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00)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00)화(100/195)
12. 리벤저의 유언집행자
#92
“와아….”
보통 사람이라면 납작 엎드린 채 덜덜 떨고만 있을 울퉁불퉁한 바위 위에 똑바로 선 권지한이 사방을 둘러 보며 감탄했다.
“난 형이 등산 같은 거 왜 다니나 했는데 올라오니까 좋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야.”
새벽부터 만나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산을 오른 지 세 시간 만에 가리왕산 정상에 도착했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마침 오늘은 날씨도 좋아 하늘은 새파랗고 하얀 구름은 전망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만 피어 있었다. 깎아 내린 듯한 절벽, 녹색 숲의 물결, 운해를 거느린 먼 곳의 봉우리. 가리왕산의 전경은 제법 많은 산을 탄 윤서에게도 흔치 않은 풍경이었다.
“그동안 등산인들만 이런 풍경을 보고 있었단 말이야?”
“그건 아니죠…. 여긴 평범한 등산인들은 못 올라올 곳이니까.”
“왜?”
“왜냐니. 장난합니까.”
윤서는 어이가 없어서 그들이 올라온 길을 내려다봤다.
절벽이었다. 암벽등반가들이 장비를 다 갖추고 오를 곳을 그들은 아무런 장비 없이 맨손과 두 발로 올라왔다. 사실 윤서는 중간에 <염력>을 아주 잠깐, 진짜 잠깐, 정말 찰나 사용했는데 권지한은 스킬을 사용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신체 능력만을 사용해 올라온 것이다.
“이런 광경이 드문 거라면 사진 찍어야겠다. 형, 같이 찍자. 우리의 첫 등산 기념.”
권지한이 윤서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윤서는 단단하고 커다란 손이 닿는 순간 꽁꽁 얼어붙어 그가 움직이는 대로 자세를 취했다. 권지한은 윤서와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운해를 배경으로 셀카를 수십 장이나 찍었다. 사진을 확인한 권지한이 빙긋 웃었다.
“우리 형아는 아무렇게나 찍어도 엄청나게 잘 나오네.”
그건 윤서가 권지한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앞으로 형 등산 다닐 때 나도 같이 갈래. 나중에 등산 기념 앨범도 만들 거야.”
“이게 마지막 산입니다만.”
“…….”
“아, 한라산이 남았나.”
윤서가 먼 봉우리에 맺힌 구름을 바라봤다.
권지한은 잠깐 말이 없다가 윤서의 옆에 서서 윤서가 바라보는 곳을 보는 척, 윤서를 쳐다봤다.
“한라산만 가면 우리나라 산은 다 가 본 거야? 그럼 해외도 있잖아.”
“우리나라 산 다 가 본 건 아니에요. 그냥 한라산을 마지막으로 더는 등산은 안 하려고요.”
“왜?”
“질려서요. 권지한 헌터가 가겠다면 추천해 주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지리산이랑 금강산이 좋더군요.”
대격변 이후 북한이 무너지고 반강제로 통일되어 금강산에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금강산은 여름, 지리산은 겨울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가 봤어요?”
“안 가 봤어. 나 등산이라곤 동네 뒷산이랑 던전에 있는 산 말고는 안 했거든.”
“그럼 지리산에는 꼭 가 보세요. 이왕이면 겨울에. 정상에서의 풍경도 아름다운데 가는 길도 장관입니다. 눈 두는 곳마다 하얗게 눈이 쌓여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지요.”
“그래, 그렇게 장관이고 아름다운 지리산에 형은 몇 번이나 갔어?”
“…….”
“응?”
“…한 번이요.”
윤서가 S급에게만 들릴 만한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권지한이 이제 다른 델 보는 시늉을 그만두고 노골적으로 윤서를 응시했다.
“그렇게 좋다면서 한 번으로 끝?”
“한 번도 안 간 것보다는 낫죠. 거기 서 보세요. 특별히 독사진 찍어 줄 테니 앨범에 넣든가.”
권지한은 미동도 없었다. 회색 홍채가 진해진 게 뭔가 이 화제에 꽂힌 듯 보였다.
“산은 어디 어디 올라가 봤어?”
“알아서 뭐 하게. 포즈나 취하라니까요.”
“안 찍을래. 혼자 찍는 사진은 의미 없어. 그동안 어느 산에 올라갔는지 말해 줘. 남산, 관악산 이런 데?”
“그런 데는 안 가 봤습니다.”
“어디 어디 갔어?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왜 숨기는 거야? 수상하네.”
윤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궁금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려운 질문이 아니니 밝히겠습니다. 백두산, 지리산, 설악산, 금강산, 덕유산, 계방산, 태백산, 오대산. 그리고 오늘 가리왕산까지 아홉 곳에 올랐군요.”
“한라산까지 하면 열 개네. 왜 열 군데만 가고 마는 거야?”
“권지한 헌터는 꼭 100곳도 더 오르길 바랄게요. 우리나라 모든 산을 정복해서 권지한 등정 에세이도 내고요. 출간되면 제가 100부 사겠습니다. 아, 꼭 산 에세이가 아니라도 다른 에세이는 낼 생각 없습니까? 다른 S급 헌터들은 에세이 한 권씩 갖고 있던데 권지한 씨도 어렸을 때부터 여러모로 고생하며 살아서 이야깃거리도 많잖아요.”
“또 관심 없으면서 나한테로 화제 돌리지.”
윤서는 억울했다. 그는 정말 권지한의 에세이에 대한 관심이 충만했다. 할 수만 있다면 투자라도 하고 싶었다.
“내가 화제를 돌리려는 건지 진짜 궁금한 건지 자기가 뭘 안다고….”
“설마 나한테 진짜 관심 있진 않을 거잖아.”
“…….”
“어……?”
권지한이 눈을 깜빡였다. 윤서는 뭔가 민망해진 기분에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점심 식사로는 뭘 먹을까요. 산채비빔밥이나 삼계탕이나…. 아니면 둘 다?”
“…….”
무시당한 윤서는 그대로 등 돌렸다. 도토리묵과 파전, 산채비빔밥, 삼계탕 전부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깎아 내린 듯한 절벽 쪽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었다.
어딘지 서늘한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리벤저 중에 등산이 취미인 사람은 누구였어?”
“…….”
윤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무서워서 권지한 쪽으로 돌아보지도 못했다. 처음부터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던 건지 권지한이 뒤이어 말했다.
“형, 린다 데이지 헌터 말이야.”
“…….”
“그 사람의 유언은 정확히는 뜨개질을 많이 떠라 이런 게 아니었지?”
“…….”
“니트 100장 뜨기 같은 거였지?”
말투는 세상에서 가장 대수롭지 않은 것을 묻는 것 같았는데 음성은 낮고 서늘했다.
윤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망했다.’
두 질문 모두 그냥 별거 아닌 투로 대답하면 될 것들이었다.
네, 사실 맞습니다. 니트 100장 뜨기 유언을 남겨서, 그래서 제가 100장을 뜬 겁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답했으면 될 일인데 너무 놀라서 반응도 하지 못하고 얼어 버렸다. 등 돌리고 있으므로 표정은 들키지 않았지만, 심장 박동은 S급 헌터에게는 숨기기 쉬운 부분이 아니었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고스란히 듣고 있을 것이다.
잔뜩 정곡을 찔린 티를 내 놓고 이제 와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민망했다.
하, 젠장.
윤서는 욕설을 삼키며 뒤를 돌았다.
권지한의 입가는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어딘가 차가워 보였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윤서는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대답해 드리자면, 맞습니다. 뜨개질을 워낙에 좋아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살아 있다면 지금도 모자도 뜨고, 가방도 뜨고 하고 있었겠죠….”
윤서는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때 일부러 아련한 눈을 해 보였다.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권지한은 걸려들지 않았다.
“그럼 열 개 산 등산을 유언으로 남긴 사람은 누구였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슨 말인지는 형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뜨개질, 등산, 낚시, 베이킹. 전부 유언이었던 거였잖아. 그렇지?”
윤서는 입술을 달싹였다. 자연스럽게 대답하고 싶은데 자꾸 심장이 쿵, 쿵 큰 소리를 내며 뛰는 바람에 쉽지 않았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딱히 유언 때문이 아니라 리벤저의 영향을 받아서 제 취미가 된 겁니다. 어제 다 말씀드렸는데요.”
“아아, 그래? 초코크랙쿠키 말고 다른 건 구워 본 적 있어?”
“있습니다. 바닐라 쿠키, 크로와상, 타르트….”
“거짓말이네.”
윤서가 눈을 깜빡깜빡하자 권지한이 손가락으로 제 눈을 가리켰다.
“형 눈이 거짓말이라고 알려 줬어. 심장 소리 딱히 듣지 않아도…. 우리 형은 거짓말을 잘 못 하거든.”
권지한이 다가왔다. 윤서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권지한을 쳐다봤다가 뒤쪽의 새파란 하늘을 봤다가 절벽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권지한을 향했다. 분명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인데 윤서는 아주 좁은 공간에 권지한과 단둘만 있는 것처럼 느꼈다. 어째서인지 도망치고 싶었다.
가까이 온 권지한은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윤서의 눈가를 툭 건드렸다.
“내려가자. 형 밥은 먹이고 시작해야지.”
…시작?
뭘 시작해?
윤서는 굶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