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04)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04)화(104/195)
#96
윤서는 목소리의 고저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했고, 권지한은 윤서를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모든 얘기가 끝났을 때 권지한이 나직이 말했다.
“말해 줘서 고마워. 정말 힘들었겠다.”
“네, 뭐…. 그때는요.”
“…….”
“지금은 스무 번 이상 씹어 먹어야 하는 게 더 힘듭니다.”
윤서는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 농담을 던졌다. 권지한이 너무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였다. 그런 윤서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권지한은 짧게 한숨을 쉬고서는 잔뜩 구겼던 미간을 폈다.
“서채윤이 그렇게 요정처럼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말을 전하고 다녔으면 소문이 퍼졌을 법한데.”
“<거짓 기억>을 사용했습니다.”
“…유언을 전달하고 기억을 지운 거야?”
“지운 게 아니라 수정했습니다. 그들은 꿈에 죽은 사람이 나왔고, 그 죽은 사람이 그 말을 남긴 걸로 기억할 거예요.”
“그렇구나.”
권지한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윤서는 딸기를 마저 건져 먹었다. 새콤달콤한 딸기의 맛을 음미하며 그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괜히 고해 성사를 하는 게 아니네. 마음이 가벼워졌어.’
그리고 또 생각했다.
‘나는 가벼워졌는데 권지한은 무거워졌어….’
고민은 털어놓으면 반으로 된다고 했던가? 그 말은 절반의 고민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었다. 남에게 넘어가서 절반이 됐다는 뜻이었다.
권지한의 표정이 그것을 말해 줬다. 아프고 괴로운 사실을 들은 듯 찌푸려진 미간과 꾹 다문 입매. 표정 관리도 잘만 하던 능글맞은 녀석의 턱이 점점 단단하게 굳어 가고 눈빛은 깊게 가라앉았다.
앞에 놓인 음료가 식어 가는데 그는 음료의 존재도 잊고 있는 듯했다.
밖은 화창한 여름이고 널찍한 카페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며 다른 테이블 손님들은 화기애애 웃고 떠드는데 권지한만 무덤을 지키는 이처럼 괴로운 표정이었다. 윤서의 이야기로부터 기인한 괴로움이었다.
아마 권지한의 과거 얘기를 듣던 자신의 표정도 비슷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비밀을 나눈다는 건 이렇듯 장점만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나눠 버렸는데.
윤서는 누군가 제 괴로움에 공감하여 이런 표정을 짓는 게 꽤 새로웠다. 그리고 누군가의 괴로움에 공감하며 그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도 낯설었다. 익숙하지 않았지만,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
그렇게 비밀을 나누고 이제 카페를 나갈까 하던 중 권지한이 물었다.
“형, 궁금한 거 생겼는데 물어봐도 돼?”
“들어 보고요.”
“아직 다 마치지 못한 유언들 열일곱 개는 어떤 것들이야? 스쿼트, 낚시, 등산, 초코크랙쿠키. 그리고 또 어떤 거?”
“알아서 뭐 하게요.”
“같이하자고. 혼자 하면 심심하잖아.”
윤서는 이미 다 마신 딸기라떼 컵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대던전까지 한 달입니다. 열심히 훈련할 생각을 해야죠.”
“훈련은 훈련대로, 여가는 여가대로. 나는 일에도 취미에도 진심이야.”
“저는 아닙니다. 그동안 현장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서 한 달간은 전투를 하면서 감을 찾아야겠어요.”
“6시엔 칼퇴할 거 아니야?”
“앞으로는 저녁 시간에도 자잘한 던전에 자주 들어갈 생각입니다. 던전 탭도 익혀야 하고 경험치도 벌어 놔야죠.”
“아아, 맞네. 형은 가이아 시스템을 좀 더 익힐 필요가 있긴 해.”
권지한이 U패드를 꺼내 마디가 굵은 긴 손가락으로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U패드라는 건 각성자만 가지고 있는 것이라 몇몇 손님들이 이쪽을 주목했다. 권지한은 그런 건 상관하지 않고 윤서에게 말했다.
“이번 주말에 S급 옐로우 던전 공략 하나 있네. 석영 10명, 레인보우 50명, 그 외 길드 소속 34명. 여기 갈래?”
“노랭이 정도면 괜찮죠. 그런데 멤버가 이미 정해졌는데 갈 수 있는 겁니까?”
“노랭….”
권지한이 잠깐 뺨을 씰룩이더니 말했다.
“내가 헌터 두 명 레이드 팀에 집어넣을 만한 권력도 없어 보여?”
“왜 두 명이에요. 그쪽도 가려고요?”
“형 가는데 내가 안 갈 수 있나.”
권지한은 뭐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씩 웃었다. 윤서가 기가 막혀서 아무 말 못 하는 사이 그는 바로 유준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주말 열리는 S급 던전 나랑 윤서 형도 들어갈 테니까 수속 밟아 놔.
권지한이 그 화면을 윤서에게도 보여 줬다. 가공할 만한 실천력이었다. 유준철에게서 바로 전화가 왔다. 권지한은 쿡쿡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윤서는 사람이 제대로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혼자 그렇게 실행해 버리냐고 하고 싶었지만, 권지한의 웃는 얼굴을 보자 말이 목구멍을 삐져나오지 않았다.
그냥 뭐 어떤가 싶었다.
애가 좋다 하고, 나도 싫지는 않으니까….
***
권지한과 새벽부터 만나 등산하고, 밥 먹고, 카페에 가서 유언 이야기와 과거 이야기를 좀 하다가, 또 다른 카페로 장소를 옮겨서 유언 하나를 해결했다.
그 유언은 ‘강아지, 병아리, 상어, 축구 하는 어린애, 해바라기 모양 구름 찾기’였다.
“아, 병원에서 구름만 멍하니 보던 것도 유언 집행자로서 일하고 있던 거였구나.”
권지한은 깨달았다는 듯이 짝,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을 맞대고서는 적극적으로 윤서를 도왔다.
둘은 카페 야외 테라스의 안락한 흔들의자에 나란히 앉아 파란 하늘을 느긋하게 올려다보면서 여러 구름을 찾았다. 의외로 축구하는 어린애 구름은 금방 찾았는데 해바라기 구름 찾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윤서가 해바라기 모양을 찾아내면 권지한이 저건 해바라기보다는 호박꽃이다 했고, 권지한이 해바라기를 찾아내면 윤서가 저건 접시꽃이다 했다. 그렇게 몇 번 서로 견제와 견제를 거듭하다가 결국 둘 다 동의할 만한 해바라기 구름을 찾아냈다.
유언이 16개로 줄어들었다.
“이것 봐. 나 덕분에 유언 하나를 해결했잖아. 같이하면 유언들을 더 빨리 처리할 수 있을 거라니까.”
“글쎄요.”
유언을 빨리 해결하면 죽음만 가까워질 뿐이라는 걸 모르는 권지한이 희희낙락 수작질했지만 윤서는 덤덤하게 거부했다.
“아, 형. 나 차 안 가지고 왔어. 데려다줘.”
가리왕산 입구를 지나 주차장으로 향할 때였다. 뻔뻔하게 내뱉는 말에 윤서가 놀라서 입을 벌렸다가 곧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럼 여기까지 뛰어 왔습니까?”
“기차랑 버스 타고 왔지.”
“거짓말.”
“진짜로.”
권지한이 핸드폰 화면을 켜서 모바일 티켓을 보여 줬다. 정말 오늘 날짜의 기차 티켓이었다. 윤서는 어이가 없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서울로 돌아가려 한 거지?
“데려다줘, 형아.”
권지한이 애교를 부렸다. 윤서는 어이도 없었고… 귀엽기도 해서 어쩔 도리 없이 권지한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찹쌀이를 들인지 8년째, 그 누구도 태운 적 없었던 윤서가 다른 사람과 함께 타자 AI가 굉장히 놀랐다.
“주인님, 도둑이 함께 탔어요.”
“도둑이라니…. 보통은 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주인님은 차에 함께 탈 지인이 전혀, 완전, 단 1명도 없으시잖아요.”
“…직장 동료야. 인사해.”
“직장 동료를 차에 태우다니 믿을 수 없네요. 주인님, 협박당하고 계신 거면 발라드 한 소절 불러 주세요.”
권지한이 옆에서 “형, 차에서 혼자 노래 부르나 봐?” 하며 웃었다. 윤서는 단연코, 단 한 번도 노래를 부른 적 없었다. 그냥 이 AI의 취향이었다.
“발라드 한 소절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인사나 해. 진짜 직장 동료 맞아.”
“으음, 안녕하세요, 직장 동료님. 저는 찹쌀이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지한이라고 불러 줘. 나도 잘 부탁해, 찹쌀아.”
권지한이 반갑다는 듯 화답했다.
차는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권지한은 깔끔한 차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되게 깨끗하게 쓰네. 이름은 찹쌀이면서….”
“찹쌀이가 왜요.”
“찹쌀, 햅쌀…. 혹시 현미랑 흑미도 있어?”
“없습니다.”
윤서는 저를 놀리는 게 분명한 권지한에 뾰족하게 대답했다가 문득 눈을 반짝 빛냈다.
“그쪽은 AI 차 이름 뭡니까.”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지?”
“네.”
“딱히 부르는 이름은 없었는데 형네 찹쌀이 보니까 너무 정 없게 느껴져서 오늘 이름 지어 줘야겠어.”
“뭐로요?”
“현미나 흑미로. 뭐가 더 좋을까?”
윤서는 권지한이 여전히 놀리는 건가 싶어서 눈을 흘겼다.
“찰보리 추천합니다.”
“좋네, 찰보리.”
권지한이 흔쾌히 받아들여서 역시 농담이구나 했다.
차는 부드럽게 도로를 미끄러져 산을 빠져나왔다. 윤서는 품에는 햅쌀이를 안고, 눈으로는 창밖의 푸른 나무들을 보면서 권지한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꼬질꼬질한 꼬마. 어려서 하나뿐인 가족을 잃고, 온 세상은 괴물 천지로 변하고, 나쁜 깡패들한테는 허구한 날 괴롭힘당하면서 어떻게 정의를 수호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던 걸까. 상식적으로 세상을 증오하는 악의에 찬 악당이 되어야 맞지 않는가.
나를 외면하는 어른들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똑같이 세상을 외면하게 되는 게 아니라, 나는 나와 같은 어린애를 도와야지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자랐다. 무신경하고 오만하다는 결점이 있다고 한들 윤서는 절대로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었다.
권지한은 이렇게 자란 건 유언 덕분이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유언 때문에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윤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권지한은 그냥 그런 사람이다. 세상에 보기 드문 선인. 어떤 환경에 있었어도 이런 사람으로 자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이아는 정확히 알고 있다. 60억 인류 중 아주 드물게도 이 권지한이란 사람이 그런 심성을 지녔다는 걸 알아 버렸고, ‘선택된 자’로 선택한 것이다.
윤서는 가이아가 제게서 선택된 자 특성을 거두어 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권지한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더욱 확고하게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대던전에 검은 포탈이 있다면 그곳에 들어가는 한 명은 내가 될 거야.’
그레이스가 봤다는 누군가가 권지한이 되도록 두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나는 죽을 생각이지 않은가. 반면 권지한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념과 삶에 대한 의지로 반짝반짝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어떻게 이따위 세상에서 아직도 이렇게 빛이 날까 싶을 정도로….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면 그건 나여야만 한다.
“형.”
그렇게 진지하고도 심오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권지한이 팔을 툭 쳤다. 윤서가 고개를 돌리자 어린애처럼 뭔가 신이 난 권지한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 피시방 가자. ‘헌터 앤 스킬’ PVP 한 판 해.”
“갑자기요?”
“아까 형이 이 게임 골드 메달이라고 말했을 때부터 너무 하고 싶더라고. 나도 한 지 좀 오래돼서.”
“저 게임 접었습니다.”
권지한은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질까 봐 무서운 거지. 내가 왼손으로 플레이할까?”
권지한이 형이 원하는 핸디캡을 받겠다며 아량을 베풀었다. 윤서는 가소롭다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찹쌀아, 근처 PC방 앞에 세워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