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01)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01)화(101/195)
#93
식당은 주차장은 물론이고 내부도 가득 차 있었다. 화창한 일요일이라 등산 온 사람들이 많은 탓이다. 윤서와 권지한은 알록달록 화려한 등산복을 입은 중년인들 뒤에 서서 10분 정도 기다리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권지한은 변장 아이템인 피어스에 존재감을 흐리게 하는 아이템도 사용해서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딱 2명만 앉을 수 있을 법한 구석 테이블을 배정받았다. 테이블 사이가 좁아서 바깥에 앉은 사람은 불편한 구조였는데, 권지한이 선뜻 윤서에게 안쪽 자리를 양보했다. 권지한은 윤서보다 체격이 크지만 아주 두껍지는 않고 슬림하면서 탄탄한 몸매라 바깥 자리에서도 요령 좋게 앉았다.
직원은 따로 메뉴판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고 알아서 주문해야 하는 곳이었다.
“뭐 먹을 겁니까?”
“형이 먹는 거랑 똑같이.”
“일단 간단하게 시키겠습니다.”
“응.”
윤서가 손을 들고 직원을 불렀다. 직원이 물과 밑반찬을 가져다주며 신경질 내듯이 주문하세요, 했다.
“백숙 네 그릇, 도토리묵, 파전, 버섯전, 산채비빔밥 두 개, 공깃밥 네 개 주세요.”
“네?”
직원이 허겁지겁 메모지와 펜을 꺼냈다. 윤서는 다시 주문을 읊었다.
“닭백숙 네 그릇, 오리백숙 두 그릇, 도토리묵, 파전, 버섯전, 산채비빔밥 두 개, 공깃밥 네 개 주세요.”
메뉴가 은근슬쩍 늘어나 있었다. 직원이 손을 빠르게 움직이면서 테이블을 훑었다.
“몇 명이세요? 넓은 자리로 옮겨드려요?”
“괜찮습니다. 두 명입니다.”
“두 분이서 다 먹는다고요…?”
직원이 놀라서 물었다. 윤서는 이런 반응을 많이 겪어서 담담하게 네, 했다. 그러자 직원이 손뼉을 쳤다.
“혹시 먹방 스트리머 같은…. 우리 식당도 이제 유튜브에 올라가는 건가! 아니, 잠깐. 카메라는 어디 있어요? 주문하는 것부터 찍어야죠! 초보 스트리머시구나. 아, 나 머리칼 엉망일 텐데. 사장님 인터뷰도 하나요? 사장님 자리 비웠는데 제가 대신 할게요.”
잔뜩 호들갑 떠는 직원을, 그런 거 아니고 그냥 평범한 대식가라고 긴 설득 끝에 주방으로 보냈다. 겨우겨우 주문에 성공한 윤서가 굶주림에 지쳐 한숨을 쉬었다.
“형, 여기 나물 맛집이네. 먹어 봐.”
테이블 위에는 이미 물과 숟가락, 젓가락이 세팅되어 있었다. 주문하는 사이 권지한이 해놓은 것이다. 윤서가 젓가락으로 나물 3종을 하나씩 먹었다. 고소하고 짭짤한 게 정말 맛있었다.
“그래서 형은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해 이런 다양한 취미를 갖게 된 거야?”
콜록, 콜록.
윤서가 헛기침했다. 사람을 방심하게 해 놓고 정곡을 찌르는 권지한은 역시 착하기보다는 악당처럼 보였다.
“그런 대화를 하기에는 장소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군요.”
“괜찮아. 다들 자기 얘기 하기 바쁘고 시끄러워서 우리 대화는 안 들릴 거야. 그리고 다른 장소로 간다고 해도 말해 줄 거 아니잖아.”
“아뇨, 그쪽은 변장을 했어도 잘생기고 몸도 좋은 청년이기 때문에 다들 알게 모르게 이쪽에 관심 갖고 있습니다. 존재감을 흐리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열한 시 방향, 두 시 방향, 여덟 시 방향 테이블 손님들이 힐끗거리는 게 안 느껴집니까?”
“아아, 그래. 내가 너무 잘생겼네. 그럼 소리만 안 들리게끔 할게.”
권지한이 피식 웃으며 아이템을 사용했다. 어제 박수빈이 사용한 것과 비슷한 것으로 둘의 대화가 다른 이에게는 들리지 않게 하는 아이템이었다.
아이템이 발동되고 권지한은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올리며 말했다.
“자, 그럼 얘기해 봐. 형의 그 수많은 취미 활동은 형이 다중 인격자여서가 아니라 리벤저들의 죽기 전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한 거였던 거지?”
“맞습니다.”
윤서가 가볍게 긍정했다. 그는 산을 내려오면서 권지한이 어떤 질문을 할지 시뮬레이션을 돌렸고, 많은 고민 끝에 진화 특성을 지닌 S급 각성자를 속이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오감이 남다르게 발달한 사람을 속이려 하면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이니까.
‘내가 그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게 윤리적으로 잘못된 일도 아니고…. 살아남은 동료로서 당연한 거야. 이걸 감추는 게 더 이상해.’
그렇게 생각한 윤서는 깔끔하게 인정하는 걸 선택했다. 다만 눈치 빠른 권지한은 유언을 모두 이루어 준 후 죽으려는 것까지 눈치챌 수도 있으므로, 거짓을 조금 섞기로 했다.
“리벤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시작한 취미이고, 지금은 제 취미가 되었습니다. 제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생각해요.”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줬는데 니트는 100장만 뜨고 그만두고, 등산은 10곳만 오르고 그만두고?”
“그만둔다고 말하긴 했지만 언젠간 다시 뜨개질하고, 산을 타는 날이 올지도 모르죠. 권지한 씨도 질렸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엔 다시 하고 싶어진 그런 취미 있을 거 아닙니까. 아, 취미 없다고 했었나요. 그럼 질려서 다신 안 먹겠다 했지만 나중엔 먹고 싶어질 때 있잖아요. 그러고 보니 평소에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궁금하군요. 뭘 좋아합니까?”
“형, 궁금하지도 않은 거 물어보면서 화제 전환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털어놔.”
“왜 권지한 헌터는! 전부터 계속!”
“응?”
“왜 내가 안 궁금하면서 물어본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어?”
“전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취미가 뭔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자기는 존나 한마디도 안 하면서 왜 남의 인생만 파고들려고 하는데요?”
몇 번째 반복된 대화에 답답해진 윤서가 조금 언성을 높였다. 권지한이 눈을 끔벅였다.
그때 직원이 트레이를 끌고 테이블로 다가오는 바람에 대화가 잠시 멈췄다. 직원은 밑반찬 몇 가지를 더 가지고 왔고, 양념장과 파전, 공깃밥 등을 그들 앞에 두면서 정말 다 먹을 수 있냐고 한 번 더 물었다. 윤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직원이 다시 멀어졌다.
권지한이 피식 웃으며 젓가락으로 파전을 찢었다.
“그동안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어?”
“…….”
“알았어. 대답해 줄 테니까 형도 털어놔 주라. 내가 계속 대답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들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조금 초조하네. 우리 사이도 이렇게 둘이서만 밥도 먹을 만큼 가까워졌으니까 그만 숨기자.”
“전 다 얘기했는데 뭘 숨긴다는 겁니까.”
권지한이 파전에 간장을 조금 묻혀서 윤서의 공깃밥 위에 올렸다.
“아, 그렇네. 형은 이제 전부 털어놓을 참이었지. 어때? 다 털어놓을 생각 하니까 확실히 마음이 편하지?”
“…….”
윤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던전에서의 일들을 얘기하며. 리벤저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떤 말을 남기고 죽었는지 얘기하며.
윤서는 가슴이 후련해지는 걸 느꼈다.
그럼 이 빌어먹을 유언들에 대해서 털어놓으면 그때도 편해질까?
그 인간들이 망할 유언들을 남겨서 10년간 죽지 못해 살았다고. 얼마나 이상한 유언들인지 아느냐고. 윤서도 사실 너무나 공감받고 싶었다.
그리고 권지한은 이야기를 들어도 널리 퍼뜨리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간단한 일 같은데 왜 이렇게 답답하지.’
윤서는 가슴이 답답하고 두통이 오는 것 같아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주말 오후,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등산인들은 막걸리를 들이켜며 얼큰하게 취해 왁자지껄 수다를 떨었다. 직원들은 바쁘게 돌아다니며 주문을 받고, 그릇을 치웠다. 윤서와 권지한의 테이블에도 주문한 음식이 모두 나왔다. 자리가 부족해서 테이블 하나를 더 붙였는데, 권지한이 그것을 도왔다.
백숙에서 뜨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산채비빔밥의 윤기 흐르는 나물들과 밥알,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부침개를 앞에 두고 이런 고민이나 하자니 윤서는 신경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냈다. 막 뚜껑을 열려는 그 순간이었다.
“형, 혹시 아침밥 몇 시에 먹었어?”
“갑자기 그건 왜 묻죠?”
“그냥 궁금해서. 나는 안 먹고 나왔는데, 형은?”
“다섯 시에 먹었습니다.”
“지금 1시잖아. 벌써 여섯 시간 지났네.”
“네.”
“먹으면서 생각해.”
“하아…. 밥이 넘어가겠습니까.”
권지한이 숟가락으로 윤기 흐르는 밥알을 적당히 뜨고, 노릇노릇한 파전을 적당하게 찢어 윤서에게 내밀었다. 팔도 길쭉해서는 냄새부터 맡게 한 다음 입술을 툭 건드리는데 윤서는 입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냠냠냠…. 오물오물 받아먹으며 윤서는 다시 약병 뚜껑을 열려고 했다.
“형, 이것도 먹어.”
이번에 권지한이 내민 것은 도토리묵이었다. 윤서의 입술이 사르르 열렸다. 도토리묵 역시 고소하고 맛있었다.
윤서가 약병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대신 숟가락을 들었다. 먼저 밥 한 숟가락을 크게 떠서 먹고 그다음 도토리묵과 나물 밑반찬들을 먹었다. 권지한이 빙긋 웃었다.
“닭백숙 진짜 맛있다. 여기 레시피 알고 싶네.”
“지금 백숙이 넘어가겠냐고요.”
“그러게. 안 넘어가겠지만 조금이라도 들어 봐.”
권지한이 윤서의 앞에 닭백숙 뚝배기를 끌어다 놨다. 윤서의 젓가락이 당연하다는 듯 닭백숙으로 향했다.
하아, 정말 고민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윤서는 세상 고민스러운 얼굴로 닭가슴살을 입에 넣었다.
***
“엄청난 걸 숨겨 온 건 아닙니다. 계속 얘기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이어 갔다.
밥을 먹으면서 쌓여 있던 답답함도 같이 소화해 버린 윤서는 권지한에게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고, 실천에 옮겼다.
“저는 리벤저의 유언 집행자입니다.”
“유언 집행자….”
권지한이 한 글자, 한 글자를 뇌에 새기듯이 되뇌었다.
윤서는 슬쩍 곁눈질하며 권지한의 표정을 살폈다.
‘나는 리벤저의 유언을 들어주고 있습니다’라는 게 너무 길어서 유언 집행자라는 다섯 글자로 짧게 줄여말했는데, 잘 알아들었을까. 타인에게 밝히는 게 처음이라서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조금 걱정됐는데 권지한의 표정은 비웃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심각하고 진지했다.
“역시 그랬구나. 그래서 그때 그런 말을 했던 거였어.”
“제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저번 던전에서, 마력 고갈에 걸렸을 때 이렇게 말했거든.”
‘설마 유언을 남기고 죽을 생각이에요?’
‘유언 남기기만 해 봐. 죽여 버릴 테니까.’
얘기를 듣자 윤서도 기억났다. 윤서는 피곤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