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can see your herbivorous side RAW novel - Chapter 67
너의 초식이 보여 67화
소림과 환상기국(3)
책을 만진 후부터 기억나는 건 없었다.
마치 잠이 드는 것과 비슷했다. 잠이 언제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아, 내가 잠을 잤었구나.’ 깨닫게 된다.
나 역시 눈을 뜨면서 이곳이 다른 곳임을 깨달았다.
분명 암자의 방은 아니었고, 현실 세계도 아니었다.
주변은 밤처럼 어두웠는데, 하늘에는 노란 달이 아니라, 피처럼 붉은 달이 떠 있었다.
그리고 바닥은 가뭄이 든 논바닥처럼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 또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공간에 혼자 있었다.
심연대사가 보이지 않아 세수진경을 운용했지만 그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은 어디지?
과거 우익편은 내 기억을 이용해서 환영을 만들고, 그곳에 갇힌 적이 있었다. 혹시 여긴 책이 기억하고 만들어낸 공간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으음, 일단은 움직이자. 여기에 있어봤자 알아낼 수 있는 건 없다.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아직 사막에 가 보진 못했지만, 책에서 본 내용대로라면 사막과 비슷한 것 같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붉은 달은 한 자리에 계속 떠 있었다. 그것이 가만히 있으니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체감상 한 시진은 지난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오래 걸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전혀 힘들지도 않았다. 땀조차 흐르지 않고, 날씨가 덥거나 춥지도 않았다. 그냥 느낌이 없었다.
나는 멈추어 섰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방법이 잘못된 것 같았다. 나는 녹안석을 꼭 쥐고…….
엇. 녹안석이 없어졌다. 어디로 갔지?
녹안석을 믿고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이 없으니 살짝 불안해졌다.
결국 전부 없어지는 건 아닐까? 이것도 저것도 전부 없어지는……. 갑자기 생각이 나서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에 있던 붉은 달도 사라졌다.
내가 없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붉은 달이 사라진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이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한 대로 바뀌는 곳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부정하고, 없다고만 생각하니 사라졌다.
그럼 이제부터는 생각을 바꾸자.
먼저…… 정말 밝아서 참 좋구나.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 걸, 그렇다고 인식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가능하다.
계속 생각하고, 집중하고, 전념한다면 가능했다.
생각해. 그리고 집중해. 가능하다고 생각해.
스스슥.
점점 주변이 밝아졌다.
너무 밝아서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밝기를 조금 낮춰야겠다. 그리고 눈이 편안하게 녹색의 우거진 숲을 생각했다. 실제로 주변에 숲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하나씩 생겨났다.
이어서 나는 녹안석을 생각했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문을 생각했다.
그러자 녹안석은 여전히 내 손에 있었고, 내 앞에는 큰 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문을 활짝 열었다.
화아악.
나는 빛이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전혀 다른 곳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왁자지껄한 시장의 한복판이었다. 그런데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전부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해괴한 모습이었고, 그것들은…… 요괴 같았다.
그래. 분명 요괴였다.
눈이 하나밖에 없는 요괴, 팔이 네 개 달린 요괴, 얼굴이 개의 형상을 한 요괴도 있었고, 반대로 사람 얼굴에 개의 몸뚱이를 가진 요괴도 있었다.
두꺼비나 고양이, 나무가 걸어 다니고, 기어가는 녀석도 있었고, 얼굴이 동물이 아닌 곤충의 형상, 심지어 이도 저도 아닌 놈도 있었다.
저 멀리 키가 십오 척이나 될 만큼 커다란 놈이 쿵쿵 소리를 내며 걷는 모습도 보였다.
이런 것들이 너무나 어색했다.
하늘에는 해가 떠 있는데 두 개였다. 하나는 크고 밝았고, 다른 하나는 바로 옆에 작게 떠 있었다.
또 신기한 건 구름이었다. 구름이 계속 변하고 있었는데, 하얀색이었다가 붉은색, 파란색으로 색상이 변했고, 모양 역시 살아 있는 지네처럼 움직였다.
그것 외에는 일반 시장의 풍경과 비슷했다.
그들은 나를 봐도 신경 쓰지 않았고, 나 역시 그들을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들이 하는 말이 잘 들렸다.
분명 사람이 쓰는 말은 아닌데, 무슨 뜻인지 바로 인지할 수 있었다.
“눈알 다섯 개만 달라니까.”
“싫어.”
“에이. 그럼 세 개만 줘.”
“안 된다니까. 정 필요하면 하나만 줄게.”
“하나는 싫어. 조금만 더 줘봐.”
그들은 시장 한복판에서 이런 식으로 흥정을 했고, 갑자기 싸우는 놈도 있었다.
각자 손발을 물어뜯는데,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좌우에 좌판대나 점포들이 있는데, 그 사이 거리가 굉장히 넓어서 싸워도 상관없었다.
장사하는 이들의 호객 행위는 비슷했다.
자신의 물건들을 가져가라고 호객하고, 흥정했다. 그런데 자판 위에 있는 것들도 괴상한데, 회색빛이 나는 괴물의 시체부터 이상한 냄새가 나는 떡을 파는 놈들도 있었다.
또 인간의 머리나 다리, 눈알, 코 등등 이런 걸 파는 놈도 있었고, 살아서 움직이는 식물이나 개처럼 큰 투구벌레를 팔기도 했다.
나는 애써 무시하면서 앞으로 걸었다.
여기는 요괴 세상이다. 그러니 저런 것들이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스스로 납득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제기랄. 이해는 개뿔……. 어서 여기서 나가고만 싶었다.
그런데 대사님들은 어디 있는 거야?
나는 다시 세수진경을 일으켰다.
소림방장인 각인대사도 세수진경을 익혔다고 하니, 부디 반응이 있기만 바랄 뿐이다.
엇, 그런데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정말로 세수진경의 파장이 느껴졌다.
둘이나 있는데, 하나는 굉장히 가까이 있었고, 또 하나는 멀리 있었다.
일단 가까이 있는 곳부터 찾아갔다.
나는 소림사 사람들의 생각을 통해 각인대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 번만 봐도 알아볼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하긴, 이런 요괴들 속에 인간이 있으면 못 알아보는 게 이상하지.
세수진경의 파장을 쫓아갔고, 마침내 각인대사를 찾았다.
그런데…….
그는 목이 잘린 채, 머리만 자판 위에 놓여 있었다.
기껏 찾은 각인대사가 죽다니.
이제 어떡하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걸 소림사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정말 소림사와 싸워야 하나?
그런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는 인간인가?”
놀랍게도 각인대사의 머리가 말을 걸고 있었다. 목이 잘린 채 눈을 뜨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각인대사님이십니까?”
“아미타불. 부처님이 나를 도와주셨군. 맞네. 내가 각인이야. 자네는 누군가?”
“저는 하운평이라고 합니다. 무적문의…….”
여기까지 온 이유를 짧게 설명했다. 각인대사도 나를 알고 있었다.
“구치웅 순검사가 자네 얘길 했었네. 아무튼 만나서 너무 반갑군. 나 좀 도와주겠나?”
“말씀만 하세요.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주변의 요괴들이 자네를 인간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일단은…… 나를 사게.”
“네에?”
“내 머리가 좌판 위에 놓여 있지 않은가? 나를 팔고 있으니 사란 말일세.”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돈이 없는데요.”
“이곳은 돈으로 물건을 사지 않네. 물물교환이나 뺏어야 하지.”
주변을 둘러보니, 확실히 돈으로 물건을 사지는 않았다. 달라고 떼를 쓰거나, 물건을 물건으로 교환하고 있었다.
“이봐. 넌 뭐야!”
그때 돼지머리를 한 요괴가 나에게 다가왔다. 이곳 주인인 것 같았다. 나도 일단은 소리쳤다.
“이 인간 머리를 팔아라.”
“푸헐. 웃기는 새끼군. 별로 세어 보이지도 않는 놈이 감히 나에게……. 엥?”
그런데 돼지 요괴는 갑자기 나를 유심히 봤다.
뭐지? 내가 인간인 걸 들킨 건가?
만약 그럴 경우, 각인대사의 머리를 들고 도망가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돼지 요괴는 갑자기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물어보았다.
“저어, 혹시 녹안석의 주인 되십니까?”
녹안석?
그러고 보니 이놈은 내 팔목에 달린 녹안석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팔을 들면서 당당히 소리쳤다.
“그래. 이놈아. 내가 바로 녹안석의 주인이다.”
그런데 갑자기 돼지요괴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게 아닌가?
“아이고. 드디어 오셨군요.”
뭐야. 이놈. 갑자기 왜 이래?
돼지요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소리쳤다.
“이것들아. 드디어 오셨다. 녹안석의 주인께서 드디어 이곳으로 오셨어.”
“뭐라고?”
“녹안석! 그 녹안석 말인가?”
“설마, 그 전설이 진짜였어?”
요괴들이 하나같이 달려와서 나를 봤고, 내 팔목을 보더니 무릎을 꿇었다.
“녹안석의 주인을 뵙습니다.”
“영광입니다. 드디어 오셨군요.”
솔직히 나는 당황했고, 일이 더 커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급히 돼지 요괴에게 말했다.
“저, 저기 인간 머리를 가져가야겠다.”
“마음대로 가져가십시오.”
“흠흠. 그리고 모두들 들어라. 내가 지금은 비밀리에 돌아다니는 중이다. 그러니 조용히 해라. 녹안석의 주인이 왔다는 걸 말하지 말란 뜻이다.”
“알겠습니다.”
주변의 놈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나는 각인대사의 머리를 들고, 얼른 이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다른 세수진경의 기운을 향해 달려갔다.
각인대사가 물었다.
“자네가 녹안석의 주인인가?”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대사님은 녹안석을 아십니까?”
“모르네.”
“제가 아는 녹안석은 마교의 물건인데, 이런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시죠.”
“벗어날 방법이 있는가?”
“저는 모르지만, 심연대사님이라면 알지 않을까요?”
그제야 각인대사도 심연대사도 같이 왔다는 걸 알았다.
“어쩐지. 세수진경의 기운이 느껴진다더니. 휴우. 못난 방장 때문에 사숙님이 고생하시는군. 아, 그런데 이대로 가면 안 되네.”
“네에?”
“내 몸을 찾아야 해. 이대로 가면 내 의식이 멀쩡하지 않을 거야.”
하긴 머리가 있으니 몸뚱이도 썩지 않고 따로 있을 수 있었다. 급하게 물었다.
“몸은 어디에 있나요?”
“여기서 왼쪽으로 가세. 어디 있는지 느낄 수 있어.”
나는 각인대사의 머리가 말하는 대로 달려갔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녹안석의 주인이라면 다른 보석의 주인도 있는 걸까?
신기수사는 보석이 다섯 개라고 했었다. 그럼 그놈들도 여기로 들어올 수 있는 것 아닐까?
“네가 녹안석의 주인이냐?”
그때 검은 갑옷을 입은 다섯 요괴들이 내 앞을 막았다. 아무래도 소문을 다 막지는 못한 것 같았다.
각인대사가 속삭였다.
“이놈들은 여길 관리하는 무장요괴들이네. 조심하게. 여기서는 우리 무공이 통하질 않아. 나도 이놈들에게 붙잡혔어.”
그런 것 같았다. 아까부터 내공이 느껴지지 않았다. 요괴들은 들고 있는 창을 내밀며 소리쳤다.
“우릴 따라와라.”
흥, 누구 마음대로?
나는 옆으로 보이는 좁은 골목길로 도망갔다. 그들은 나를 쫓아오는데, 마치 경공을 사용하듯 성큼성큼 뛰어왔다.
반면 나는 아무리 움직여도 경공은커녕 굼벵이 걸음으로 움직였다.
“젠장. 무공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녹안석의 주인이 녹안석을 써야지, 왜 도망 다니고 있어?”
그때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둘러보니 지붕 위에서 파란 고양이가 달리면서 말을 걸고 있었다.
저 고양이가 궁금했지만, 일단 저 녀석의 말이 맞았다.
여기서는 내공보다는 녹안석을 이용해야 한다.
나는 녹안석에 집중했다. 그러자 녹안석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강한 힘도 느껴졌다.
어라? 이거면 되겠는데.
그 힘은 마치 내공처럼 사용할 수 있었고,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움직임도 편해졌다. 달리는 속도 역시 세 배 이상 빨라졌다.
“녹안석의 주인이 분명하구나.”
그때 또 다른 검은 갑옷 요괴가 내 앞을 막았는데,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녹안석을 쥔 주먹에 힘을 주고, 힘껏 올려쳤다.
콰아앙.
큰소리와 함께 검은 갑옷 요괴는 튕기듯이 날아갔다. 족히 백여 장은 날아간 것 같았다.
뭐가 이렇게 강해?
“까르르르. 넌 정말 녹안석 주인이 맞나 보구나. 하지만 녹안석의 힘은 그런 것이 아니라 들었는데.”
다시 고양이가 말을 걸었다. 뭔가 아는 것 같아, 나 역시 물었다.
“이런 게 아니면 뭐지?”
“만인지상! 모든 요괴 위에 있고, 모든 요괴를 통솔하는 힘이잖아.”
“멋진 말이긴 한데. 정확히 무슨 말이야? 어떻게 사용하는데?”
고양이 요괴는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