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dicate the world to my Russia RAW novel - Chapter (67)
026. 나비효과(1)
1.
제롬의 막사는 스몰렌스크 요새와 드네프르강 너머 가장 외곽에 자리했다.
이미 자신도 간접적으로나마 겪어봤기 때문일까.
뮈라는 군의 배치에서부터 은은한 차별과 멸시를 읽어낼 수 있었다.
‘러시아군의 동향을 살피거나 주변을 경계하는 등 온갖 궂은일을 다 떠넘기겠다는 거로군. 이거 불만이 적잖이 쌓였겠는데.’
그래서 제롬과 간단한 인사를 마치자마자 대놓고 물음을 던졌다.
“전하. 이대로 괜찮으십니까?”
앞뒤가 전부 생략된 말이었으나 제롬은 단번에 뮈라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럼에도 그는 귀찮다는 듯이 권태로운 얼굴로 대꾸했다.
“전투에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니 편하고 좋더군. 자네도 저번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던데. 여기 머물면서 작품이나 감상하겠나?”
제롬은 파리에서 가져온 그림들을 곳곳에 걸어놓으며 멍한 눈빛을 흘렸다.
평소라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하며 속내를 살펴야 했다.
‘하긴 형식상 군권을 쥐여주었을 뿐 꼭두각시나 다름없으니. 이렇게 무기력해지는 것도 당연하겠지.’
하지만 베스트팔렌의 국왕으로 등극한 뒤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았다는 걸 보면 제롬에게는 혼군(混君)과 폭군의 자질이 충만했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뮈라는 그의 욕망을 자극하고자 입을 열었다.
“이대로 흐지부지 전쟁이 끝나버린다면 저와 전하는 역사에 무능한 인물로 박제될 겁니다. 잘못은 죄다 다른 놈들이 했는데도 말입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뮈라의 열변에도 제롬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하아. 그래서 러시아군을 치러 가기라도 하겠다는 게냐? 내게 남은 군대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 민족을 부흥시켜야 하는 사명을 앞세워 가장 먼저 떠나갔다.
레니에르는 바그라티온에게 된통 깨진 뒤 반송장이 되어버렸고.
그런데도 뮈라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전하께는 아직 방담 장군이 있습니다. 한데 어찌 포기하려 하십니까?”
“방담이라. 하긴 그 녀석만큼은 나를 지지해주는 것 같더군.”
원 역사에서 방담은 제롬을 싫어했다.
워낙 제멋대로 행동하는 데다가 도중에 러시아 땅을 떠나버리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관계로 발전하자 어느새 두 사람의 사이는 제법 끈끈해졌다.
뮈라는 그 밖에도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을 입에 올렸다.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들 외에도 프랑스군에는 인재가 많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공을 세운다면 무한한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잔혹함과 약탈의 상징과도 같은 방담.
과거 전투에서 머리를 크게 다치는 바람에 정신에 문제가 생긴 충신 쥐노.
능력 있는 지휘관이었으나 부상을 입고 골골대는 귀댕 장군.
여기에 기병대 하나를 말아먹었어도 기량 자체는 여전한 뮈라 등.
다부나 네 원수가 들었다면 기겁할 만한 인선이었으나 나폴레옹에게 오랫동안 휘둘려온 제롬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번이 내 의지로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런데 그때 병사 하나가 급하게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스몰렌스크 외곽에서 러시아군이 나타났습니다!”
“뭣이? 좀 더 자세히 말해보거라.”
“많아봤자 2만 정도지만 포병 진지를 구축하던 걸로 봐서는 선발대일 가능성이 큽니다. 저들이 준비를 마치기 전에 서둘러 대비해야 합니다!”
“음. 형님께 속히 보고를 올려야겠구나.”
아무리 무신경한 제롬이라도 코앞에 적들이 쳐들어왔다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런데 그때 뮈라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이거 잘만 이용하면 입지를 대폭 강화할 수 있겠는데?’
뮈라는 곧바로 제롬을 바라보며 외쳤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전하께서 직접 군을 인솔하여 러시아군을 패퇴시키는 겁니다.”
“허어.”
“전하, 다른 이들이 알아채기 전에 움직여야 합니다. 어서 결단을 내려주시옵소서!”
뮈라의 재촉에 제롬은 가볍게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알겠다.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당장 방담을 불러오거라!”
프랑스군의 운명이 거칠게 요동치는 순간이었다.
2.
뮈라와 제롬, 그리고 방담의 군대가 스몰렌스크 요새를 뛰쳐나갔을 즈음.
미리 상황을 살피던 척후대 하나가 정신없이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걸려들었습니다. 병력을 소집하는 걸 보니 당장이라도 달려들 모양새입니다.”
그 말에 베니히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사령관. 저들이 정말로 미끼를 물었군.”
“음. 그럼 작전을 개시하지.”
한가롭게 음식이나 만들며 떠들던 러시아군은 사실 당장이라도 떠날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프랑스군이 작은 언덕을 넘어 총질을 시작했을 때도 별다른 피해 없이 도망칠 수 있었다.
“우리가 이겼다!”
“와아아아!”
“너무 깊숙이 쫓지는 마라! 함정일지도 모르니!”
방담은 평소답지 않게 병사들을 금방 멈춰 세웠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장교들이 흘리고 간 건가? 왜 이리 금붙이가 많아?’
방담이 대놓고 귀금속부터 챙기자 병사들도 사방으로 쫙 퍼져서 이것저것 약탈을 시작했다.
“와! 여기 신선한 채소가 있다!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거냐.”
“고기부터 챙겨라. 오늘은 배가 터지도록 먹어 보는 거다!”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러대는 동안 제롬을 보좌하던 몇몇 장교들은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이거 독이라도 탄 거 아냐? 뭐 이리 쉽게 물러간단 말인가.’
‘그러게. 느낌이 좀 이상한데.’
하지만 뮈라는 일부러 병사들을 부추기며 열심히 명분을 만들어 나갔다.
“위대한 나폴레옹 폐하의 군대가 스몰렌스크에서 드디어 첫 승리를 거머쥐었도다! 모두 기뻐해라!”
“와아아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교들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내심 가슴이 벅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지금껏 이만한 전과를 거둬본 적조차 없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어차피 폐하께서는 모스크바까지 진군하실 게 뻔한데. 다 죽어가는 시체처럼 끌려다니기보다는 먹을 거라도 잘 챙기면 한결 낫겠지.’
그리고 프랑스군의 머릿속엔 어느새 부러움과 질투심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이 녀석들은 대체 얼마나 배가 부르면 이걸 다 버리고 가냐.’
‘이놈의 돼지 새끼들! 만나기만 해봐라. 천 쪼가리 하나까지 싹 다 벗겨 먹어줄 테니까!’
한편 멀찍이서 보고를 받던 바르클레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일이 너무 잘 풀리는군.”
전공은 물론이고 약탈의 재미에 제대로 맛을 들린 프랑스군은 이제 도저히 보로디노를 그냥 지나칠 수 없으리라.
고작 2만 명이 머물다 떠난 자리보다는 20만 대군이 보루까지 세워 지키던 곳이 더 먹음직스러울 테니까.
하지만 베니히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적들에게 이렇게 많은 식량을 내어주다니. 전황에 영향은 없겠나?”
“전투에서 이겼을 때를 생각해야지요. 지금이 8월 말이니 그쯤 되면 늦어도 9월 중순일 텐데. 어떻게든 11월까진 발을 묶어둘 동기가 필요합니다.”
그 말에 베니히센은 큰 충격을 받았다.
“설마 사령관과 황태자 전하께서는 프랑스군을 겨울까지 붙잡아둘 생각인가? 나폴레옹이 그렇게까지 멍청할 리는 없을 텐데?”
“그래서 최대한 전투를 지연시키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나치게 소모전으로 끌고 가면 양측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커질 것이다.
하지만 바르클레이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차하면 니콜라이 전하께 부탁을 드려 평화협상이니 뭐니 하면서 묶어둘 수도 있고요. 나폴레옹이 바라는 게 실은 러시아의 굴복과 영국과의 단교 아닙니까?”
“……”
감히 황제를 사칭하여 협상을 진행하겠다니.
알렉산드르 1세 본인이 들었다면 당장이라도 저놈을 총살하라고 지시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담력이 세진 거지?’
베니히센은 자신 앞에 있는 인물이 정말로 제1서부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에 바르클레이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 황태자 전하께서 필요한 건 뭐든지 말만 하라고 하셨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여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전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으음. 알겠네.”
제 한 몸은 끔찍이도 아끼는 베니히센은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자꾸만 일의 규모가 커지자 언제 어디서 끼어들어야 할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대체 전하께서는 어떤 미래를 그리고 계신 거지? 일단은 바르클레이 사령관 곁에 붙어 다니면서 때를 기다려야 하나?’
도화지가 찢어질 정도로 큰 그림을 시도 때도 없이 그려대니 그저 놀라고 감탄하는 것밖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쿠투조프 역시 비슷했다.
3.
니콜라이가 무작정 내기를 걸고 떠나버렸을 때.
홀로 남은 쿠투조프는 고민에 빠졌다.
‘전하의 생각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고작 땅이나 갈아먹고 살던 농노들이 군사교육 좀 받았다고 선구자니 뭐니 추앙을 받는다고?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무엇을 하든 매번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 이번에도 분명 믿는 구석이 있을 것이다.’
쿠투조프는 평소 얼굴을 익혀놓은 병사를 불러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내가 이번에 전하와 내기를 하나 했다. 새로 온 신병들이 얼마나 똘똘한 놈인지, 정신머리는 제대로 박혀있는지 말이야. 나를 대신해서 슬쩍 둘러보고 와주겠나?“
”흐흐. 맡겨만 주십시오!“
대놓고 갑질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젊은 병사는 가슴이 절로 벅차올랐다.
‘드디어 나도 막내에서 벗어나는 건가? 편제를 정비할 때 내 밑으로 우르르 넣어주면 좋겠는데.’
잔뜩 텃세를 부릴 생각에 신이 난 그는 서둘러 주둔지를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대충 쓱 훑어봤는데도 허름한 행색의 민병대 주위에 낯익은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아니, 저건 부사관과 장교들이잖아?’
신식 무기의 도입으로 남아돌게 된 구식 총포류로 무장한 민병대는 전혀 주눅 든 기색 없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의심쩍은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간 병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과 똑같이 홀려버리고 말았다.
”다들 평생 군인으로 살다 죽을 생각인가? 나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네. 내 인생은 소중하니까.“
“프랑스 저놈들만 때려눕히면 당장 조기 전역을 신청해서 예비군으로 전환해야지. 황태자께서 군의 개혁을 이뤄내신 건 정말 천운일세!”
조기 전역? 예비군?
낯선 단어였지만 그 안에 담긴 뉘앙스만으로도 얼마든지 이해가 됐다.
‘군 복무 기간이라도 단축해주겠다는 건가? 그럼 나야 개꿀이지.’
그런데 그보다 더 충격적인 얘기가 연달아 쏟아졌다.
“하지만 평생 농사만 짓는 것도 지겹지 않나? 이왕 전쟁까지 나선 마당에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은데.”
“흐흐. 걱정하지 말게. 나중에 극동이나 아메리카 대륙처럼 인구가 많지 않은 곳으로 이주하면 혜택이 아주 많다더군. 정착지원금은 물론이고 황태자 전하의 사업체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까지. 적어도 배곯을 걱정은 없다는 거지.”
“아, 그 얘기는 나도 들었네. 군 가산점에 복무 기간에 따른 호봉도 반영해준다지?”
“아니, 이보게. 그게 정말인가?”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다 죽는 게 일반적인 시대.
심지어 농노들은 이주의 자유조차 없어 여행 한번 가보지 못하고 평생을 차별과 학대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조건을 내걸다니. 이건 혁명이다!’
‘적어도 내 자식놈은 양질의 교육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키워야지. 암. 그렇고말고.’
민병대의 대화를 듣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꿈에 젖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는 이미 몇 발자국은 앞서 나간 선구자들이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받아주고 있었다.
“전우님! 조금만 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쇼. 황태자 전하의 사업체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게 있습니까?”
“어디로 가야 전역 신청을 할 수 있죠? 농노인데도 받아준답니까?”
그리고 병사들의 뜨거운 반응을 전해 들은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쿠투조프여. 아무래도 이번 내기는 내가 이긴 것 같구나.’
원 역사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에 드높은 사기, 엉망진창이 된 적군까지.
이제 남은 건 며칠 새에 급조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보루를 세워 방어선을 구축하는 일뿐이었다.
‘나폴레옹이여.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아주 깜짝 놀라게 만들어줄 테니까.’
국립과학연구소, 공업연구소 등에서 개발한 새로운 축성 기술을 활용하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어느새 내 입가에는 참을 수 없는 미소가 잔뜩 흘러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