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03)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03)화(103/195)
#95
“나 대격변 즈음에 덩치 커지면서 동네 깡패들한테 엄청 맞고 다녔거든. 깡패들은 일찌감치 나를 지들 따까리로 만들려 했고 나는 싫어서 반항하고 있었어. 처음엔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때리더니 나중에는 준철이` 형이 없을 때마다 집까지 찾아와서 나랑 엄마를 괴롭히면서 못살게 굴더라고. 아, 준철이 형은 내 옆집 살았어. 아무튼 나야 맷집 좋으니 괜찮은데 그 새끼들이 엄마까지 괴롭히니까 그냥 숙이고 들어갈까 고민을 좀 했지.”
“단순한 동네 양아치는 아니었나 보군요.”
“조폭 패거리였어. 대부업도 하고 약 장사도 하고. 온몸에 문신을 떡칠한 놈들이 열 살짜리 어린애가 깡다구 좀 있다 싶으니 자기들 밑에 들어오게 하려고 밤낮 안 가리고 패는데, 진짜 안 되겠다 싶어서… 들어갈까 했지. 생각해 보니까 단점만 있지는 않더라고. 자존심 굽히고 깡패들 말 잘 들어주면 지금보단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테니까.”
“…….”
“출근 준비하는 엄마한테 그 얘기를 했어. 엄마, 나 그냥 깡패 될까. 깡패 돼서 돈 많아지면 월세도 낼 수 있잖아. 내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미래는 가망 없는데…. 거기까지 말했어. 그런데, 그때 딱 대격변이 터진 거야.”
“…….”
“건물이 무너지면서 엄마가 철근에 깔렸어. 엄마도 나도 엄마가 여기서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지. 우리 엄마 말수도 적고 감정 표현도 잘 안 하는 무뚝뚝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그렇게 침착할 줄은 몰랐어. 나는 놀라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는데 말이야. 그때 엄마가 날 붙잡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이거였어. ‘지한아, 나쁜 짓은 하지 말아라. 맞고 살지언정 남은 괴롭히지 말고 너보다 약한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보살펴라. 이게 올바른 삶의 방식이다.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양심을 버리고서 편하게 사는 이들을 보며 때로는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지겠지만, 최후에는 네가 옳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다는 걸 삶이 네게 알려 줄 거다….’”
윤서는 눈가가 뜨거워지는 느낌에 고개를 숙이고 얼른 딸기라떼를 생수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걸 속에 처넣었는데도 눈가가 뜨끈했다. 감정을 진정시키고 다시 권지한을 본 윤서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권지한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면서 가슴 아파 운다거나 괴로워서 눈살을 찌푸리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구원받은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듯이 그렇게 미소 지었다.
과거를 떠올리는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영원한 이별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웃을 수도 있는 거구나. 윤서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래서 난 그렇게 살아야 했어. 형보단 사정이 낫지? 내가 지켜야 하는 유언은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진짜 힘들었어. 아포칼립스 시기에 열 살 애가 혼자 남은 거잖아. 정상화되기 전까지는 몬스터뿐 아니라 인간도 적이었단 말이지.”
윤서는 대격변의 날에 각성했다. 정부와 협조하여 각성자로서 활동한 그는 몬스터와의 전투를 빼놓고 본다면 꽤 살 만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아무런 능력이 없는 비각성자들의 삶은 윤서와는 달랐다. 몬스터들에게도, 같은 인간들에게도 목숨을 위협받는 하루하루. TV와 라디오에서는 대피소로 피신하라는 정부 방송만 반복되었고 어떤 이들은 그 말을 따랐으나 어떤 이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안에 숨었다. 대피소에서나 집에서나 전기는 엄두도 못 내고 더러워진 녹물을 마시면서 배를 곯아야 했다.
군대와 경찰은 몬스터와 생사를 건 전투를 치르느라 ‘사소한’ 치안은 신경 쓰지 못했다. 거대한 무리를 이룬 범죄자들이 한 집, 한 집 털어 가면서 생존자들을 찾아 악랄하게 괴롭혔다.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범죄자 집단에 제 발로 들어간 사람들도 많았다. 동네마다 자경단이 생겼으나 화기까지 손에 넣은 범죄자 집단을 무찌르기엔 역부족이었다.
윤서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정부가 힘을 찾고 다시 질서를 세우기까지 수 년간 민간인들은 지옥을 살고 있었다.
“범죄가 너무 많이 일어나서 길거리에 시체가 쌓여 있어도 아무도 관심 주지 않았어. 몬스터의 소행이 아니라 사람이 저지른 게 분명했음에도 말이야. 우리 동네 깡패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계속 날 괴롭혔어. 십 대 초반 애한테서 뭘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깡패가 될 재능이 있다 하더라고. 대피소의 어른들은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았어. 나 진짜 홧병나는 줄 알았어. 나라면 깡패한테 괴롭힘 당하는 어린 애가 있다면 절대로 못 본 척 하지 않을 텐데, 나보다 힘 있는 사람들이 왜 다들 이렇게 비열할까. 이런 생각을 매일 했어. 지금은 이해해. 깡패들한테 맞서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
“깡패들은 아무리 협박해도 통하질 않으니까 나중엔 회유하기 시작했어. 처음엔 옷을 주겠다 했고 내가 거절하자 밥을 주겠다 했고, 그래도 거절하자 물도 주겠다 했지. 당시 나는 대피소에 있었는데 물을 마시려면 비가 오기만을 기다려야만 했어. 갈증 때문에 온몸이 말라 버린 상황에서 그건 정말 굉장한 유혹이었어.”
“…….”
“눈 딱 감고 그들이 하란 대로, 사람을 죽일 때 망을 본다든가 숨어 있는 민간인을 찾아내 개조한 톱으로 위협한다든가 하면 실컷 물을 마실 수 있어. 다들 그렇게 살아. 많은 이가 그렇게 강도질하면서 살고 있고, 잡혀가지도 않아. 잡아갈 사람도 없어. 그러면 그 짓을 안 하는 게 병신 아냐?”
“…….”
“하지만 난 거절했어, 형. 정말 힘들었는데 결국 거절했어.”
윤서는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무서운 범죄자들 앞에서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는 맹랑한 꼬마 아이가 눈앞에 떠올랐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비각성자였다면, 아포칼립스 세계의 비각성자라면. 권지한처럼 얻어터지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을 수 있었을까?
윤서는 도저히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 거부하니까 열받았는지 날 죽어라 패더라고. 지금 생각하면 깡패들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서 힘이 없었을 텐데 그땐 난 어렸으니까… 진짜 이러다 죽겠다 싶었지. 나보다 일찍 각성한 준철이 형이 도와준 덕분에 결국 안 죽고 살았지만.”
윤서는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그냥 한 번만 타협하지 그랬어요.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럴 수 없었어. 유언이었으니까.”
“…….”
“형이라면 타협했겠어?”
윤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권지한이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권지한의 어머니는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나뿐인 자식을 너무나 잘 키웠다.
윤서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권지한의 회색 눈을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권지한 헌터, 정말 기특하게 잘 살았네요.”
권지한이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었다.
“응, 그렇지? 난 진짜 기특해.”
“어머니도 분명 자랑스럽게 여기실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주변에 자랑하고 다니지 않을까? 저거 우리 아들이라고, 우리 아들 좀 보라고.”
권지한이 칭찬하면 하는 대로 족족 주워 먹었다. 윤서는 웃음이 나왔다.
“결국 어머니의 말씀이 맞았군요. 기존 범죄자들은 모두 끝까지 각성하지 못했잖아요. 한 번이라도 범죄에 가담했다면 당신도 지금쯤 각성하지 못하고 감옥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맞아. 우리 엄마 유언이 아니었다면 난 지금 형이랑 이런 대화도 못 하고 있었겠지. 나는 사실 정의로운 게 아니라 엄마 유언 때문에 정의로운 흉내를 내고 있었던 거니까.”
윤서는 코웃음 쳤다.
“세상 어떤 정의로운 척하는 사람이 폭탄을 몸으로 덮습니까?”
“…와, 만약 그때 안 덮고 도망갔으면 큰일 날 뻔했다. 무섭다, 무서워.”
권지한이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부르르 털었다.
“아무튼… 다 지나고 나니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리는데, 그땐 정말 정말 유언을 지키기 힘들었어. 하지만 난 끝까지 지켜 냈고. 이렇게 근사한 스물두 살 청년이 되었지. 이걸로 내 얘기 끝.”
권지한이 상체를 조금 숙였다.
“들어줘서 고마워. 참고로 엄마한테서 그런 유언을 들었다는 건 준철이 형도 몰라. 형이 나한테 이렇게 특별해요. 알겠어?”
권지한은 분위기를 가볍게 할 생각인지 장난스러운 말을 덧붙였다.
그에 윤서도 덩달아 웃고 말았다. 깡패에게 맞던 어린애가 S급 헌터가 되어 이렇게 웃으며 과거 얘기를 하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왜 권지한과 여기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의아하지도 않았고…. 속 안에만 간직하던 이야기를 털어놓기에 이 어린놈은 나쁜 상대도 아니었으며…. 여기서 권지한에게 이야기를 하는 상황이 어떤 운명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장 지키기 힘들었던 유언들은….”
윤서는 마침내 입술을 뗐다.
“가족한테 말을 전해 달라고 하는 경우였습니다.”
권지한이 윤서를 지그시 응시했다. 뒤에 이어질 이야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다. 윤서의 시선이 권지한을 향했다가 그 뒤쪽으로 건너갔다. 카페의 전면 창 밖으로 흩날리는 나뭇잎들이 보였다. 이르게 떨어진 초록 잎사귀들은 허공에서 춤을 추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무사히 던전을 나가면 날 기다리고 있을 남편한테 내가 너무 많이 사랑했다고 전해 줘.’”
10년 전에 이미 끝냈지만 지금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부 기억했다.
죽어 가면서 온 힘을 쥐어짜 간신히 내뱉은 유언들.
우리 공주님한테 아빠가 너무 많이 사랑한다고, 하늘에서 지켜보겠다고 전해 줘.
사랑하는 그에게 당신 아내는 대던전에서 다른 남자와 바람피웠다고 말해 줄래.
혼자 계신 어머니께 감사했다고 그리고 죄송하다고 전해 주겠니.
내 동생에게 밥 잘 먹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라고 말해 줘.
엄마랑 아빠한테 고생만 시켜서 미안했다고 전해 줘….
우리 애들한테 노트북 못 사 줘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밥 잘 챙겨 먹으라고 말해 줘.
윤서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가족에게 전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은 리벤저는 33명이었다. 대던전에 살아남을 가능성이 가장 큰 서채윤의 손을 꼭 붙잡고 힘겹게 마지막 말을 내뱉은 이들이 33명.
듣는 순간 이건 스쿼트 3백만 회 같은 유언보다 훨씬 더 힘들 것이라 예감한 윤서는 대던전을 나오자마자 우선 국밥 한 그릇 말아 먹은 뒤 이것들부터 본격적으로 해치웠다.
대부분 오열했다.
제정신 아닌 사람처럼 가슴을 퍽퍽 때려 가며 울던 어머니.
끝까지 눈물을 참다가 윤서가 돌아서자마자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울부짖던 남편.
왜 지키지 못했냐고 화를 내던 이도 있었고, 유언을 전해 줘서 고맙다던 이도 있었다.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어린아이는 제 어머니의 유언을 전하는 윤서에게 딸기 맛 사탕을 내밀었다.
늙어 주름살 가득한 노인은 제 아들의 유언을 전하는 윤서의 손을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고생 많았소. 고맙소.
이미 말을 전할 대상이 죽어 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는 윤서도 별수가 없어서 잘 꾸며진 추모 공원에 안치해 줬다.
리벤저는 전원이 국가 유공자가 되었는데도 그럼에도 가난하게 사는 가족들도 있어서 윤서가 몰래 거금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렇게 모두에게 죽은 이들의 마지막 말을 전달하고 윤서는 한동안 허무에 젖었다.
살아 있는 이들에게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을 전달하는 자신이 사신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주변에 늘 존재하며 소리 없이 평화를 앗아 가는 죽음. 그 자체가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