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108)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108)화(108/195)
13. 실력 발휘
#99
윤서는 늘 눈을 뜨는 시간에 일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권지한의 집에서 잤다는 걸 기억해 냈기에 평소와 다른 천장에 당황하지도 않았다. 방을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권지한이 주방에서 나왔다. 양손에 양념이 묻는 비닐장갑을 낀 권지한이 저 창밖의 눈부신 햇살보다 더 눈부신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잠은 잘 잤어?”
“네, 권지한 헌터는요?”
“지한이라고 불러 주면 안 돼? 지한이는 잘 잤니, 라고 해 봐.”
윤서는 무시하고 바로 씻으러 들어갔다.
씻고 나온 후 두 사람은 그렇게 아름답다는 새벽 풍경 속 한강 변에서 사이좋게 조깅을 마쳤다. 이번에는 속도 경쟁 따위는 없이 평화로웠다.
개운하게 씻은 뒤에는 진수성찬에 버금가는 아침 식사를 했다. 윤서가 권지한에게 대체 언제 식사를 차린 거냐 묻자 권지한은 형이 일어나기 전 미리 해 놨다고 답했다. 윤서는 도저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담백하게 감사 인사를 했고 권지한은 느물느물 웃었다.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바쁘게 움직일 월요일 아침이건만 윤서와 권지한은 아홉 시가 되어서야 집에서 나왔다. 윤서는 내일까지 휴일이지만 권지한은 이제 출근해야 했다.
“형은 이제 집에 가는 거야?”
“네.”
“좋겠다. 나는 일하러 가야 해.”
“수고하세요.”
윤서도 직장인인지라 월요일에 일하러 가는 직장인을 놀리지는 않았다.
둘은 펜트하우스의 넓은 복도를 걸어 주차 공간으로 향했다. 권지한은 햅쌀이를 품에 안고서 돌려줄 생각을 안 했다. 마치 인질처럼 쥐고 있었다. 윤서는 굳이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다. 권지한과 햅쌀이가 친해지면 여러 가지로 좋을 것이다. 자신이 특별하게 여기는 둘이 서로 장난치며 노는 모습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기도 하고. 그리고… 둘이 친해져야만 하는 다른 이유도 있다.
주차 공간은 두 개 층이었고, 한 층당 다섯 대는 들어갈 넓이였는데 주차된 차는 찹쌀이 한 대밖에 없었다.
윤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젯밤에만 해도 멀쩡하게 서 있던 권지한의 차는?
오늘부터 찰보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면서 권지한이 차체를 손바닥으로 토닥토닥한 것도 기억나는데 찰보리만 쏙 사라져 있었다.
“권지한 헌터, 찰보리가….”
“아.”
의아한 윤서에게 권지한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찰보리는 아까 우리 밥 먹는 동안 석영 본사로 지 혼자 달려갔어.”
“네?”
윤서가 권지한을 돌아봤다. 194cm에 벗겨 놓으면 다 근육인 S급 헌터가 애교 섞인 표정으로 눈을 깜빡깜빡했다.
“아침 9시에 본사에 도착하도록 예약해 놨는데 취소하는 걸 깜빡해 가지고. 형이 나 좀 데려다주라.”
“그게 무슨 개소리입니까.”
“나 회사에 데려다 달란 소리.”
“하.”
윤서가 대던전에서 어처구니없는 유언을 들었을 때보다 어처구니없어졌다.
월요일이 휴가인 직장인에게 회사까지 데려다 달라는 말을 한다고?
만약 리벤저가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해도 이건 진지하게 포기를 고려해 볼 것이다.
“혀엉, 윤서 형아아. 그냥 앞까지만 데려다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힘들어?”
“정말로 건물 앞까지만 데려다주면 됩니까? 도착하면 저 깔끔하게 보내 줄 거예요?”
“이왕 거기까지 간 거 같이 구내식당도 좀 가고. 우리 구내식당은 월요일에는 반드시 소고기 나오는 거 알지?”
“…….”
윤서는 조금 혹했다. 방금 아침 식사를 거하게 해서 배가 부름에도 석영 구내식당의 음식 맛은 제법이었기에….
“개수작하지 말고 분명한 이유를 대세요.”
하지만 그는 강한 의지력으로 눈을 부릅떴다. 이딴 개수작질을 하는 데에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권지한이 애교살을 도톰하게 만들며 웃었다.
“사실 오늘 던전 브리핑 있어.”
“대던전 발표 브리핑이라면 수요일입니다만.”
“아니, 오늘은 이번 주말에 있을 S급 옐로우 던전 브리핑.”
윤서는 그제야 일정이 생각났다. 대던전 공략에 앞서 감을 찾고 싶다고 하자 권지한이 타 길드와의 연합 레이드에 참여 신청을 했었다.
윤서는 바람 빠진 한숨을 내뱉더니 찹쌀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그렇다고 하면 되지 왜 이상한 수작질을 합니까? 수상하게.”
“형이 안 간다고 할 줄 알았어.”
“전투 감을 찾아야 한다고 했잖아요. 대던전 가기 전에 S급 세 곳 정도는 가 보고 싶군요.”
“일정은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짜 놓을게. 난 이제부터 서채윤 매니저야.”
“제가 대단한 매니저를 뒀군요.”
윤서는 피식 웃으며 차에 탔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혼자 집에 돌아가 버릴까 봐 걱정됐는지 권지한이 잽싸게 커다란 몸을 들이밀었다. 권지한은 먼저 차 문을 단단히 닫고 나서 찹쌀이에게 인사했다.
“안녕, 찹쌀아.”
“주인님의 직장 동료분, 또 오셨군요.”
찹쌀이는 제 주인이 아니라 권지한에게 얼른 인사했다.
“지한이라고 불러 줘.”
“지한 님, 반가워요. 우리 주인님과 자주 놀아 주세요.”
“응응.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야. 아, 석영 본사로 가면 돼.”
“네, 출발하겠습니다.”
찹쌀이가 권지한의 지시를 듣고 차를 움직였다. 윤서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형, 차에서 할 수 있는 유언 활동은 없어?”
“있습니다.”
윤서가 한편에 놓인 수납함에서 색칠 공부 세트를 꺼냈다.
공주님, 왕자님, 아기자기한 성과 귀여운 동물들이 그려진 어린이용 색칠 공부책이었다.
권지한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책장을 넘겼다.
“보자…. 한 권에 열두 장이니까… 백 권이면 금방 끝냈겠고, 천 권은 됐나 보네.”
“맞습니다. 천 권. 이건 991권 째고요.”
“아이고, 우리 형. 고생했겠다. 수고했어.”
어린애를 기특해하는 듯한 말투였다. 윤서는 권지한에게 색연필을 넘겼다.
“심심하면 해 보세요.”
“어? 내가 하면 안 되지. 형한테 남긴 유언이잖아.”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어제는 같이하자고 했으면서.”
“그, 그때는 그랬긴 한데…. 생각해 보니까 형한테 남긴 유언이고. 그… 유언 얼마 안 남았기도 하고.”
“유언 빨리 끝나면 전 좋은데요.”
“어, 음. 글쎄. 좋은데, 그…….”
어째서인지 권지한이 난감해하면서 도통 받아들려고 하지를 않았다. 평소 같으면 거기서 그냥 색칠 공부책을 가져갔을 윤서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한 장만 색칠해 보세요.”
‘등산 같은 거 왜 다니나 했는데 올라오니까 좋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야.’
‘구름 찾기 재미있네. 가만히 앉아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거 되게 오랜만인데, 복잡한 감정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아.’
윤서가 권지한에게 이걸 권하는 이유는 바로 그 말들 때문이었다.
윤서는 어린아이들이나 할 법한 색칠 공부책을 하나하나씩 색칠해 가면서 조금… 즐거웠다. 갈색 색연필로 공주님의 양 갈래 머리를 칠하면서, 노란 색연필로 왕자님의 옷을 칠하면서, 귀여운 다람쥐는 현실에도 존재하지 않을 분홍색으로 칠하고, 푸르렀을 하늘은 노을 지는 풍경으로 만들어 버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냥 기분이 나아졌다.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건 오랜만이라는 권지한도 이 소소한 즐거움을 느껴 봤으면 했다. 어릴 때 세계 최강자로 각성해서 바쁘게 살아온 그도 이런 한가로움을 짧게나마 즐겨 봤으면 하는 마음이었다.