 앓는 소리였다.
지금 옆에는 연두뿐이었다.
‘.. 아픈 건가?’
비몽사몽한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조명을 켰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감은 연두가 몸을 뒤척이며 신음하고 있었다.
“연두야! 괜찮아?”
놀란 내가 연두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디 아픈 거야? 아빠한테 얘기해 봐!”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방금까지만 해도 환하게 웃던 연두가 알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이윽고 들려왔다.
“아, 아빠..”
“연두야.”
“다리가.. 다리가 너무 아파여.”
파앗-
곧바로 이불을 치웠다.
겉보기에 외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리운 단어가 있었다.
“하, 하하..”
드디어 연두한테 손님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성장통이라는 손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