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dicate the world to my Russia RAW novel - Chapter (65)
024. 뮈라의 기묘한 모험(2)
3.
인적이 드문 새벽 시간.
허름한 옷차림에 노쇠한 말을 탄 뮈라는 모스크바를 떠났다.
‘후. 더럽게 아프네.’
농민들한테 얻어맞은 부위는 아직도 시큰거렸다.
니콜라이에게 사정사정하여 얻어온 연고를 바르던 와중.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절로 울분이 터져 나왔다.
‘흐으.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단 말인가!’
한때 그는 유럽 전역을 휩쓸고 다니던 승리의 기수였다.
한때 그는 기병전으론 단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불패의 용사였다.
한때 그는 군주의 신임을 받아 왕의 자리까지 오른 밑바닥 성공 신화의 주역이었다.
하지만 스몰렌스크에서 멋대로 날뛰다가 기병대를 통째로 날려 먹은 뒤.
그 모든 명성과 자부심의 뿌리에 나폴레옹이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겁이 났다.
‘어쩌면 이번 실책으로 전부 앗아갈지도 모르지. 아니, 변덕스러운 성품을 생각하면 무조건 그럴 거야.’
그러니 프랑스군이 어찌 되든 나폴레옹의 마음부터 다시 사로잡아야만 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목숨만 부지한다면 니콜라이 황자의 밑에서 새 출발을 해도 되고.’
어느새 반역까지도 서슴없이 떠올리게 된 뮈라는 욕망의 화신, 탐욕에 미친 괴물로 변해버렸다.
‘통일 이탈리아의 건국왕이 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노라. 이미 나폴레옹이라는 선례까지 있는 마당에 나라고 안 될 건 뭐란 말인가!’
뮈라는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반복하며 니콜라이가 건네준 지침을 머릿속에 착실히 새겨넣었다.
지금으로서는 오직 그것만이 구명줄이었으므로.
‘후우. 도착한 건가?’
어느덧 드네프르강을 넘어 폐허밖에 남지 않은 스몰렌스크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군 주둔지로 걸음을 옮긴 뮈라는 주변을 순찰 중이던 병사들에게 무력하게 제압당했다.
“이런 뻔뻔한! 감히 조국을 배신해?”
“죄인을 압송하라!”
“나를 폐하께 데려가다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분을 뵙고 죽어야겠다!”
“……”
장군으로서 최후의 예우라는 것일까.
곧바로 나폴레옹의 막사로 끌려간 뮈라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절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한참 뒤에 나타난 나폴레옹은 그 어느 때보다도 냉랭한 모습이었다.
“뮈라. 네놈이 제 발로 기어들어 올 줄은 몰랐구나.”
만약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면 지레 겁을 먹고 헛소리나 늘어놓았으리라.
침을 꿀꺽 삼킨 뮈라는 수백, 수천 번은 되뇌었을 대사를 꺼냈다.
“폐하. 저는 아직 쓸모가 많습니다. 듣자 하니 이번 원정을 그만두길 원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던데. 제가 직접 나서서 그들을 설득해 보이겠나이다.”
“……”
그 말에 나폴레옹은 침묵을 지켰다.
언뜻 화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오랜 시간 함께해온 뮈라는 그가 고민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게 먹힐 줄이야. 정말 그 애송이 황태자가 알려준 게 사실이었다는 건가?’
반신반의하던 마음에 중심이 잡히자 잘게 떨리던 눈동자도 제자리를 찾았다.
어느새 능숙한 거짓말쟁이로 탈바꿈한 그는 나폴레옹이 혹할 만한 얘기를 연달아 쏟아냈다.
“전쟁을 그만두자는 이들도 나름의 이유는 있습니다. 이번 원정의 목표는 러시아를 굴복시키고 다시 평화 협정을 맺으려는 것이었으니 이쯤에서 멈추는 게 적당하다는 거지요.”
“음.”
”하지만 폐하께서 수십 차례나 서신을 보냈어도 답변 한번 받아보지 못했잖습니까? 이는 알렉산드르 1세의 마음이 아직 꺾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대로 진격을 멈춘다면 러시아는 우리 군을 우습게 여기고 보복을 시도할 겁니다.”
“계속해보거라.”
생각보다 호의적인 반응에 뮈라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가 프랑스를 만만하게 볼 때! 모스크바를 점령하여 본때를 보여준다면 콧대 높은 러시아의 차르도 분명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러시아 민중들은 신앙심과 애국심이 남다르다고 들었다. 모스크바를 점령한들 제대로 관리할 수나 있겠느냐?”
“그건 저들의 사정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제가 모스크바 주변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전선을 이곳까지 끌고 온 러시아군에 대해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 말에 나폴레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것이 정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게다가 원래 터전에서 쫓겨나온 주민들이 많아 민심도 그리 좋지 않다고 합니다. 만약 폐하께서 자국민을 대하듯 대우해준다면 그들도 열렬히 환영할 겁니다.”
아무리 나폴레옹이 스몰렌스크 전투로 인해 각성했다고는 하나 본성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만백성에게 인정받는 위대한 황제!
그에 대한 환상을 지닌 나폴레옹은 꿈을 꾸는 소년처럼 얼굴에 생기가 되살아났다.
‘거의 다 됐다. 이제 쐐기만 박으면 돼!’
마른침을 삼킨 뮈라는 과감하게 제안을 건넸다.
“저는 이번 기회에 공을 세워 지난번의 실수를 만회하고 나폴리 왕으로서 기틀을 다지고자 합니다. 그러니 다른 누구보다도 폐하의 뜻을 열성적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부디 제게 맡겨주십시오!”
순간 나폴레옹의 표정이 굳어졌다.
‘감히 나를 상대로 거래하려 들다니! 고작 나폴리의 왕이라는 감투로 나와 맞먹으려 드는 것이냐?’
하지만 네, 다부, 포니아토프스키, 심지어 그토록 신뢰하는 양아들 외젠 마저 필사적으로 전쟁을 반대하는 가운데.
뮈라가 건넨 손은 사막 횡단 중 만난 오아시스처럼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후우. 황제 노릇도 쉽지 않구나.’
일국의 군주를 넘어 유럽 전제를 발아래에 거느린 황제의 결단은 무게감이 확연하게 달랐다.
말 한마디에 국가와 민족의 안위가 뒤바뀔 수 있으니까.
‘정말 이대로 전쟁을 계속하는 게 맞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철수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던 나폴레옹은 일부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잠시 오해를 한 모양이구나. 저들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모스크바까지 갔다 왔다고?”
반쯤 넘어왔음을 확신한 뮈라는 적당히 꾸며낸 얘기를 늘어놓았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잘못 걸려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지요.”
뮈라는 상의를 벗어 잔뜩 피멍이 든 몸뚱이를 드러내 보였다.
게다가 살아남은 기병대원들이 증언한 내용에도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이대로 철수해버린다면 장차 프랑스는 수많은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이번 전쟁을 어떻게든 이어 나가고 싶었던 나폴레옹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널 믿어보겠다. 따로 역할을 맡길 때까지 대기하면서 네 소임을 다하도록 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뮈라는 나폴레옹이 막사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고개를 숙인 그 모습 그대로 한참을 머물렀다.
남들이 보기에는 충성심이 대단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으나 정작 뮈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이거 너무 짜릿하잖아?’
니콜라이의 계책은 그 이름값만큼이나 놀라웠다.
상대의 심리를 완벽하게 꿰뚫어서 원하는 대로 조종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다음은 폐하의 측근들을 설득하는 일인가.’
– 나폴레옹에게 간언하는 수하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라!
대놓고 반역을 저지르라는 것도 아니고 나폴레옹이 본인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라니.
황당한 요구였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뮈라는 확신을 품었다.
‘나폴레옹은 제대로 된 판단 능력을 상실한 저무는 태양인 게 분명하다. 나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갈아타는 건 어쩔 수 없겠구나.’
그렇게 스몰렌스크 전투가 일단락된 뒤에도 니콜라이의 비수는 여전히 프랑스군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날카로운 끄트머리에는 앞으로 벌어질 뮈라의 기묘한 행적들이 자리할 예정이었다.
5.
한편 스몰렌스크-모스크바 대로를 걸어가던 러시아군은 생각보다 순조로운 행군에 여유가 흘러넘쳤다.
“프랑스군은 병신밖에 없나? 왜 쫓아오지를 않지?”
“그러게. 우리한테 제대로 겁을 먹었나 봐.”
그동안 프랑스군은 대육군, 그랑드 아르메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형편없는 모습만 보여왔다.
그러니 말단 병사들조차도 적들을 우습게 여기기 시작했다.
다만 불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어째서 우리는 퇴각만 거듭하고 있는 거지? 슬슬 반격할 때도 되지 않았나?”
“그러게. 황태자 전하께서 개발하신 신형 총기와 대포라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팰 수 있을 텐데.”
“에잉. 얼른 전공을 세우고 무도회장이나 가고 싶군. 이놈의 전쟁은 언제쯤 끝나려나 몰라.”
장교들이 쑥덕거리는 모습을 남몰래 지켜보던 바르클레이는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멍청이들. 저런 정신머리로 무슨 전쟁을 치르겠다는 것이냐!’
작금의 러시아군에는 대충 돈으로 찔러넣고 자리를 차지한 장교들이 많았다.
더구나 병사들 역시 글조차 읽지 못할 만큼 무식한 경우가 많아 고도의 전술을 수행하는 건 무리였다.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장교와 사기, 숙련도를 보장할 수 없는 징집병이라니. 이 얼마나 끔찍한 조합인가!’
만약 후퇴를 거듭하지 않았더라면 언제고 프랑스군한테 된통 당하고도 남았으리라.
그렇게 바르클레이가 고심에 차 있을 때.
부관이 다가와 명령을 전달했다.
“사령관님. 총사령관께서 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음. 벌써 시간이 됐나.”
쿠투조프의 막사에 도착한 바르클레이는 열띤 토론을 벌이던 두 사람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 자네 왔나? 어서 오게.”
“듣자 하니 전쟁을 계속해야 할지 논의 중인 것 같던데. 맞습니까?”
“그렇소. 이제 곧 모스크바라 더는 후퇴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어떤 식으로든 결단을 내려야 할 때지.”
순간 바르클레이는 고민에 빠졌다.
‘과연 진정한 전면전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하다못해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일만큼은 막아야 하거늘.’
하지만 여러모로 부족한 군대를 이끌고서라도 지키거나 이뤄내야 할 목표가 있다면.
기어이 해내고야 마는 것이 지휘관의 역할이자 책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황태자께서 펼쳐나갈 새로운 러시아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몸 기꺼이 바치겠노라!’
비록 곁에서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평소 교류하던 인텔리겐치아, 구교도 신자들에게서 익히 들어왔었다.
러시아가 시대의 흐름을 주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게 다름 아닌 니콜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마음을 가다듬은 바르클레이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을 이대로 돌려보낸다면 언제고 러시아에 큰 걸림돌이 될 겁니다. 개혁이나 변화를 시도해도 사사건건 간섭해대겠지요. 그러니 허튼 생각하지 못하게 이번 기회에 저들의 양팔을 꺾어놔야 합니다.”
그 말에 모처럼 바그라티온이 맞장구를 쳤다.
“맞소! 절대로 그냥 보내줄 순 없지!”
대의를 위해 스몰렌스크를 버려야만 했을 때.
신앙심 깊은 러시아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던가!
그나마 성모 마리아의 성상화라도 제때 빼돌릴 수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프랑스군에게 달려들었으리라.
두 사람의 표정을 살핀 쿠투조프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다들 열의에 넘쳐서 좋군.”
원 역사에서는 서로 의견이 달라 시도 때도 없이 설전을 벌였던 세 사람이었다.
하지만 스몰렌스크에서부터 합을 맞추며 승기를 잡아가다 보니 어느새 든든한 전우가 되어있었다.
‘물론 그만큼 둘 사이를 조율해야 하는 내 역할이 중요하겠지만. 이거 너무 귀찮은데.’
투실투실한 살집만큼이나 게으른 성격의 쿠투조프는 본성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지금까지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지 않으려면 적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부지런해져야만 했다.
“자, 그러면 다음 전투를 어디에서 치를지 고민해보도록 하지.”
어쩌면 러시아 본토에서 치르는 마지막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은 채.
세 사람은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적절한 지점을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