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0)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0)화(10/195)
#08
‘아, 말 안 걸길 바랐는데.’
윤서는 아까부터 기척을 느꼈지만, 상대가 은신 스킬을 사용 중이었기에 모른 척하고 있었다.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으니 이제 윤서도 반응을 보여야만 했다.
“누굽니까?”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자 붉은 머리가 가장 먼저 보였다. 윤서보다 조금 높은 눈높이의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윤서를 보고 있었다. 얼굴을 보자 윤서는 조금 놀랐다. 그가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실력자였다.
“반응이 이상하네. 더 깜짝 놀라야 하는데. 뭔가 한 박자 늦기도 하고.”
“…….”
윤서는 묵묵부답으로 남자를 쳐다보기만 했다.
“뭐, 약해 보이지만 그쪽도 헌터라 이거지. 몇 등급? 헌터 네임은?”
“던전엔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하, 사무직.”
남자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눈빛과 말투에 건방짐이 넘쳐 흘렸다. 그는 윤서에게 한 발짝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엔드파이어 길드의 홍의윤이야.”
윤서는 딱히 악수하고 싶지 않았다. 눈만 살짝 움직여 손을 쳐다봤다가 다시 홍의윤을 올려다봤다.
“윤서입니다.”
“하….”
홍의윤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손을 거뒀다. 윤서는 오만한 성격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홍의윤보다 더 오만한 자를 살면서 얼마나 보아 왔던가. 그저 악수하고 싶지 않아서 안 했을 뿐이었다.
‘홍의윤’이 스킬 <염화의 눈>을 사용합니다.
‘홍의윤’이 당신의 <거짓 기억> 프로필을 보고 있습니다.
얼씨구.
윤서는 삐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어차피 이 사내가 보고 있는 프로필은 윤서가 꾸며 낸 가상의 프로필이기 때문이었다.
윤서, 29세, 남성
등급 : B급
특성 : 생존
스킬 : <스파크> B, <보호하는 베일> B, <세이프존> C
고유 스킬 : (없음)
고유 스킬인 <거짓 기억>으로 잘 꾸며 놓은 프로필로, 나이와 성별 빼고는 모든 게 거짓이었다. S급을 초과하는 간파 스킬을 가진 자가 본다면 들통나겠지만, 윤서는 그런 자가 세상에 없다고 확신했다. L급 스킬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뭐야. 시시한 새끼였잖아.”
가호 신도, 고유 스킬도 없는 데다가 일반 스킬도 내근직임이 분명해 보이니 홍의윤은 바로 흥미를 잃은 얼굴이 되었다. 윤서는 실망하는 남자를 보며 저 또한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인류 도감>을 사용합니다.
상대의 시스템 프로필을 열람합니다.
인류 도감 : 홍의윤, 27세, 남성
등급 : A급
(아이템 ‘템퍼 밴드’ 사용으로 화염 저항 능력이 향상됩니다)
특성 : 타오르는 자
(화염의 신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암석의 신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번개의 신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스킬 : <염화의 눈> A. <마그마 임팩트> A, <불의 고리> B, <메테오> B, <헬파이어> S
고유 스킬 : <명왕누대> A, <이터널 헝거> A
∗ 그 외 스테이터스는 던전에서만 열람 가능합니다.
‘A급….’
생각보다 높은 등급을 보고 윤서는 내심 놀랐다. 스킬 보유 수도 많고 그중에 하나는 S급 스킬이니 이 정도면 A급 헌터 중에서도 상위권이었다. 박수빈은 힐러고 이쪽은 공격 특화라 단순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능력치만 따지면 박수빈보다도 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와는 상관없지만.’
윤서는 고개를 까딱하고는 뒤돌아 유리 벽면에 손을 댔다. 더 늦으면 길드원들의 잔소리 폭격을 당할 테니까.
윤서에겐 이 벽을 통과할 수 있는 스킬도 있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스킬도 있으며, 심지어 길드원들이 있는 곳으로 공간 이동 할 수 있는 스킬도 있지만 그저 육체의 힘만으로 벽을 타고 올라가는 걸 택했다. 각성자는 기본적으로 보통 인간보다 신체가 강하기에 가능했다.
“흥, 벌레처럼 기어오르기는.”
3층쯤 올라갔을 때 홍의윤이 옆에서 훌쩍 지나쳐 갔다. 아이템을 이용해 비행하는 모양이었다.
윤서는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어린애처럼 시비 걸기를 잊지 않는 저자와 이제는 같은 길드인 것이다. 저야 그렇다 쳐도 낙엽 길드의 착하고 순한 사람들이 어떻게 버틸지 걱정이었다.
***
윤서가 도착하자마자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던 고희원이 달려들어 왜 이렇게 늦었냐고 잔소리를 해 댔다. 명찰과 명함, 기념품을 건네받고 콘퍼런스 홀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물론 홀 규모에 비하면 낮은 밀도였으나 윤서가 보기에는 개미 떼 같았다.
“오빠가 항상 약속 시간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건 아는데 오늘까지 그러는 건 오바예요. 봐 봐. 사람들 벌써 다 와 있다고요.”
홀 내부엔 원형 테이블이 일곱 개 있었는데, 그중 ‘석영’이라는 표지판이 달린 테이블만이 텅텅 비어 있었다.
“왜 테이블이 일곱 개죠?”
“우리 옆쪽 테이블이 1인 길드라 합쳐서 그래요. 화심이랑 딥블루. 용병들이요.”
용병이란 개념은 최근에 생겼다. 가이아 시스템 자체가 생긴 지 1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용병은 정말로 생긴 지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특정 신의 가호를 받거나 스킬, 아이템을 입수하면 길드를 만들 권한이 생기고, 그 사람이 마음이 맞는 이들을 모아 길드를 설립하면 가이아 시스템에 ‘길드’ 카테고리가 만들어진다. 이 길드 카테고리에서는 ‘길드석으로 이동’, ‘길드원 위치 추적’, ‘길드 대화’, ‘길드 아공간’ 등 던전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스킬도 생성되는데 길드 경험치에 따라 스킬 효과도 증감했다. 낙엽의 경우에는 ‘길드 대화’ 스킬 하나만 있었다. 윤서는 던전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사용해 본 적은 없었다.
길드에 가입하고, 안 하고는 본인 자유였으나 길드가 있는 게 던전에서 싸우기 유리하기 때문에 많은 헌터가 가입했다. 그러나 사람이 모인 곳이 늘 그렇듯 여러 가지 해악들이 생겨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각성자를 데려다가 노예 계약을 맺거나 던전 부산물 수익을 몇몇이 독점한다든가, 길드 간부가 되기 위한 알력 다툼이라든가….
2년 전 그런 것들이 싫었던 한 미국인 S급 헌터가 자신의 이름 그대로 길드를 세우고, 용병으로 활동할 것을 공표했다. 그자는 다른 길드의 의뢰를 받아 던전을 함께 공략하고 정당한 대가를 얻었다. 그 후로 1인 길드, 즉 용병 헌터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현재 1인 길드 테이블에는 과묵해 보이는 덩치 큰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헌터 네임은 딥 블루. 그 옆은 공석이었는데 명패를 보아하니 화심이란 자가 앉을 곳인 듯했다.
“윤서, 너 이 자식. 왜 이렇게 늦게 와.”
“안 늦었는데요.”
“정각에 오란다고 진짜 정각에 오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 특히 오늘 같은 날은 30분 전엔 와 있어야지. 너 한국인 맞냐, 엉?”
낙엽 길드 테이블에 오자마자 길드장이 잔소리를 퍼부었다. 윤서가 그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려보내며 심드렁히 살펴보니 길드장 옆자리와 박영범 팀장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는 길드원들과 인사하면서 저를 마중 나온 고희원이 앉았던 자리임이 분명한 박영범 옆에 냉큼 앉았다.
“아, 오빠! 거기 내 자린데.”
“저기 자리 비었잖아요.”
“아우, 씨.”
고희원이 툴툴대며 길드장의 옆자리에 앉았다. 윤서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고 길드장은 ‘너 이따 보자’라는 표정을 지었다. 박영범은 우걱우걱 쿠키와 푸딩을 처먹고 있었다.
“우리 에이스 윤서 씨, 이거 맛있다. 많이 먹어.”
“팀장님이나 많이 드십시오.”
윤서가 아까 집어 온 쿠키를 내밀자 박영범이 고맙다고 씩 웃었다.
“윤서 씨, 언제 오나 했어요.”
일단 급해서 이곳에 앉긴 했으나 완벽한 자리는 아니었다. 왼쪽 옆에 박수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수빈은 오늘도 화사하고, 수상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늘 작업복 입은 모습만 보다가 오늘 보니까 윤서 씨 장난 아니네요. 외모가 워낙 뛰어나셔서 무슨 옷을 입든 잘 어울릴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슈트를 입으니…. 몸매도 좋으시고 자세도 곧으신 게… 혹시 따로 운동하시는 거 있어요?”
“감사합니다. 수빈 씨야말로 근사하신데요. 따로 운동하는 거 있습니까?”
“칭찬을 바라고 한 칭찬은 아니었는데. 전 정말 윤서 씨 옷 태에 감격해서 한 말이라고요.”
“저도입니다만.”
딱딱한 대꾸에 박수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빙긋 웃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요?”
“안 늦었습니다.”
“하긴 윤서 씨는 항상 지각은 안 하죠. 아슬아슬하게 오지. 또 어떤 취미 생활을 즐기다 왔을지 궁금하네요. 드라마 시청?”
“아뇨. 오늘은 새벽 낚시 후 등산을 다녀왔습니다. 수빈 씨는요?”
와우, 박수빈이 감탄했다.
“항상 생각하는 건데 윤서 씨 취미 생활 정말 다양하게 즐기네요. 겉보기엔 심드렁하고 매사 무심해 보이는데 낚시에 등산에….”
“윤서 오빠 엄청 부지런하죠. 드라마도 보고 게임도 하고 독서도 하고, 오빠 바둑도 할걸요? 아마 3단인가.”
“윤서 씨, 몇 년 전에 피아노 학원도 다녔었잖아.”
“맞아. 그러다가 또 생뚱맞게 프로그래밍 학원 다니기도 하고. 취미는 많은데 좀 얕고 넓은 스타일이에요.”
길드원들이 윤서에 대해 떠들어 댔다. 윤서는 그동안 이들에게 너무 숨기는 게 없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때 오오, 하는 감탄과 웅성거림이 들렸다. 들뜬 표정으로 화기애애 잡담 떨던 이들이 모두 한곳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자 단단한 체격의 남자가 한 명 보였다. 까만 곱슬머리, 서늘한 눈, 한일자로 꾹 다문 입매. 그는 정장이 아니라 헌터복을 입고 있었다. 깔끔하고 각이 잡혀 있긴 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입을 옷은 아니었다.
“와, 오늘 같은 날 윤서 씨보다도 늦게 오는 인간이 있었네.”
“엄청 강해 보이는군요. A급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