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dicate the world to my Russia RAW novel - Chapter (205)
082. 내 미래에 노어과를 바친다(完)
2022년 3월, 한국외국어대학교.
사방이 화사한 꽃으로 물들고 신입생들로 북적거리는 와중.
복학생 김상범은 변두리 밥집에서 부대찌개를 시켜놓고 홀로 잔을 기울였다.
“크으. 술맛 좋다.”
소주의 씁쓸함 속 단맛을 알게 되는 나이, 이십 대 후반.
혼자서 국물을 떠먹으며 연신 감탄할 무렵.
동기 녀석이 약속 시간에 딱 맞게 들어왔다.
“야, 좀만 기다리지. 청승맞게 혼자 이게 뭐냐?”
“오. 임도준이 왔나. 러시아 유학 준비는 잘 되어가고?”
“준비는 무슨. 밀린 학점 메꾸려면 아직 1년 반이나 남았다.”
외투를 벗어 옆 의자에 걸어둔 임도준은 대뜸 아픈 곳을 건드렸다.
“넌 요즘 어때? 취업 준비는 잘 되냐?”
“나야 뭐 만년 준비생이지. 요즘 경기가 워낙 어렵잖나. 고시 실패하고 나니까 뭐 할 게 없더라. 지금 와서 전공 살리려니 막막하기도 하고.”
“하긴 그것도 그래. 사장님! 여기 밥 한 공기랑 라면 사리 추가요.”
4학년에 휴학 몇 년 하다 보니 학교에 남아있는 애들 찾기가 더 어려웠다.
더구나 학업에 흥미가 없어 주변을 겉돌던 아싸라 불러주는 이도 손에 꼽았다.
그래도 이런 녀석이라도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와 이 집 국물 죽이네. 햄도 육질이 느껴지는 게 비싼 거 썼나 봐.”
“그렇지? 아직 가격도 안 올렸더라. 요 근방엔 이만한 데가 없다니까.”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이번 학기 수업 얘기가 나왔다.
“이번에 시간표 어떻게 짰어. 어디 한번 보자.”
학교 커뮤니티에선 친구 추가해놓으면 올려둔 시간표를 볼 수 있었다.
스마트폰을 들고 살피던 임도준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푸하하! 이거 완전 미친놈일세.”
“왜? 네가 교환 갔다 와서 잘 모르나 본데, 이게 노어과 비주류를 위한 정석 커리큘럼이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 안 그래?”
“야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명색이 노어과라는 새끼가 러시아어는 다 빼고 문화, 정치, 사회, 문학 뭐 이딴 거만 듣냐? 어휴. 넌 교수들이 쌍욕 박아도 할 말이 없다.”
러시아에 교환학생을 다녀온 그가 보기엔 황당할 것이다.
하지만 김상범은 오히려 뻔뻔하게 나섰다.
“야. 너도 잘 알잖아. 러시아어는 어설프게 해봤자 소용도 없는 거. 원어민 교수한테 경멸의 시선 받아봤냐? 그거 아직도 꿈에 나오더라.”
“뭐 그게 나름 진입장벽이라 장점이긴 한데. 노어과인 너도 걸러지면 어쩌자는 거냐?”
“어휴. 그놈의 고시가 문제지. 그래도 졸업은 가능하다는 것에 위안 삼아야지.”
“크크. 너 지금 안 해두면 분명 후회한다. 회사, 소개팅, 모임 어딜 가든 붙잡고 물어볼 거 아냐. 러시아어 잘해요? 부대찌개가 러시아어로 뭐예요? 러시아 갔다 온 적 있어요?”
“어우.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다. 자자, 술이나 따라봐라. 먹고 죽자 인마.”
어문 계열 중에선 제일 잘나간다지만 취업 한파는 피해 갈 수 없었다.
특히나 대러시아 수출과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한국의 사정상 경기를 많이 타는 게 당연했다.
‘가장 많은 영토와 인구를 지닌 최강대국이 기침 한번 하면 주변국들은 감기에 독감에 아주 난리가 나니 어쩌겠냐.’
막연하게 노어과 타이틀만 달고 있으면 모든 게 다 형통할 줄 알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어라는 난해한 언어를
김상범이 연거푸 술을 들이켜자 임도준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야. 그래도 우리가 한국 최초의 노어과 아니냐. 학벌도 이만하면 나쁜 건 아니고. 타이틀은 충분하니까 내실만 잘 다지면 어떻게든 취업 될 거다.”
“뭐 그건 그렇지.”
“게다가 공대 놈들 봐라. 개성은 그나마 양반이지. 평양, 황해도, 나선특별시 뭐 이런 곳 가면 얼마나 힘든데. 산도 산이지만 개발이 안 된 곳에서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더라. 근데 우린 맘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잖아. 그거에 감사해야지.”
세계 전체에서 가장 많이 쓰는 언어가 러시아어인 시대.
무역을 진행하든, 사람과 교류하든 공용어처럼 사용되었으나 현지인이 아니라면 구사하기 힘든 탓에 늘 수요가 있었다.
‘겨우 일상 회화가 가능한 실력으로도 통역 알바를 몇 탕이나 뛸 정도니까. 게다가 러시아가 이상하게 한국에 대해 호의적이란 말이지.’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나선특별시 같은 러시아 인접 지역이었다.
“그나마 러시아랑 무역하는 곳 주변은 괜찮던데. 당장 유라시아 철도만 해도 그렇잖아.”
“어디 보자.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러시아 모스크바, 시베리아 횡단철도, 여기에 나선특별시까지. 이렇게 깔아줬던가?”
“어어. 근데 한국엔 대대적인 투자까지 해줘서 도시 전체가 서울 못지않게 변했더라. 대통령이랑 황제가 극동에 미래가 있다면서 중국이랑 일본 거르고 팍팍 밀어 주더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국인들이 러시아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임도준 또한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크으. 역시 대국은 대국이야. 쩨쩨한 걸로 시비 거는 중국, 일본과는 차원이 다르다니까. 너 저번에 역사 수업 들었다고 했지? 니콜라이 1세가 우리 밥줄 다 만들어준 건 기억하냐?”
니콜라이 1세.
낙후된 농업국가, 몽고-타타르의 멍에,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구교도와 공산주의의 습격 등.
위기에 처했던 러시아 제국을 기적적으로 바꿔놓은 위대한 명군.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이라 해도 믿을 법한 행보는 수많은 창작물을 통해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그걸 모르면 노어과가 아니지. 신입생 때부터 귀가 떨어지도록 들어왔잖냐. 마침 이번 수업들도 죄다 19세기가 배경이네.”
“야. 너 그거 아냐? 정치 수업은 족보 필요없다. 그냥 악으로 깡으로 외우는 게 전부더라.”
“외우면 얼마나 외운다고 그래.”
“로마노프 왕조의 모든 황제, 황비, 자식들 가계도까지 그려가면서 다 외우게 시키더라. 상범이 너 마음 좀 단단히 먹어야 할걸?”
한때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거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은 죄다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다.
초대 황제 미하일 1세부터 최근에 황제 자리를 물려받은 니콜라이 3세까지.
그 방대한 역사를 떠올리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한국 왕조도 모르는데 러시아 왕조는 어떻게 다 외우냐. 진짜 쓸데없다.”
“그래도 외워두면 외신 기사 볼 때 이것저것 편하더라. 정통성을 강조할 때마다 허구한 날 들이미는 게 황제니까. 게다가 러시아 언론사만큼 팩트체크 제대로 하는 곳이 드물잖아. 가끔 보면 얘들이 기사를 쓰는지 역사책을 쓰는지 모를 정도로 참고문헌이 빵빵하더라니까.”
“하긴 그렇긴 해. 영국이나 미국, 중국 이런 데는 잃어버린 영토 때문인지 괜히 시비나 걸던데. 러시아가 재미는 없어도 확실히 진지한 맛은 있지.”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늦은 저녁이 되었다.
3월치고는 쌀쌀한 날씨에 옷깃을 여미니 문득 막막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하. 뭐 어떻게 먹고 살 방법이 없나. 정말 러시아어를 각 잡고 해야 하나?’
아예 몰랐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러시아어를 제대로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 터라 절로 반감이 들었다.
‘니콜라이 1세랑 푸시킨이 정비한 게 이 정도면 원래는 얼마나 어려웠다는 거야?’
게다가 러시아어의 불규칙성을 진정으로 정복하기 위해서는 고대 러시아어의 형성과 발전부터 공부해야 한다니.
김상범은 무기력한 기분으로 잠들었다.
그리고 그건 러시아 문화 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야, 오늘 필기 좀 부탁한다.”
“뭐? 유학 가려면 학점 중요하다면서. 수업 또 째게?”
김상범의 말에 임도준이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유학원에서 입시 설명회 있어서 그래. 너 아니면 부탁할 사람도 없는데 한 번만 부탁하자. 어?”
“하, 새끼 귀찮게 하네. 알았다, 인마.”
솔직히 별 관심도 없는 전공 수업이었다.
그런데 집중하고 들으니 여느 교양 다큐멘터리보다도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제국의 영토는 북아메리카, 유럽, 아시아에 걸쳐 형성되어 있지. 몇몇 지역은 영국과 미국, 중국 등과의 협상을 통해 내어주기도 했으나 여전히 방대한 영토를 지녔다. 이 정도는 뭐 기본이지?”
교수가 컴퓨터를 조작하자 빔프로젝터로 쏘아진 화면에 거대한 지도가 나타났다.
‘히야. 땅덩이가 무식하게 크긴 하네. 근데 저렇게 넓힌 게 고작 수십 년 동안의 일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데,’
지도 위에 새겨진 연도와 사건은 대부분 19세기 초, 니콜라이 1세의 치세에 집중되어 있었다.
멍하니 강의를 듣던 도중.
교수의 목소리 톤이 의미심장하게 바뀌었다.
“다들 알다시피 러시아 제국의 부흥은 니콜라이 1세와 함께 시작됐지. 아들인 알렉산드르 2세도 나름대로 잘 다스렸다지만 선대의 업적이 없었다면 그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
ppt 페이지를 넘긴 교수는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그러니 수업 중에 니콜라이 1세의 업적 중 하나를 골라 발표하는 시간을 갖겠다. 중간고사 대체로 하는 거니까 설렁설렁하지 말고 진지하게 임하도록.”
‘하. 드디어 시작인가.’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팀 프로젝트에 김상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작 같은 조가 된 임도준은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내가 나중에 밥 살 테니까 좀만 도와줘라. 어? 다른 과목 학점 챙기려면 이런 거에 시간 쏟을 수가 없더라.”
“알았다, 인마. 비싼 걸로 제대로 얻어먹을 테니까 각오해라.”
솔직히 하기 싫었다.
러시아어가 싫어서 이딴 거나 듣는 마당에 무슨 의욕이 넘치겠나.
‘근데 이상하단 말이지. 왜 이렇게 관심이 갈까. 역시 니콜라이 1세 때문인가. 모두의 모범이 되는 교육과 체제를 정비한 건 그 시절부터였으니까.’
세상 모든 건 러시아에서 왔다.
시작은 늦었으나 작금의 세상을 지배하는 건 러시아라고 봐도 좋았다.
문화, 과학기술, 종교, 군사력, 경제력, 영토, 인구 등 어느 하나 주도하지 않는 게 없었으니까.
근데 이런 거 다 떠나서 그냥 얘들은 호감 그 자체였다.
‘당장 당대 황제인 니콜라이 3세만 해도 전쟁을 벌이기는커녕 오히려 중재에 앞장섰지. 인명피해와 분쟁을 막을 수 있다면 호구처럼 퍼주기까지 했으니까. 대통령과 내각에서 반대해도 밀어붙이는 추진력! 그 덕분에 노벨평화상도 받았다던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인, 로마노프 왕조!
현대로 갈수록 실질적인 권력은 줄어들었으나 그 상징성만큼은 여전히 엄청났다.
– 니콜라이 1세의 러시아에 세계가 바쳐졌으니 이제는 세계에 러시아를 바칠 때입니다.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입에 발린 말이란 걸, 뒤에서는 이득이란 이득을 다 챙길 거란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음에도 호감인 건 변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보기엔 콩고물에 불과한 게 워낙 큼직하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그나마 러시아에 위기라고 할만한 건 공산주의 정도인가.’
마르크스가 만들고 엥겔스가 보완하며 후대에 전해진 공산주의.
그건 차후 레닌, 스탈린 같은 괴물들에 의해 다시 표면으로 드러났으나 금방 진압되었다.
‘이게 다 니콜라이 1세의 선견지명 덕분이지. 모든 국민이 황제를 추종하고 청렴과 결백이 미덕이 되었는데. 공산주의가 끼어들 틈이 없지.’
한번 주제가 잡히자 대본이 저절로 써졌다.
그래서 발표를 하는 와중에도 말이 술술 나왔다.
“…… 만약 니콜라이 1세가 공산주의라는 설익은 사상을 꺾지 않았다면 대참사가 일어났을 겁니다. 심지어 제이콥이라는 자는 겉으론 유럽연합군에 복종하는 듯해도 다시 조선에서 봉기할 계획을 꾸미지 않았습니까? 마르크스, 제이콥, 레닌, 스탈린 등의 혁명가들을 잠재울 수 있었던 건 전부 니콜라이 1세가 러시아를 근본부터 바꿔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부분에 특히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발표를 마친 뒤.
교수님의 짧은 평이 이어졌다.
“역시 고학번이라서 그런가? 핵심을 잘 짚어줘서 좋네. 개혁과 근대화, 영토 확장처럼 눈에 잘 띄는 업적만 얘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흥미롭게 들었어. 혹시 김상범 학생은 러시아 갔다 와본 적 있나?”
“아뇨. 아직 없습니다.”
“그래? 나중에 기회 되면 꼭 가보도록. 참 많은 걸 배우게 될 거야.”
“예, 알겠습니다.”
“자, 다들 발표 잘 들었지? 오늘 수업의 주제 역시 니콜라이 1세가 내세운 문화와 제도에 관한 것으로……”
강의는 계속 이어졌으나 그에 상관없이 김상범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문화, 경제, 정치, 사회, 문학, 심지어 언어학과 말하기까지.
온갖 수업에서 들었던 니콜라이 1세의 일면들이 한데 합쳐지며 거대한 상(象)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이거 제대로만 풀어내면 대박이겠는데? 소설로 한번 풀어봐봐?’
푸시킨, 고골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역시 니콜라이 1세를 주제로 한 시와 소설을 썼다.
수업 때문이라지만 그런 대문호들의 작품을 숱하게 읽어왔던 김상범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글을 쓰는 건 자신 있기도 하고. 나라고 그들처럼 되지 못하리란 법은 없잖은가! ’
한번 결심하고 나니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발표 때 써먹었던 내용들이 섞여들었다.
‘대놓고 니콜라이 1세가 나오면 너무 사기니까 시점은 이후로 잡아야지. 그가 일궈놓은 제국에 공산주의로 선동하는 무리라! 크으. 구도 하나는 참 좋네. 빌런은 누구로 할까. 레닌? 스탈린? 역시 과감한 행보를 보였던 스탈린 쪽이 강렬하겠지?’
김상범은 연신 키보드를 두들기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갔다.
그의 책상 한쪽에는 니콜라이 1세의 행보를 고스란히 담아낸 자서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내 러시아에 세계를 바친다]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