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02)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02)화(102/195)
#94
“그때는 절박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안 그래도 들어줄 유언이 많은데 거기서 하나라도 추가되면 제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응응, 엿 같겠지.”
“맞습니다.”
“들어줄 유언이 아직 많이 남아서 한번 끝난 유언은 더 하지 않는 거구나. 뜨개질 같은 거 말이야.”
“정확히는 ‘손뜨개질로 니트 100장만 떠 줘’였습니다.”
“등산은?”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금강산, 덕유산, 계방산, 태백산, 오대산, 가리왕산 정상 올라가 줘’.”
“…그러니까 죽기 직전, 숨넘어가려는 순간에 그걸 다 읊었다 이거지?”
“그러니까요. 랩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완전 저 엿 먹으라는 거죠.”
“맞네, 맞네. 심지어 다 험한 산들뿐이잖아.”
권지한이 적극적으로 리액션하면서 상체를 윤서 쪽으로 숙였다.
“그럼 그 유언들이 대체 몇 개였어? 리벤저는 1200명이 넘었잖아.”
“리벤저 전원이 유언을 남겼다면 전 미쳐 버렸을 겁니다. 다행히 제가 집행해야 하는 유언은 301개였어요.”
“301개도 존나 많은데.”
“그렇죠?”
“난 그 정도일 줄은 몰랐지. 진짜 힘들었겠다.”
권지한이 잘생긴 이목구비 전체로 놀라면서 공감해 주자 윤서는 10년간의 울분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그럼 지금은 몇 개 남았어?”
“뜨개질을 다 끝냈으니 이제 열일곱 개 남았군요.”
“10년간 284개나 해결한 거야? 대단하다.”
윤서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권지한은 어떻게 암산도 잘할까?
권지한이 못 하는 게 있을까?
“그런데 설마 그 유언들이 전부 니트 100장 뜨기, 등산 10군데 하기 이런 건 아니었겠지? 그랬으면 284개나 해결하지는 못했을 것 같은데.”
“맞습니다. 다행히 간단한 유언들도 있었습니다.”
윤서가 딸기라떼를 스푼으로 저으면서 간단한 유언들을 읊었다.
스쿠버다이빙, 패러글라이딩, 스카이다이빙 같은 단 한 차례로 끝나는 것들부터 일기장 다섯 권 쓰기, 국밥 100그릇 먹기까지….
“일기장 다섯 권이면 얼마나 걸려?”
“초등학생용 그림 일기장으로 사면 한 권당 25일입니다. 처음 다섯 글자, 다섯 줄, 다섯 장 쓰기가 제일 힘들고, 그것만 넘기면 자기 전에 자연스럽게 일기장을 펼치고 있더라고요.”
“읽어 보고 싶다. 나 보여 주라.”
“다 불태웠습니다.”
“…….”
권지한이 가만히 윤서를 들여다봤다.
윤서는 딸기라떼를 마시다가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마주했다.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가늠하던 권지한은 진실이라는 걸 알았는지 과장되게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서채윤 자필 일기장을 그렇게 태워 버리다니. 형이 뭔데 멋대로 서채윤의 유물을 없애?”
“제가 본인인데요.”
“또, 또 선택적 서채윤 한다.”
“…….”
“아무튼 아깝다. 우리가 일찍 만났다면 무조건 읽었을 텐데.”
윤서는 이제야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니트 100장 뜨기 같은 건 유언 전체로 볼 때 난이도가 어느 정도야? 최근에야 끝낸 걸 보면 난이도 상인가.”
“어렵다기보다는 그냥 귀찮고 성가신 유언이었죠. 중하 정도 되겠네요.”
“그 귀찮고 성가신 유언들 좀 읊어 줘 봐. 얼마나 귀찮고 성가신지 객관적으로 판단해 줄게.”
윤서는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려 주기 위해 진짜 귀찮고 성가신 유언을 말했다.
“스쿼트 3백만 회, 러닝 5천 회.”
“앞으로 살아갈 날이 긴데 그 정도는 껌이지.”
“…초코크랙쿠키 10만 개 굽기.”
“그거 그냥 공장 사거나 기계 돌리면 되는 거 아냐? 하루에도 끝내겠다.”
그 생각은 못 해 본 윤서가 움찔했다.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였다. 돈은 좀 들겠지만.
“풍경화 120점, 인물화 30점, 정물화 30점 그리기도 있습니다.”
“존나 쉽네. 난 내일까지 끝낼 자신 있어.”
“어떻게요?”
“잘 그려야 한다는 말은 없잖아. 낙서도 엄연한 그림 그리기인데. 봐 봐, 형.”
권지한이 인벤토리에서 펜을 꺼내더니 냅킨에 쓱쓱 그렸다. 조그만 얼굴에 날렵한 콧대, 동그란 눈을 그리고 풍성한 속눈썹까지 쓱쓱. 아주 잘 그리진 않았으나 아주 못 그리지도 않았다.
“이걸로 인물화 1점 완성. 참고로 이건 형이야. 가질래?”
“버려요.”
“너무하네.”
“줄 서서 먹는 맛집 열 군데 가기도 있습니다.”
“장난해, 형? 지금까지 말한 것 중에 제일 간단한 거였어.”
그건 윤서도 인정하는 바였다.
“‘헌터 앤 스킬’ 골드 메달.”
“게임 말하는 거 맞지? 나 그거 플래티넘까지 갔는데.”
“시 500편 쓰기.”
“아무거나 주제 던져 봐. 즉흥시 짓기가 어떤 건지 보여 줄게.”
윤서가 권지한을 노려봤다.
“딸기라떼를 주제로 지어 보시죠.”
“딸기라떼. 달콤하다. 매화꽃 잎. 사랑스럽다. 그리고 너.”
뭔 개소리야. 윤서는 알쏭달쏭했으나 권지한은 뿌듯한 표정으로 어때, 굉장하지? 했다. 그 자신감에 압도되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 낚시로 참돔 9짜 10마리 낚시.”
“오….”
드디어 권지한이 허를 찔린 듯한 반응을 했다. 윤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는 벌써 다섯 마리나 잡았습니다. 늘 가는 스폿이 있는데 그곳 낚시꾼들은 다 저를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가면 ‘어어, 참돔 9짜 청년 왔어?’ 하고 인사해 주지요.”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내가 놀란 건 너무 쉬워서 놀란 거였어.”
권지한은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낚시라는 게 뭔데? 결국 물고기를 붙잡으면 되는 거 아냐? 바닷속에 직접 들어가서 낚아채면 그게 곧 낚시지. 참돔 9짜? 나한테 한 시간만 줘 봐. 더 큰 놈도 잡아 올 테니까.”
“권지한 헌터, 낚시를 전혀 모르는군요. 참돔 9짜는 일단 마주치기도 어려운 물고기입니다. 던전으로 치면 거대 흡혈 뱀장어입니다.”
“거대 흡혈 뱀장어 지금까지 스무 마리는 본 것 같아. 그리고 다 잡았어.”
“…….”
“귀찮고 성가신 유언들 좀 말해 보라니까?”
권지한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잠깐 혈압이 치솟았지만 윤서는 아직 많은 유언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애송이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유형의 유언을 알려 줬다.
“음식을 먹을 때 스무 번 이상 씹기. 참고로 아이스크림도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스무 번 이상 씹어야 합니다.”
“…그건 좀.”
“반드시 아침은 챙겨 먹기.”
“고문 아냐?”
“식사할 때는 나물 3종, 고기 1종, 찌개나 국물 필수. 밥은 잡곡밥이나 흑미밥.”
“장난해? 누가 그딴 유언을 남긴 거야? 꼰대야 뭐야?”
권지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윤서의 콧대가 높아졌다.
“다른 것들은 그냥 들어주면 끝인데 방금 말한 것들은 살아가면서 계속 지켜야 하는 것들이라 여간 귀찮은 게 아닙니다. 이런 패시브 유언들이 12개나 됩니다.”
“패시브 유언….”
“성실한 직장인이 되라는 유언도 있죠. 참고로 성실의 기준과 기간도 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권지한이 혀를 찼다.
“미쳤다. 그딴 빌어먹을 유언을 남긴 놈은 대체 누구야?”
“마크 파심 헌터입니다.”
“마크 파심, 이름도 재수 없는 외국인이….”
권지한이 말을 하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리벤저에 대해 잘 몰랐다. 지구를 구한 영웅들이지만 모든 이름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한국인들 말고는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분명 낯설어야 할 이름이 익숙했다.
마크 파심, 마크 파심. 중얼거리던 그는 곧 익숙한 이유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마크 파심은 생존 리벤저잖아.”
윤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생존 리벤저. 그 끔찍한 곳을 간신히 살아나온 인간이 어느 날 저한테 전화하더니 그딴 유언을 남기고 끊었어요. 제가 얼마나 기가 찼는지 압니까? 번호는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봐도 대답도 없고, 다시 걸어도 안 받고. 그러다 몇 시간 후에 사망 뉴스가 뜨더군요. 어이가 없어서 진짜.”
“…진짜 황당했겠다.”
“밥 먹을 때 스무 번씩 씹으라고 말한 사람도 생존 리벤저였던 가리스 로미오입니다. 그때 그 전화를 안 받았어야 했는데.”
“대체 형한테 왜들 그랬대.”
“내 말이요. 지들만 죽어서 편해지고. 다 끝나면 그 인간들한테 제일 먼저 달려가서 물어볼 겁니다. 나한테 대체 왜 그러냐고. 그딴 유언 남기고 죽어서 좀 편했냐고. 주먹질도 좀 하고 말이죠.”
그때를 떠올리자 또 성질이 뻗친 윤서는 속에 있던 말을 그대로 내뱉어 버렸다.
권지한은 순식간에 지나간 ‘지들만 죽어서 편해지고’, ‘다 끝나면’이라는 표현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떤 티도 내지 않았다.
“그래서 형이 정체를 숨기고 직장 생활을 한 거였구나. 식사 속도가 느린 것도 그 이유였고. 거의 그 사람들이 형 가지고 인형 놀이를 했네.”
“인형 놀이가 아주 정확한 표현이군요. 유언 중에는 무슨 찢어진 청바지에 청재킷을 걸치고 거리를 한 시간 걸어 다녀라, 검은색 맨투맨에 와이드 청바지를 입고 외출해라, 흰색 셔츠에 짙은 네이비 슬랙스를 입고 역 앞에 서 있어라 따위도 있었으니까.”
윤서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권지한은 이빨 상하겠다며 대신 딸기 건더기를 씹으라고 했다. 윤서는 착하게 스푼으로 딸기 조각을 입에 넣었다가 아차 싶은 표정을 했다. 그는 체념한 눈빛으로 우물우물 스무 번 씹었다.
“고생한다, 형.”
권지한이 측은하단 투로 말했다.
윤서는 제 고충을 털어놓는 날이 올 줄은, 심지어 그 상대가 권지한이 될 줄은 몰랐다. 권지한이 이렇게 공감해 주니 서럽고 억울한 마음이 조금 풀렸다.
“가장 힘들었던 건 뭐였어? 패시브 유언들 말고.”
“음….”
윤서는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러닝 5천 회. 아, 클래식 피아노 연주곡 다섯 곡 완벽하게 치기도 있군요. 어제 들어서 알겠지만 림스키 코르사코프 ‘왕벌의 비행’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세요? 지금은 악보도 안 보고 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정말 고난의 시간이었죠. 본래 저는 높은음자리표도 그릴 줄 몰랐으니까요. 도레미파솔이 어디 있는지만 간신히 아는 사람이 대뜸 이 다섯 곡을 연주해야 한다고 하니까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얼마나 당황해했는지 모릅니다.”
“형.”
주절주절 내뱉는 윤서를 권지한이 나직하게 불렀다.
“어렵고 귀찮은 거 말고, 힘들었던 거 말이야.”
“…….”
“가장 힘들었던 유언은 뭐였어?”
윤서가 입을 다물었다. ‘어렵다’와 ‘힘들다’는 다르다. 윤서도 알고 있었다. 이건 어렵고, 이건 힘들다고 구분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어떤 유언이 힘들었냐는 질문을 듣자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정말 괴롭고 힘들었다.
스쿼트 3백만 회나 쿠키 10만 개 굽기 같은 건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하면 욕을 쏟아부으면서도 어떻게 할 수는 있겠는데, 그 유언들은 다시 하라고 한다면 그냥 포기를 택할 것이다.
생각에 잠긴 윤서를 가만히 바라보던 권지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너무 힘들어서 아직 시도도 안 했어?”
“아뇨, 정말 힘들었던 것들은… 대던전을 나오자마자 해치웠습니다.”
“어려운 것부터 먼저 해 버리는 스타일이구나. 나도 그래.”
윤서는 고개를 자그맣게 끄덕였다. 권지한은 윤서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는 듯했으나 윤서는 쉬이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힘들어서 던전을 나오자마자 해치워 버렸던 그 유언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무겁게 했다.
“…….”
권지한이 따뜻한 카페모카가 담긴 머그잔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는 아까부터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얘기하기 싫으면 하지 마. 강요 안 할게. 지금 말해준 걸로도 충분해.”
“싫다기보다는 너무 내 얘기만 한 것 같아서요.”
“아, 그럼 내 얘기를 좀 해도 돼? 형 말 들으면서 생각났는데 사실 우리 엄마도 유언을 남겼어. 몇백 개도 아니고 딱 한 개지만 한번 들어 볼래?”
“…….”
갑자기 흘러나온 권지한의 어머니 얘기에 윤서가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권지한은 담담하게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