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06)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06)화(106/195)
#98
빈 그릇만 가득한 식탁 앞에서 윤서가 만족한 얼굴로 배를 쓰다듬었다. 그런 저를 권지한이 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어때, 맛있게 잘 먹었어?”
존나 잘 먹었다.
“뭐, 먹을 만했어요.”
“내일 몇 시쯤 일어날 거야? 아침으로 먹고 싶은 거 있어?”
“여섯 시쯤 일어나서 러닝하고 오겠습니다. 아침 식사는 간단히 양념갈비가 좋겠군요.”
“양념갈비?”
“네.”
윤서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고 권지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미리 재워 놔야겠네.”
“도와줄까요?”
“아니야. 그보다 내일 아침에 러닝 같이하자.”
“그쪽이랑 하면 또 달리기 경주 됩니다만.”
“나도 아침마다 나간단 말이야. 같이 해. 여기 한강 변 조깅 코스 되게 좋아.”
윤서가 전면 창밖을 바라봤다. 한강의 야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아 어스름과 여명이 공존하는 시간, 조용한 한강 변을 권지한과 둘이서 달린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들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원하면 같이 뛰죠.”
윤서의 새침한 대답에 권지한이 피식 웃었다.
권지한의 웃는 얼굴은 이 얼굴로 어떻게 싸가지 없어 보이는 표정을 지을까 싶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소년 같았다. 윤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얻어먹었으니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설거지는 식기 세척기가 해 줄 거야.”
“그거 편합니까?”
“형, 식기 세척기 없어? 그렇게 많이 먹는 사람이 식세기 없이 여태 어떻게 살았대.”
윤서는 조금 울컥했다. 그의 집에는 가전이 별로 없었다. 보통 다른 집에는 없을 피아노는 있지만, 식기 세척기나 건조기 따위는 없다. 어차피 죽을 거란 생각에 사지 않았다.
“아예 사람 손을 안 타는 건 아니라던데요. 물에 불려서 넣어야 하고, 이물질이 깨끗이 지워지지도 않고. 식세기 관리도 어렵다면서요.”
“요즘 건 달라요, 채윤이 형. 10년 전 얘기 하면 곤란하죠. 던전 부산물과 아이템을 활용해 가전 쪽도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다고요.”
권지한이 놀리듯 말했다.
“내가 하나 사 줄까? 똑같은 걸로.”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 씻고 싶네요.”
“게스트 욕실 쓰면 돼. 칫솔, 치약, 수건, 잠옷까지 다 준비해 놨어. 입은 옷은 바구니에 넣고. 내일 아침까지 세탁, 탈수, 건조 전부 끝내 놓을게.”
집이 넓은지라 권지한이 욕실까지 안내했다. 윤서가 총총 욕실로 들어갔다.
달칵, 안쪽에서 문 잠그는 소리가 들리자 권지한은 일부러 큰 소리로 “걱정 마. 저번처럼 안 쳐들어갈게.” 하고서 외쳤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대신에 쏴아아 물소리가 났다.
권지한은 가만히 문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윤서가 제 기척을 느낄 거란 생각에 그만뒀다.
돌아 나오는 그의 얼굴은 언제 웃었냐는 듯 복잡한 상념에 젖어 있었다.
***
먼저 씻고 나온 이는 권지한이었다. 편한 남색 잠옷 차림으로 갈아입은 권지한은 윤서가 아직 씻고 있다는 걸 알고 어째서인지 조금 당황했다. 저번에 목격한 흉터투성이의 몸이 떠올라 머리를 세차게 흔들려는 찰나 소파의 커다란 알을 발견했다.
권지한은 그 옆에 앉았다.
“안녕.”
‘왕 큰 새 알’이 부르르 떨었다.
특이하고 특별한 아이템이 시장에 나왔다 하면 대부분 가장 먼저 권지한의 손을 거치기에 권지한도 특별한 아이템을 많이 접했다. 던전에서 보물 상자도 몇 번 발견한 적 있었고, 최대 공로자 보상으로 특별한 아이템도 여러 번 선물 받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알에서 태어나는 무기 아이템은 처음 본다.
석영 길드 간부들은 푸른 보석이 박힌 단검으로 몬스터를 학살하는 서채윤에 대해 말하고는 했다.
감탄과 선망, 경외가 어린 눈빛과 말투로 그의 절대적인 강함을 칭송했다.
이제 곧 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기대가 되어야 마땅한데 권지한은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았다. 강자의 등장은 언제나 반기던 자신이 왜 이러는지… 어렴풋하게 짐작이 갔다.
잠시 후 윤서가 잠옷을 입고 나왔다. 권지한은 사실 어젯밤, 등산 약속을 잡았을 때부터 윤서를 제집에 재울 작정으로 식재료도 미리 준비하고 잠옷도 준비했다. 그가 택한 잠옷은 가슴 부분에 고래 자수가 작게 새겨진 아이보리색 잠옷이었는데 그것을 입고 나온 윤서의 모습을 보고 제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윤서는 어째서인지 뚱한 얼굴이었다.
“이거 그쪽한테 작은 사이즈 아닌가요? 이 사이즈 잠옷이 왜 있어요?”
“아아, 프리 사이즈라고 해서 샀는데 작아서 못 입고 있었지. 잘 어울리네, 형. 여기 올 때 그거 형 전용 잠옷으로 입으면 되겠다.”
윤서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지만 흘러나오는 대답은 여전히 새침했다.
“여기 또 올 일 없는데요.”
“오게 될걸? 내일 아침 식사도 존나 맛있을 테니까.”
“…….”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윤서는 반론을 펼치지 못했다.
“그런데 형, 이 알 오늘내일하는 것 같은데 침대에서 같이 잘 거야?”
“…오늘내일 깨어날 것 같다고 정확하게 서술해 주세요. 기분 이상하니까.”
“아.”
“소파에 꺼내 놓고 잘 겁니다. 그보다 저는 어디서 자죠? 설마 소파나 바닥은 아니겠죠? 게스트 룸에 침대 있습니까?”
“침대?”
“네, 저는 침대에서만 잘 수 있습니다. 미처 확인하질 못했네요.”
윤서가 미간을 좁혔다. 난감하다는 얼굴이었다.
권지한은 의아해졌다.
침대에서만 잘 수 있다니. 윤서가 잘 곳을 가리는 사람이라고…? 그 끔찍한 곳에서 긴 시간을 있었던 백전노장이 침대에서만 잘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이상했다. 그냥 더 편한 잠자리를 찾는 말투라기에는 딱딱하기도 했고.
잠시간 생각하던 권지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도 유언이야?”
“…….”
“리벤저가 형한테 침대에서 자라는 유언을 남겼어?”
“…….”
침묵하던 윤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권지한은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천장이 무너지는 것 같기도 했고,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심장이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대체 왜, 편한 침대에서 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데, 자신이 왜 이런 격정에 휩싸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권지한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자 윤서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래요?”
“아니, 형. 아, 씨.”
“뭡니까.”
“그 사람들은 정말로….”
“…….”
“형이 살아가기를 어지간히도 바랐나 봐.”
멈출 새도 없이 말이 흘러나왔다. 권지한은 전부 내뱉고 나서야 급히 입을 다물었다. 주워 담고 싶었다. 무신경한 언행을 하고 나서도 이렇게 낭패스러운 기분을 느낀 적은 살면서 거의 없는데 최근에 윤서 앞에서만 여러 번 느끼고 있었다.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윤서의 표정을 확인했는데 그는 그저 미간만 작게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맞아요. 이기적인 인간들이죠.”
윤서는 가볍게 말했다. 그게 끝이었다.
“그보다 침대가 없으면 저는 집에 가겠습니다. 이건 부득이한 문제이니 내기와는 상관없는 겁니다.”
“아, 형. 사람이 왜 그렇게 급해.”
권지한은 속에서 휘몰아치는 풍랑을 뒤로하고 윤서를 불렀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게스트 룸에 침대 있어. 거기서 자.”
“다행이군요.”
윤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표정이 풀린 그가 편안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햅쌀이 옆에 털썩 앉았다.
그래 놓곤 문득 지레 찔린 얼굴로,
“아아, 안타깝네요. 집에 갈 수 있었는데. 여기서 자기 싫었는데.”
했다. 새침데기 같은 모습에 웃음이 나와야 하는데 권지한은 웃지 않았다.
“아직 잘 시간 남았는데 ‘러브 인 한강’이나 볼까요?”
“응.”
권지한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콧잔등을 찌푸리더니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자기 전에 ‘러브 인 한강’ 재탕하는 것도 유언이야?”
윤서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동자를 굴려 권지한을 쳐다봤다.
“이건 그냥 제가 보고 싶어서 보는 겁니다.”
“그래, 그럼… 보자. 실컷 보자.”
윤서는 바로 기분 좋아져서 리모컨을 들었다. 권지한은 윤서가 햅쌀이를 도로 가져가려나 했는데 의외로 권지한이 쓰다듬도록 그대로 뒀다.
***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함께 드라마를 시청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이남주가 박여주한테 고백을 했어야 했다, 남주 입장에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고구마 답답이다, 여주가 충격받을까 봐 그런 거다 등등….
윤서는 권지한과 감상을 나누면서 감격에 젖었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면서 누군가와 덕 토크를 하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특히 그 누군가가 권지한이라 더 좋았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편을 권지한과 함께 재탕하고 싶었다.
그렇게 드라마를 11화, 12화, 13화까지 내리 시청하고 열두 시가 가까워진 후에야 TV를 껐다. 지금이라도 끄지 않으면 밤을 새울 것 같아서 윤서가 큰 결심한 것이다.
“잘 자, 형.”
“내일 제시간에 안 일어나면 저 혼자 러닝 마치고 집에 갈 겁니다.”
“무섭네. 형이나 제시간에 잘 일어나.”
각자 방에 들어갔다. 게스트 룸과 메인 침실은 꽤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둘 다 S급 헌터들인지라 서로의 방에서 이불 뒤척이는 소리까지 전부 들렸다.
권지한은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깜박였다.
지금까지 그의 집에서 잔 타인은 유준철밖에 없었다. 유준철이 잘 때는 시끄러워서 쫓아내고 싶었는데, 윤서가 이불을 뒤척이는 소리는 평화로운 자연의 음향 같아서 더 듣고 싶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윤서와 드라마 얘기를 할 때는 즐거웠지만 적막이 찾아오자 귀신같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오늘 자긴 글렀군.’
권지한은 수면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은은한 조명을 켠 그는 벽에 기대 윤서의 호흡에 귀 기울였다.
그가 잠을 자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그 여러 이유는 전부 윤서와 관련된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