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05)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05)화(105/195)
#97
윤서가 피시방에 온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얼마나 오랜만이냐면… 12년 만이었다. 윤서와 이도민은 대격변 전부터 온라인 게임은 잘 즐기지 않아서 친구들이 조르고 졸라야 피시방에 강림해 줬다. 둘은 친구들이 ‘헌터 앤 스킬’을 할 때 옆에서 지뢰 찾기를 하거나 드라마를 보고는 했다.
‘같이 드라마 보자니까. 이거 진짜 재미있어. 우주대서사시야.’
‘그딴 김치찌개 드라마 안 본다고. 난 틀린 그림 찾기가 더 재미있어.’
‘드라마 안 볼 거면 피시방은 왜 온 거야?’
‘뭔 헛소리야. 누가 피시방까지 와서 드라마를 처보고 앉았냐. 세상에서 너만 그러고 있을 걸.’
‘지뢰 찾기나 하는 사람도 너밖에 없을 걸.’
‘집에 가버리기 전에 닥쳐. 아, 내 거 짜장라면 나왔다.’
‘나 한 입만.’
‘나도 이따 김치볶음밥 나오면 나눠 줘.’
‘응.’
피시방에서 했던 일이라고는 이도민과 티격태격하다가 라면과 밥을 나눠먹은 것밖에는 없었다.
유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게임을 할 때도 컴퓨터를 사서 집에서 했지 피시방에 오지는 않았다. 그랬던 곳에 스물아홉 살이 되어서야 오게 될 줄이야. 그것도 리벤저의 유언을 고백한 당일 말이다. 역시 살다 보면 전혀 생각도 못 한 일들이 일어나고는 한다.
피시방에는 빈자리가 드문드문 있었다. 윤서와 권지한은 구석에 자리 잡았다.
온갖 군데서 ‘헌터 앤 스킬’ 플레이 소리가 들렸다. 12년 전에 출시된 게임이었는데 여전히 인기가 많았다.
“아이디랑 비번 기억은 해?”
“당연하죠.”
윤서는 게임이든 뭐든 모든 아이디와 비번을 동일하게 만들기 때문에 익숙하게 타자를 쳐서 로그인했다. 권지한과 윤서 둘 다 휴면 계정이라 똑같이 인증 절차를 거쳤다.
윤서는 마법사, 권지한은 검사 캐릭터였다.
PVP 전 감각을 익히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파티를 짜서 던전 몇 군데를 돌았다. 처음엔 헤맸지만 골드 메달씩이나 땄던 만큼 금방 능숙해졌다.
“준비됐어?”
“그쪽이야말로.”
“자신만만하네. 내기할까?”
“밥 내기 어떻습니까.”
“에이, 둘이 먹으면 얼마나 나온다고. 좀 통 크게 해야지.”
둘이 작정하고 먹으면 20인분은 나올 터였다.
“통 크게….”
윤서는 퍼펙트 전원에 식사 쏘기 같은 걸 생각하고 말하려는데 권지한이 제안했다.
“내가 이기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 어때?”
“네?”
“형 어차피 나 데려다주러 집 앞까지 와야 되잖아. 형이 지면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 형이 이기면 안 자고 가도 돼.”
어이없어진 윤서가 말이 되냐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권지한은 진지하기만 했다.
“다섯 판, 3선승제. 괜찮지?”
“괜찮기는 무슨, 이딴 내기 절대 안 합니다. 이기든 지든 나한테 메리트가 없잖아요.”
“메리트가 왜 없어. 한식 조리사 자격증 보유자가 만든 야식과 조식을 먹을 수 있는데?”
“…….”
윤서가 멈칫했다.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권지한이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 집 냉장고에 1등급 한우 채끝살이랑 묵은지 담가 놓은 거 있어. 고기가 안 끌리면 매운홍합찜은 어때? 아니면 면 요리도 좋고. 형 아직 내 면 요리는 파스타밖에 안 먹어 봤잖아. 나 얼큰칼국수도 장난 아니야. 매운 닭발, 오돌뼈, 순대곱창. 다 재료 있고. 후…. 이건 사실 우승 상품이나 마찬가지지. 게임에서 진 패자한테 이런 거한 음식을 해 주는 아량 깊은 승자는 나밖에 없을 거야.”
윤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지금은 점심 식사 후 네 시간가량 지나 배가 출출한 상태였다.
“그럼 제가 이기면요?”
“내 집에서도 못 자고, 이 음식들도 못 먹는 거지.”
윤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 승리랑 패배가 바뀐 거 아닌가? 아니, 나는 애초에 권지한 집에서 자고 싶은 맘은 전혀, 완전, 절대 없는데 왜 이긴 경우가 더 진 것 같지? 이건 져야 하는 거야 이겨야 하는 거야?
두뇌 과부하가 오는 와중에 권지한이 냉큼 캐릭터를 대전장으로 이동시켰다.
“얼른 들어와. 시작한다.”
권지한이 재촉해서 얼결에 윤서도 대전장에 입장했다.
막상 PVP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내기 상품 같은 것도 잊어버리고 몰두했다.
둘 다 승부욕 강한 데다가 컨트롤 실력도 막상막하여서 쫄깃쫄깃한 전투가 벌어졌다.
첫판은 권지한이, 두 번째 판은 윤서가, 세 번째 판은 다시 권지한이. 그렇게 이기고 지고 하다가 마지막 판을 권지한이 가져가면서 결국 윤서는 패배했다.
권지한은 의기양양하게 미소지었고 윤서는 졌지만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얼큰 칼국수를 생각하면 오히려 입맛이 돌았다.
“한 판 더 하죠.”
“내기랑 상관없이?”
“네, 재미로.”
“좋아.”
그렇게 한 판 더, 한 판 더 하다 보니 열네 판이나 대결을 펼쳤다. 결국에는 무승부로 끝이 났다.
둘은 게임의 목적인 PVP를 마치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권지한이 게임을 접은 후 업데이트된 시나리오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새로운 시나리오를 플레이하고, 새로운 던전에도 들어갔다. 그렇게 컨텐츠를 즐기다 보니 바로 사흘 전 업데이트 된 보스 레이드가 둘의 흥미를 끌었다. 컨트롤에 자신감이 생긴 둘은 레이드도 해 보기로 했다.
“공략 보는 동안 뭐 좀 시킬까. 밥 먹을 때 됐어.”
“피시방에서는 라면이죠.”
“틈새라면 3개에 소떡 5개, 김치만두 5인분?”
“그냥 한 사람당 하나씩만 시켜요. 놓을 자리도 없습니다.”
“라면 하나만 먹겠다고? 왜 그래…. 그럴 거면 생수나 마시지 왜.”
“하나씩이요. 라면 하나, 소떡 하나, 김치만두 1인분. 공깃밥 추가.”
“오케이. 집에 가면 내가 야식 거하게 해 줄게.”
주문한 메뉴는 금방 도착했다. 윤서는 꼬불꼬불한 라면을 젓가락으로 풀었다. 그러면서 시선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죽음의 평야-욕망의 화염룡’이라는 이름의 보스 몬스터 레이드 공략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옆에서 권지한도 만두를 한입에 삼키면서 대던전 공략을 들을 때보다 더 진지한 자세로 시청 중이었다.
“세 번 발 구르기 모션이랑 두 번 발 구르기 모션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구분하지?”
“잘 보시면 목뒤 깃 움직이는 각도가 다릅니다.”
“그래? …아, 맞네. 두 번 발 구를 때 각도가 더 낮구나.”
“보스 몹의 그림자 스킬을 조심하라는데 어떤 스킬일까요?”
“그림자 스킬이라고 하면 보통 빼앗는 거지. 몸을 빼앗거나 스킬을 빼앗는 건가 봐. 존나 쫄리네.”
공략을 여러 번 돌려본 그들은 충분히 클리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파티에 가입했다.
우리 복귀유저
[히잔]윤윤님이랑 저 복귀유저임 감안하셈
[베이글인가]당당한것보소
[럭셔리11]ㅋㅋㅋㅋ ㅇㅋ
[극한게이머]ㄱㄱ
레이드는 성공적이었다. 윤서가 베스트를 차지했다. 왕관을 쓰고서 자신만만하게 웃는 캐릭터의 모습에 윤서도 덩달아 함박웃음을 지었다가 헛기침하며 표정을 수습했다.
“형, 장판 어떻게 피했어? 움직임이 말도 안 되던데 왜 형은 게임까지 잘해?”
“권지한 헌터도 꽤 하더군요. 그림자 빼앗기에 당하지 않았다면 이번 판 베스트는… 물론 저였을 겁니다.”
“어우, 성질나네. 다들 한 판 더 하자는데 고?”
“좋습니다.”
윤서는 얼른 마우스를 움직여 무기를 수리하고 포션을 구매했다. 캐릭터가 부랴부랴 바쁘게 뛰어다녔다.
윤서의 입가에는 어쩔 수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권지한의 집은 한강 전망 고급 아파트의 펜트하우스였다. S급 실드 트랩으로 둘러싸인 안전하고 비싼 곳. 전에 살던 곳이 던전 폭발에 휘말린 후 S급 실드 트랩이 있는 아파트를 골랐다고 했다. 두 마리 강아지를 잃은 뒤로 다른 반려동물은 들이지 않아 혼자 살고 있었다.
넓은 집은 여기저기 생활 흔적들이 많았다.
생활감 있는 무선 청소기라든가 TV 옆에 놓인 알람시계(혹시 못 일어날까 봐 침실과 거실, 두 곳에 뒀다고 한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보다만 책이 엎어져 있었고(놀랍게도 제목은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101가지 비법’이었다), 소파에는 리모컨이 세 개나 있었다.
권지한은 에어컨부터 켠 후 편히 쉬고 있으라고 말하고는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
윤서는 출출한 배를 쓰다듬으며 소파에 널브러졌다. 인벤토리에서 햅쌀이도 꺼내 옆에 놓았다. 인벤 안의 공간이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겠으나 안에서 고생 많았다고 톡톡 두드려 줬다. 햅쌀이가 화답하듯이 표면을 떨었다.
TV를 켜자 예능 프로그램이 나왔다. 윤서는 얼마간 보다가 집중도 안 되고 재미가 없어서 핸드폰을 들었다. 자꾸 ‘헌터 앤 스킬’ 화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새로 나온 높은 방어력의 로브와 화려한 이펙트의 스킬이.
‘이러면 안 돼.’
윤서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핸드폰을 들었다. 본래 낙엽 단톡방이 가장 활발했으나 이제는 홍의윤까지 합류한 수재희, 박수빈, 윤서, 권지한 5인방이 제일 말이 많았다. 지금도 수재희와 홍의윤이 온갖 자음을 써 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윤서가 들어가 읽어 보니 시답잖은 이야기들이었다.
그렇게 시큰둥하게 대화를 읽다가 윤서는 인터넷을 켰다.
‘헌터 앤 스킬 사양’
‘조립 컴퓨터 가격’
‘그래픽카드’
아직도 실시간 검색어에 떠 있는 ‘서채윤’을 무시하고 그런 걸 검색하다가 윤서는 내가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핸드폰을 소파에 내던졌다.
‘이 빌어먹을 게임 중독자.’
한창 이 게임을 할 때 달고 살았던 욕이었다.
그때는 아직 유언이 백 개 이상 남았을 때라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데 하루 세 끼 꾸역꾸역 챙겨 먹어야 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직장에는 꾸역꾸역 다녀야 했고, 그렇게 출근해서 순박한 낙엽 길드원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웃음이 나올 때가 있었다. 윤서는 웃게 되는 게 너무 싫었다.
게임도 마찬가지였다. 화면 속의 작은 캐릭터가 화려한 마법을 사용하고 몬스터를 때려죽이며 판타지 세계의 퀘스트들을 수행해 나갈 때 어느새 몰입하곤 했는데, 윤서는 그게 싫었다.
왜 이렇게 재밌는 거야?
나는 재밌어해서는 안 되는데.
나는 건강해도 안 되고, 웃어도 안 되는데.
왜 그런 유언을 남겨서 자꾸 내가 삶을 즐기게 만들어 버리냐고.
마침내 골드 메달을 딴 후 바로 컴퓨터를 버렸다. 놔두면 분명 게임을 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리고 유언을 남긴 리벤저의 욕을 엄청나게 했다.
‘진정하자. 게임을 다시 시작하면 안 돼. 이제 유언도 아닌데 할 필요 없잖아. 정신 차려….’
윤서는 들떠 있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때는 운동이 최고다.
윤서는 심호흡하며 스쿼트 자세를 취했다.
한 번, 두 번… 열 번, 서른 번….
전문 트레이너도 가르쳐 달라 할 정도의 올바른 자세로 50개까지 했을 때 권지한이 주방에서 나왔다.
“…….”
“…….”
권지한이 윤서를 보고서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뭐 해?”
“보면 몰라요? 운동합니다.”
“아, 운동. 그래. 그것도 유언이었지.”
권지한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얼른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와서 식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